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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과 진실

장백산-1 2019. 6. 27. 16:05

방편과 진실 - - - 법상스님


『반야심경』이 짧은 경전을 이렇게 까지 길게 하기도 참, 쉽지 않은데. 오늘 드디어 끝납니다. 지난번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도 했구요. 또 그다음에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제 대충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반야심경』의 파사분(破邪分)이라고 해서 반야심경의 본문(本文)이 파사분(破邪分)인데 이 본문을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주는 그런 부분입니다.『반야심경』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지요.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12처 18계, 오온(색 수 상 행 식)을 설하셨어요. 지혜, 열반, 해탈을 설하셨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신기하게도 이『반야심경』은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것이 전부 다 ‘없다’고 그래요.


사성제도 없다. 12연기도 없다. 오온도 없다. 무색수상행식(無色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등 다 없다 다 없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지요. 왜 그럴까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지금 이『반야심경』에서 부정하고 거부를 하는 걸까요?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가르침(方便)을 설합니다. 가르침(方便)을 세우지요. 가르침을 세우고 나서 반드시 본인이 세운 가르침을 또다시 깨버립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평생을 법을 설하시고 ‘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계율을 설해놓고 ‘그 계율을 지켜야 돼’라고 얘기해놓고. 그런데 ‘계율을 열고 닫을 줄도 알아야 해’ ‘계율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하지만 지키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해’라고 계율을 열어놓는단 말이지요. 세상에 이런 가르침이 있을 수가 없지요.


왜냐면 모든 가르침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모든 단체는 어떤 한 가지 가르침, 주의, 사상을 딱 세워두고 그걸, 이 깃발을 내세우고 ‘날 따르라’ 하고 쭉쭉 나가는 가르침이지요. 그런데 선(禪)에서도 그러지요. “아난아, 문 앞에 찰간(刹竿)을 무너뜨려라.” 그 말 뜻이 뭐냐면? 문 앞에 전부 다 찰간에다가 이제 ‘우리는 무슨 종파야’, ‘우리는 무슨 가르침을 표방하는 종단이야’, ‘우린 이런 가르침을 주로 하는 종단이야’ 뭐 절마다 이런게 있잖아요.


‘우리 절은 염불하는 사찰이야’, ‘우리 가르침은 지장도량이다’, ‘우리 가르침은 뭐 대승사상을 가르치는 도량이다’, ‘우리 가르침은 뭐 법화경의 도량이다’,, ‘화엄경의 도량이다’ 이런 식으로 내세우는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종단은 이런 종단이야’ 하고 내세우는 그 깃발이 있어요.


그리고 누구든지 종교 지도자도 마찬가지고, 사상 철학을 하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딱 깃발을 들고 앞서서 나가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깃발 아래 모여라’ 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그 종교 사상 철학을 점점 강화시키면서 사람들에게 그 종교 사상 철학을 강조하고 심지어는 세뇌시켜서 그 길로만 가도록 만들어요. 심지어 내가 죽더라고 그 가르침은 영원해서 영원히 그 깃발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딱 하나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만은 그런 게 없어요. ‘문 앞에 찰간을 무너뜨리라’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문 앞에 그 어떤 찰간도 내세우지 마라. 그 어떤 주의, 사상, 철학, ‘이것만이 우리 절에 최고야’, ‘이것만이 우리 절이 표방하는 가르침이야’,  ‘이것만이 내가 설하는 가르침이야’라는 깃발을 내세우지 말라는 게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교리는 전부가 다 ‘이거다’ ‘이거다’ ‘이거다’ 해서 내것만 내세우는 그런 교리가 아니에요.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거기도 집착하지 마라’ ‘저기도 잡착하지 마라’,  ‘비법(非法, 진실이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지만 당연히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법상(法相)을 깨야 된다.’라는 얘기가 이게 되게 위험한 말이지요. ‘불교 아래 다 모여라’ ‘이 법 아래로 다 모여라’ 이래야 되는데. 그러려면 법을 강조해야 되고 강요해야 됩니다. 법을 내세워야 되고 그런데 불교는 법상도 깨버려라.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지요『금강경』같은 데서. 이게 얼마나 놀라운 가르침이에요. 그래서이 대승불교 경전의 가르침은 정말 아무나 공부할 수 없는 가르침이에요. 


“아무나 공부할 때는 기도 열심히 하면 다 들어줍니다.”, “어떻게 기도하면 그거 분명히 됩니다.” 이렇게 이제 세우는 걸 해야 돼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반드시 된다니까요. 이렇게 세우고 무너뜨리지 않아야 됩니다. 무너뜨리면 그 사람한테 안 가지요. 그래서 약간의 사이비 끼도 좀 있어야 되구요. 약간 사기도 좀 칠 줄 알아야 되구요. 스스로도 거기 ‘그게 맞아’ 하고 굳게 믿으면서 남들을 속이려면 나도 속아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 딱 속아가지고 그걸 그냥 확 밀고 나가야만 사실은 세(勢)를 키우고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뭘 세운 다음에 그걸 무너뜨리고 나면 그 다음에 사람들이 오겠어요? 저 사람은 뭔가 얘기하는 게 따로 없는 거 같은데 하면서 안옵니다. 


사실은 저도 유튜브에 글도 많이 쓰고 하다 보니까 스스럼없는 저의 도반 스님들 같으면 저한테 그런 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은 스님이 하는 절만 망하면 될 텐데. 왜 우리 절까지 힘들게 만들랴고 그러느냐. 우스개로 잘 한다는 얘기를 하느라고 그런 말을 하는 분도 계시고. 진짜로 이제 ‘야, 그 좀.’ 그런 분도 계시는데. 실제 요즈음 시대에는 보면 그런 게 진실을 다 오픈하는 시대에요. 옛날같이 그렇게 진실을 꼭꼭 숨기고 뭐 이럴 수가 없습니다. 뭐 제가 아는 어떤 스님 중에는 지금도 TV에 나와서 강의하는 스님 중에도 어마어마한 불교적 지식이 막, 엄청난 지식이 있는데. 그분도 보니까 뭐 그냥 할 얘기 안 할 얘기 다해서 스님들한테 욕 얻어먹고 있길래. 그래서 ‘그 스님은 왜 욕을 먹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스니;ㅁ에게 왜 욕을 하는데요?” 물어봤더니 너무 안 해도 되는 얘기까지 신도님들한테 다 한다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것이 이렇게 상(相)을 세워놓고 그 상(相)을 다시 깨는 가르침이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는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그리고 내가 그걸 믿어야 되나? ‘무조건 이 법만이 절대야’ 절대를 내세우고 절대신(絶對神), 유일신을 내세우고. 절대 뭔가, 어떤 절대적인 권위를 내세웠을 때 그게 이제 또 좋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것은 옛날 방식이지요. 옛날엔 의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만 따라갔으니까.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이렇게. 하나하나 그렇게 해서 오게 한 다음에 한 명 한 명 이제 근기가 성숙되면 조금 조금씩 이제 근기를 높여가서 법을 알려주기 위한 방편(方便)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인류역사가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 쉽게 말해 장사가 잘 되거든요. 사람들이 많이 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진짜, 진실을 안 가르쳐주고 숨겨놓기 시작한 겁니다. 진짜(진실)는 숨겨놓고 가짜(방편)만 자꾸 심어주기 시작하는 거예요. 밀교(密敎)가 뭐겠어요? 대중에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 비밀스럽게 내 제자에게 ‘사자상승(師資相承,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이어줌) “우리 둘끼리만 얘기해 줄게.”, “진짜를 얘기해줄게.” 뭐 이렇게 얘기하면 또 이제 그쪽에서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뭐 하여간 그럴 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의 시대가 놀라운 시대인 이유가 뭐냐하면, 제가 언젠가 한번 장난삼아 넘어가면서 한 얘기가 지금의 시대가 그야말로 뭐 다른 종교에선 후천개벽이니 무슨 뭐 휴거니 뭐 말세니 다양한 얘기를 하지만 이제는 신들만이, 소수의 엘리트 성직자만이, 소수의 수행자만이 깨닫는 시대가 아니라 그냥 이 깨달음이랄까 이 모든 것들이 모든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부 다 오픈되는 시대다. 숨길 수 없는 시대이고 그러기 때문에 이제 소수만 수행력이 높아지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부가 상당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돌입을 했어요. 지금의 시대에는.


그래서 이제는 진실을 뭐 숨기고 이럴 수도 없고. 이제는 그렇게 하더라도 숨겨놓고 안 가르쳐준 게 없이 다 오픈을 하더라도 이제는 성숙해서 다 안다는 거지요. 그렇게 얘기해도 다 압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그러지요. 옛날 정치인들 보면 무슨 국민들은 무슨 뭐 짐승과 같애서 뭐, 뭐 이렇게 말하면 최소한으로 어쩌구 하면은 된다느니. 이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닌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다 지혜롭고. 지금 뭐 학벌만 봐도 다들 대학도 나오고 뭐 대학원 나오고. 뭐 이젠 숨기는 그런 어떤 이런 게 없는 시대이고. 다 이제 이해를 하는 시대지요. 조금 여담이있구요.



부처님 당시에 가르침을 500년 정도 지나면서 한 사오백 년 지나면서 너무 부파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절대화하고. 자꾸 이제 이걸 절대시 하면서 교리화시키는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요. 그래서 다시 부처님 가르침의 본뜻으로 되돌아가자는 의미에서 대승불교 경전들이 나왔고.『반야심경』도 그러한 경전이지요. 그래서『반야심경』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했는데 왜『반야심경』에서는 사성제를 깨부수지?’ 이렇게 착각을 하는데. 


부처님이 왜 사성제를 설하셨겠습니까? 중생들이 괴로워하니까 중생들의 근기(의식수준)에 맞춰서 하신 말씀입니다.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성제를 설할 필요가 없지요. 고(苦)를 설할 필요가 없고. 고(苦)의 원인을 설할 필요가 없어요. 고(苦)가 없는데 고(苦)를 왜 얘기를 해요. 고(苦)가 본래 없는데. 고(苦)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만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방편인 사성제를 설하신 거지요.


‘내가 태어났어.’, ‘나라는 게 있어’, ‘나는 진짜야,’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이 나라고 동일시해서 진짜라고 착각하는 사람에게, 사람은 ‘나’가 있잖아요. 내가 있고. 내 몸이 있고. 이게 나라는 존재가 생겨났잖아요. 생로병사를 겪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생로병사라는 괴로움의 원인을 설하면서 12연기를 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본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 사람이라면 본래 생노병사가 없음을 확연히 깨친 사람이라면 생한 바도 없어요. ‘나’라는 게 없어요.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겐 12연기를 설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니까 이 12연기, 사성제는 방편(方便)입니다. 스스로의 괴로움에 빠져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그 괴로움이 허상, 환상이라는 걸 설하기 위해서는 환상의 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필히 환상의 약이 필요해요. 진짜 약이 필요한 게 아니라. 환상, 환상만 깨주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환상의 약을 주는 겁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전부다 환상의 약입니다. 환상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환상의 약


그래서『반야심경』에서 다 ‘없다’라고 하는 이유는 본래 이런 게 다 없다. 본래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착각하니까. 분별망상을 가지고 착각하니까 ‘있다’고 여기면서 스스로 '괴롭다'라고 착각하니까 그 괴로움을 깨주기 위해서 방편으로 '있다' '있다'라고 말했었던 것일 뿐이지요. 그런데 본래는 그런 게 없지요. 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본래 부처야”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본래 부처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또 그런데 이제 실감이 나나요? 본래 부처라는 말이. 실감이 안 나잖아요. 사실은 부처에 대한 상(相)이 있어서 그래요. ‘부처는 이런 걸 해야 돼’ 부처는 32상 80종호를 막 구족해야 되고. 부처는 전생도 보고, 실수를 안 하고, 몸이 아프지도 않고,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다 할 수 있다거나. 뭐 신비주의적이고 카리스마 넘치고. 뭐 나름대로의 부처라는 깨달음이란 상(相)이 있으면 그 상(相)을 부처라고 생각하고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거는 체험을 못하지요. 실감을 못하지요. 왜?나에겐 그게 없으니까. 그런데 그건 내가 만든 허상, 환상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기서 부처를 실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매 순간 부처를 실감하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제 말을 듣고 있지요?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써 부처를 실감하고 있는 거예요. 두 눈으로 저를 지금 보고 있잖아요. ‘본다.’라는 그 사실로써 부처를 늘 실감하고 있는 거예요. 매 순간 부처를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숨 쉬고 있는데 아까부터 지금 제 얘기 들을 동안 억지로 숨 쉬려고 노력한 사람 있습니까? 누가 숨을 쉬었어요? 부처라고 하면 안 돼요. 그것도 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잖아요. 본래 부처라는 것도 따로 없으니까. 이게 실감하고 있단 말이에요. 숨이 그냥 저절로 쉬어지고 있었습니다. 매 순간 내가 이렇게 살아 있었어요. 모든 것이 저절로 이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처는 늘 언제나 어디에서나 체험되고 있고 실감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고. ‘듣는 성품’ 이런 얘기 들어보셨지요. 듣는 성품 그것도 하나의 방편(方便)이지만. 듣는 성품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듣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듣고 있음. 들음. 들을 뿐. 이 자리. 첫 번째 자리에 있는 게 아니고, 듣자마자 해석하는 자리. 듣는, 제가 말하는 이 말을 듣는 게 아니고. 이 말을 내 머리로 내가 해석해서. 내가 쥐어서. 내 식대로 조합을 해서. 이걸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이라고 믿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제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제가 한 말을 여러분들 제각각의 의식(意識)대로 해석한 그 말을 제각각 듣고 있지요 머릿속에서 분별하는 생각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있다가 “지난 주에 스님이 무슨 얘기를 해주었어요?”라고 누가 물어보면 10명이면 10명 전부 다 “이런 얘기를 해줬다.”라는 걸 얘기 들어보면 제가각 다 다른 얘기를 해요. 그럼 그거는 ‘정말 다양한 얘기를 했나?’

‘왜 이분한테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한테 저 얘기를 했지?’ 어떤 사람은 똑같은 얘기를 했는데 안 들었다고 그럽니다.(웃음) 다 안 들었다 이럽니다. 여러분 웃으실 입장이 아니실걸요?(웃음) 여러분 아마, 제 강의 작년 거. 그 작년 거. 유튜브에서 몇 번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중에 자신의 안목이 바뀌고 나서 다시 들으면 ‘왜 이걸, 이때부터 얘기했었네?’(웃음) ‘난 왜 못 들었지?’ 그런 경우 많습니다. 분명히 한 얘기인데 내가 의식에서 그냥 걸러버려요. 안 들은걸요. 내가 이해가 안 되니까 안 들은 걸로 그냥 걸러버립니다. 그런 게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얘긴데. 똑같은 얘긴데.


제가『반야심경』공부한다고 그러거나 이러면 하는 얘기가 기초교리? 사성제. 삼법인. 12연기. ‘아이, 그거는 제가 한 30년 전에 벌써, 벌써 뗀 거를 지금 와서’『반야심경』이 그럴 수 있는 경전이 아니에요. 똑같은 연기법. 사성제. 삼법인이. 그런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이 골수를 우리가 온전히 소화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오늘 이제 하이라이트(highlight)가 나오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리가 지혜를 공부했는데.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반야심경』에서. ‘무지(無智)’ 지혜가 없다. ‘역(亦)’ 또한. ‘무득(無得)’ 얻음도 없다. 즉 해탈, 열반, 자성, 주인공, 본래면목, 성품, 참나, 이런 거 없다는 겁니다. 실재가 없고.

부처님 가르침이 무아(無我)잖아요. 무아(無我). 무아법(無我法)이잖아요. 본래 뭔가가 있는 게 아니고. 어젯밤에 꿈을 꾸었을 때 그게 어젯밤 꿈 속에서는 진짜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전부 다. 모든 내용이 전부 다 진짜 실제로 있다고 생각했잖아요. 어젯 밤 꾼 꿈속에서는 진짜 100% 실제로 있었지요. 꿈속에서는 실제 있었잖아요. 그런데 꿈을 깨고 났더니 꿈을 꾼 내용들이 하나도 실재하지 않잖아요.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어디로 갔을까요? 그때 느꼈던 그 실재 그 공간 그 건물들 사람들 모두 다 어디 갔지요.


꿈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재(實在)라면 어딘가 있어야 되는데 꿈 속 일들은 실재가 아니잖아요.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전부가 다 내 의식(意識), 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 환상이지요. 의식이 창조한 환상이지요. 내가 꿈을 깨는 순간 그 꿈의 세계가 전부 다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이 정해진 실체로써 있는 게 아니라 인연 따라 ‘인연생 인연멸 한다’는 인연가합(因緣假合)이라는 말처럼 인연이 가짜로 화합해서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가 가르치는 얘기는 내가 봤으니까 보는 내가 진짜 있고. 보이는 바깥의 대상이 진짜 있고. ‘세계가 진짜 있어서 내가 그 진짜 있는 세계를 내 식대로 인식한 거야.’ 이게 아니라는 얘기잖아요. 보는 나도 진짜가 아니야. 보는 나라는 건 없어. 보이는 세계라는 게 진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세계가 진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진짜 있는 세계를 내 식(識)대로 해석하고. 사람들은 자기 식(識)대로 인식(認識)하지. 그게 의식 (意識)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전부가 다 제각각 각자 따로따로 인식하니까 그게 제각각 다르게 인식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의식(意識)도 바깥 대상도 전부 다 고덩되어있는 실체(實體)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실체가 아니 의식과 대상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어떻게 창조됩니까? 눈과 바깥 보이는 것들과 의식이 삼사화합(三事和合)이 되어서 눈이 있음으로써 바깥 경계가 있고. 바깥 경계가 있음으로써 눈이 있습니다. 바깥 경계는 있는데 눈이 없어도 보지 못해요. 눈만 있고 바깥 경계가 없어도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눈과 경계 이 두 개는 연기적(緣起的)으로만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는 동네에 있는 것 중에도 거의 평생을 못 보던 것도 많을걸요? 맨 날 지나가는 길에서 못 보는 거 많습니다. 그런 것처럼 눈 있다고 보는 게 아니에요. 눈과 색이 인연 따라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걸 12연기에서는 안근이 색경을 촉할 때, 촉(觸)이라는 것 자체가 접촉할 때. 눈으로 보는 그 접촉에서 촉입처라 이랬잖아요. 촉(觸)이라는 것은 ‘있다’라는 느낌 뭔가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마음을 촉입처라고 한다 그랬어요. 이걸 보자마자 안근이 색경을 접촉할 때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작용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걸 이제 한 바퀴 돌아서 가면은 생노병사가 되는 거지요. 진짜 생긴 것처럼. 이게 진짜 생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의식인 거지요.


어젯밤 꿈에 100% 생생한 진짜라고 느꼈던 것처럼 이 현실세상은 인연 따라 만들어져서 꿈과도 같이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실재화시키고 실체화시켰단 말이지요. 그래서 꿈 같은 현실세상 그걸 쥐고. 그걸 진짜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이 그냥 지나가다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습니다 가볍게. 그러면서 그냥 욕을 한 마디하고 지나갔어요. 그 욕에 반응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지요. 하는 게 좋은 건지 안 하는 게 좋은 건지는 논외에요. 그건 자기 스타일이지요. 쉽게 말해 나에게 시비 걸고 지나가는 사람, 욕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서 혼을 낼 건지 말 건지 그거는 뭐 자기 업(業) 따라 하는 거잖아요. 그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나는 신경 안 쓴다’ 하고 그냥 가도 그것도 여법한 거지요. 그런데 불러 세워서 ‘저놈 내가 정신을 차려주고 해야 되겠다’ 해서 불러놓고,


고등학생 아이가 하나 이렇게 저기 멀리서 담배 피우고 있다. 그런데 기어이 붙잡아놓고 기압을 주고 가도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아이고, 쟤 엄마도 안 되는 걸 내가 되겠나?’ 그러고 지나가도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뭐 자기 선택이지요. 그건. 옳고 그르고 가 아니라 그냥 그거는 논외로 하고. 어깨를 툭 치고 욕을 하고 지나갔는데. 거기에 내가 괴로울 건지 말 건지는 내가 선택해야 되잖아요. 그러데 그냥 우리는 요즘 젊은 사람들 보니까 뭐 힙합을 하고. 뭐 이런 친구들 보면 서로 만나면 반갑다고 어깨를 툭 치면서 막 반가워하잖아요. 인사라고. 그럴 때는 기분 안 나쁘잖아요. 좋지. 이게 나를 기분 나쁘게 하진 않는데 이걸 가지고 내가 기분 나빠할 건지 말 건지 내가 만드는 거지. 실체가 아니지요. 그냥 인연이 부딪쳤다는 인연. 그런데 그 부딪쳤는데 얘가 내 친구가 아닌 얘가 와서 부딪쳤으니까 내가 화가 난다. 그런데 내 친구가 와서 부딪쳤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그럼 부딪치는 것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게 아님에도 내가 인연 따라 어떤 인연은 좋은 것. 어떤 인연은 나쁜 걸로 만들어놨으니까 내가 창조한 거지요. 이거 부딪쳤다고 괴로울지 말지는 내가 창조한 거지. 바깥에 달려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 마음에서. 그럼 똑같애요. 어떤 사람은 부딪쳤지만 별생각 없이 그냥 “네, 들어가세요.”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러고 지나가는데 “야, 너 서봐.” 이러면서 시비 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자기의식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딪치고 지나가거나 욕을 하고 지나가거나. 그 욕은 잠깐 생겼다 사라지고 끝났어요. 그 사람이 나를 욕하고 지나갔어도 지나가면서 잠깐 욕하고 지나가는 거 끝났지요. 저도 욕 얻어먹어봤는데요. 차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뭐가 마음에 안 들었든지 옆으로 휙 가면서 창문을 열고는 막 욕을 이렇게 하고 가는 분이 계시더라구요. 욕을 할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 욕을 듣고 그 욕은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욕은 인연 따라 소리라는 파장이 그 사람이 입을 벌리고 말을 한다,라는 그 인연 따라 소리라는 파장이 저한테 와서 들렸어요. 그런데 그 인연이 생겼다 사라지고 끝납니다. 그 자리에서. 이와 같이 보세요. 소리가 야, 라는 소리가 생겨났다 사라지고 끝났어요. 없어요. 실체가 있습니까? 실체가 없잖아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옆에 사람이 나를 이렇게 한 대 때렸다. 이거 실체가 없습니다. 사라져버렸으니까. 이걸 내가 쥐어도 되고 쥐지 않아도 돼요. 비실체성이지요. 진짜가 없습니다. 모든 게 똑같애요. 물질도 똑같습니다. 남편, 아내, 자식, 똑같습니다. 이와 같이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고 끝나는 거예요.


이 소리에 내가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듯이. 모든 게 그렇게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지지만 뭔가 그 소리가 실체가 있어서 생겼다 사라지나요? 우리는 실제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계산했냐면, 길거리에 사람이 지나가다가 툭 어깨를 부딪쳤는데 ‘이건 뭐지?’ ‘저 사람과 나와 전생에 어떤 악연이 있나?’ ‘내가 전생에 저 사람을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걸로 이렇게 내가 한 건가?’ 아니면 ‘신이 저 사람으로 나투어서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 저 사람에게 저렇게 시켰나?’ 아니면 ‘이게 뭔가 암시를 주는 건가?’ ‘내 인생에 뭔가 슬픈 일이 일어나기 위한 암시인가?’ 이러면서 뭔가 그 뒤에 담긴 무언가를 자꾸 찾으려고 애써요. 그냥 인연이 생했다가 인연이 멸하면 끝납니다. 그게 인연법(因緣法)이에요.


인연 따라 생겼났다 사라지고 거기는 그 어떤 뭔가 없어요. 알맹이가 없습니다. 알맹이가. 실체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아라는 게 없습니다. 그걸 이끌어가는 어떤 원동력이 될 만한 뭔가, 뭔가 이런 게 따로 없다. 그런데 그렇게 소리가 생겨났다 사라지고 끝난 것과 똑같이.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고 끝날 뿐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러 길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이제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저마다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이제 해석하기 시작하는 거지요. 무명, 행, 식. 어리석기 때문에 ‘행(行)’ 일어나고 있는 일들, 행위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의미 부여를 하고. ‘잘 했다’ ‘잘못됐다’라는 의미 부여를 하고. 그 행위에 따라서 그 경험에 따라서 어떤 자기마다의 의식이 생겨나고. 분별의식 분별심이 생겨나서 어떤 사람은 특정한 거에 상당히 기분 나빠하고. 어떤 사람은 특정한 거를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고. 이렇게 만든 자기의식이 만든 거짓된 창조 세상이지요. 거짓된 세계를 자기 세계를 자기의식이 만든 거지요. 나라는 이미지. 세계라는 이미지. 우주라는 이미지를 모두가 자기의식으로 만들어놓고 그 잣대를 가지고 세상 전부 다 보이는 모든 것을 들리는 모든 소리. 냄새 맡아지는 모든 것들. 맛 보이는 모든 것들. 감촉 느껴지고 생각의 대상. 모든 것들을 재단(裁斷) 합니다. 자기가 이제 만들어놓은 그 의식이라는 틀, 색안경에다가 다 투영해서 보느라고 자기 세계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가 그렇게 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세계가 그렇게 있기 때문에 내가 그걸 느낀다면 동일한 걸 보고 전부다 동일하게 느껴야 되는데. 동일한 걸 보고 어떤 사람은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슬퍼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보거든요. 그러나 그런 세계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가능합니다. 정해져 있으면 그거 가능하지 않아요. 그런데 정해져 있는 실체가 아니니까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보는 거지요.


다르게 보는 그 생각 때문에 그 생각이라는 허상이 만들어졌잖아요. 생각이라는 허상의 세계가 만들어진 겁니다. 허상의 세계가 만들어졌고 그 허상의 괴로움이 만들어졌고. 허상의 괴로움으로 내가 허상으로써 괴로워하고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허상의 세계를 깨주시는 겁니다. ‘세계가 진짜 있다’라는 게 내 마음속에 있는 허상이니까 그 허상을 깨주면 내 마음속에 허상이 깨졌을 뿐인데 모든 것이 멸해버립니다. 적멸(寂滅). ‘있다’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 그것들이 적멸(寂滅)이다. 적멸(寂滅)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완전히 공(空)해서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거든요. 적멸(寂滅)이나 공(空)은 같은 의미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다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게 이제 허무주의와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다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서는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지혜, 본래 지혜는 없지요. 지혜라는 건 본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언제나 전부 다 지혜를 쓰고 있는데 따로 있는 지혜는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해서 자신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분별 망상을 하고 있다 보니까 그 분별 망상이 깨진 상태를 지혜라는 방편의 이름 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우리에게는 본래 지혜는 이미 구족 돼 있었고. 본래 부처라서 본래 지혜는 늘 구족 돼 있고 매 순간순간 지혜를 쓰고 있어요. 그런데 분별 망상이 지혜보다 더 크게 힘을 쓰고 있었던 거지요.


해서 분별 망상만 제거하면 되는 거예요. ‘파사(破邪)’, 바르지 못한 삿된 걸 파하기만 하면 본래 있던 ‘현정(顯正)’ 바른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따로 지혜를 얻을 게 없습니다. 지혜는 뭐 본래 구족 된 상태이고. 본래 구족 된 상태라는 것은 지혜라는 이름을 쓸 필요도 없지요. 지혜라는 이름도 필요 없어요. 지혜라고 이름 붙이면 그거는 어리석음. 지혜롭지 못한 것과 상대적으로 만든 가명. 가짜 이름이거든요. 그러니까 본래 따로 지혜도 없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따로 없다. 본래 깨달을 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깨닫고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으로 분별을 하지만 깨닫는 거 깨닫지 못하는 거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원만 구족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는 아닌데요.” “나는 아파서 건강한 사람에 비하면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난 지금 너무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아무리 심하게 괴로워한들 꿈 그건 실제가 아닙니다. 꿈을 깨면 꿈은 끝나지요. 그 꿈속에서 괴로운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한다고 해서 꿈속에서의 괴로움은 끝날 수가 없습니다. 내 옆 사람의 괴로움,뒷사람의 괴로움, 친척의 괴로움,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다 없애줘야지만 꿈속 세상이 극락세상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수백조 원이 아니라 수천조 원이 있어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돈을 다 나눠줘도 전세계 사람들 다 행복하게 만들 수 없어요. 돈이 문제가 아닌 괴로운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금강경』에서 ‘칠보를 전 우주, 삼천 대천세계에 무한히 보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경전 한 구절 공부하는 거, 수지 독송하는 것만 못하다. 산술적, 그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그걸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이 법(法)을 공부하는 공덕이 훨씬 크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부터 완벽하게 구족한 상태인데 중생심으로 보면 구족하지 않았지요. 중생심, 분별심으로 보면 구족하지 않았지만, 진실로 보면 본래 이미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다. 꿈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꿈속에 있었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괴로움을 한 방에 끝낼 수 있지요. ‘돈오’ ‘몰록’ 이게 어찌 보면 요즘에 '한방에 뜨는 걸' 뭐 좋은 게 아니다 이러는데. 이 마음공부는 그야말로 한방입니다. 꿈에서 깨면 끝나는 거기 때문에. 그게 위대한 거지요. 왜냐면『금강경』의 비유처럼 일체중생을 구제하려고 삼천대천세계, 우주를 아무리 다녀봐야 다 구제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일체중생이 다 꿈에서 깨어나는 거예요. 왜 그러냐?


내가 바로 본래 둘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본래 얻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얻어야 된다’ 하고 막 사로잡혀 있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미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 있는 것 그게 전부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을 돌리면 아주 가벼워지지요. ‘나는 지금 여기 나에게 있는 것, 그것을 원하겠다’ ‘지금 여기 나에게 있는 것을 원하겠다’ 그럼 그건 이미 이루어졌어요.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이길 원하면 삶은 이대로 완전하고 청정하고 원만구족하고 오고 가는 것도 없고 불생불멸이고 자유롭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더 열심히 살지 않느냐? 더 열심히 삽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가 없는데’ 할 정도로 열정과 에너지를 투영하며 삽니다. 부처님처럼 그렇게 평생을 열정과 에너지를 불태우면서 삽니다, 


부처님이 활동하신 지역을 인도 지도에서 보면 인도는 땅이 워낙 넓지만 한반도로 따지면 수백 개 이상 모아놓은 거리일 거예요.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도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남한 땅 몇 수십 개 이상 되는 그 땅을 걸어서 평생을 다니셨어요. 법을 설하기 위해서. 한도인(閑道人), 한가해서 할 일 없는 도인. 깨달은 자는 한가한 겁니다. 분별을 하는 마음이 한가한 거예요. 몸은 이것 저것 모든 것을 하면서도 마음은 한가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이길 원하셔도 충분합니다. 그러더라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쓰게 돼요. 집착하지 않을 뿐이지.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더 순수한 열정이 피어오릅니다.


내가 하는 일에 크게 집착하지는 않지만 일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게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우리 어른들과 다른 거지요. 어린아이들은 진짜 몰라서 모르는 거지만. 어른들은 생각할 거 다하면서 생각한 바에 집착하지 않는 거예요.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생각할 거 다합니다. 열정을 다 일으키고. 돈도 벌고. 사회 기여할 거 다하고. 할 거 다하지만 거기 과하게 마음이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얻으면서도 얻는 바가 없어요. 얻는 바가 없으면서도 다 얻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고.


여러분이 부처가 된 다음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내가 그와 같다는 겁니다. 사실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본래부터 이미 다 완벽하게 구족 되어 있습니다. 원만 구족. 난 아파서 남들 보다 오래 못 살 거 같은데요. 그냥 죽으면 되지요.(웃음) 어차피 너나 나나 다 죽을 건데. 그리구 100년 뭐 100년은 천상세계 시계로 보면 눈 깜짝일 시간이라 그러잖아요. 눈 깜짝일 시간인데 뭐 1초 더 있다가 가나. 0. 0001초 좀 더 사나. 사실은 별거 아닌데.


의식이 50살에 죽는 것과 80살에 죽는 건 엄청난 차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50살, 80살, 그런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50살이세요? 80살이세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지금이지. 분별하지 않으면 지금 여러분은 그냥 지금 이대로일 뿐이지. 나이가, 내가 50년 산 게 진짜 50년 산 거 같습니까? 시간이라는 게 마음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어떨 때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어떨 때는 1년이 확 지나가는데. 어떨 때는 1년이 엄청 길 수도 있잖아요. 마음에서 시간이 경험되는 거지. 시간이란 실체는 없어요. 그냥 내 의식, 내 마음이 그렇게 시간을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50년 후에 죽는 사람은 상당히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성공한 사람인데, 10년 뒤에 죽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요. 그런 일이 없습니다. 50년 더 사는 일 30년 더 사는 일 그런 일이 없고 그냥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텅~빈자리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뭐 오래 살고 짧게 살고. ‘난 오래 살아야 돼’ 이런 생각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렇게 듣고, 제 얘기를 듣고 있는데 여기 이 자리에 비싼 차를 타고 오나 싼 차를 타고 오나, 비싼 옷을 입고 오나 싼 옷을 입고 오나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제가 아는 저 부산에 계신 신도님께서 아주 보살님이시고. 거사님이 돈도 많아 버시고 부자신데. 그 보살님이 그렇게 보석, 그분한테 제가 “이 얘기 써먹어도 되나?” 물어봐서 “써먹으라고, 적극 써먹으시라고.” 얘기 듣고 하는 얘기예요.(웃음) 그분이 그때 엄청난 걸 깨달았답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해주시길래 제가 감동적이어서 말씀드리는데. 그분이 결혼한 이후로 남편이 돈도 잘 벌겠다. 결혼한 이후로 계속 보물을 모은 거예요. 집에 보물을 보석을 모았는데.


뭐 예쁜 귀걸이, 팔찌, 목걸이, 뭐 ‘이쁘고 귀하다’라는 건 그렇게 모아서. 본인은 스트레스만 받으면, 남편은 회사 가고 나서 얘들 학교 가고 나서 집안에 앉아가지고 그거를 착 펴놓고 이렇게 구경만 해도 스트레스가 다 해소가 되고. ‘이런 거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 하면 막 간절하게 그거 하나 또 사가지고 하나 또 채워났을 때 그렇게 막 뿌듯하고. 이게 당신 평생, 정말 너무너무 자신을 위로해주고 그렇게 큰 행복일 수가 없었대요.


그러니까 이걸 집안에 꽁꽁 숨겨놓고서 늘 그것만 바라보는 즐거움. 그것을 수집하는 즐거움. 그래서 연세가 지금 꽤 되셨으니까 그 연세가 되시는 동안 계속해서 평생을 그 비싼 걸 모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거 하나 모을 때마다 막 그렇게 희열을 느끼고. 막 그렇게 행복감을 느끼셨다 그래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몽땅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냥 단독주택에 살았는데, 도둑이 들어서 그거를 홀랑 다 가져 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찾아주겠다.” 하고 이제 경찰서에 가가 지고, 경찰이 이제 조사를 해야 되잖아요. 차마 나는 얼마큼 잃어버렸다.라는 말을 못 하겠더래요. 경찰이 나를 ‘저런 미친 여자가 다 있나’ 하는 생각할까 봐. ‘저렇게 보석을 미친 듯이 모으는 저런 여자들이 있구나’ ‘저 정신 골 빈 여자가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까 봐 차마 그 보석이 얼마짜린지 말도 못 했대요. 부끄러워서.


그래서 경찰서에 실제 신고한 액수는 훨씬 조금만 신고를 했다 그러더라구요. 그거를 남편한테도 얘기 못했대요. 지금까지. 저한테 얘기를 하면서 제 남편한텐 비밀입니다. 남편도 이렇게 비싼 거라는 걸 모른다는 거예요. 남편은 그냥 뭐 몇 십만 원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할 거라고. 그렇게 정말 애지중지하면서 정말 모았는데. 하루아침에 도둑을 맞았는데. 그날. 그날 그냥 멍하더래요. 이 세계가 그냥 다 무너진 것처럼 너무 멍하더래요.


그런데 하루 종일 멍하고. 너무 괴롭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 앉아서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는데. 신기하더래요. 신기하게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그 이면에 또 다른 마음이 하나가 있는데. 그 마음은 뭐냐면? 자유로움이더래요. 너무 신기하더래요. 이게 집에 있다 보니까 이거를 내가 그 어디, 은행에 가면은 이렇게 맡겨주고 뭐 이런 거 하려니까 비싸고. 온갖 고민도 많고. ‘이거 도둑 들면 어쩌나?’ 막 이랬는데. 막상 도둑 들어 다 가져가고 나니까 ‘이제 내가 여기 얽매일 필요가 없겠구나’ 왜냐면 이제 애들도 좋은 데 취직 다 했고. 남편도. 뭐 하나 바랄 게 없는 거지요. 더 이상. 그런데 이제 이거 하나 보고 살았는데. 이거 하나 보고 내 인생 즐거움을 느끼고 살았는데. 이게 없어지고 나니까 신기하게 자유롭더래요. 가볍더래요.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정말 이거 없는 게 그렇게 자유롭구나’ “지금은 어떠시냐?” 물어봤더니. 지금은 전혀 안 산데요. 살 필요성도 못 느끼고. 그런데 이제 다만 도둑이 들어온다는 게 겁이 나서. 칼이라도 들고 왔을 텐데. 겁이 나서 바로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더라구요. 그분 얘기를 가만히 들어 보니까 ‘야, 그럴 수 있겠다’ 싶더라구요. 그러구 나서 이분이 달라진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절에도 더 열심히 나오게 되고. 마음공부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지금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보살님이시거든요.


그러니까 뭐 집착, 욕심, 이런 게 별로 없으세요. 지금도 보면. 그냥 늘 베풀기 좋아하고. 뭐 남들 사주기 좋아하고. 그래서 참, 이렇게 마음을 그렇게 쓰셔서 신기해서 여쭤봤더니 이제 그런 사연을 얘기하시더라구요. 사실 나도 그러지 않았다. 나도 모을 때는 그 모으고 싶을 때는 그렇게 썼겠어요? 이거를 내가 조금만 더 모으면 내가 원하는 걸 살 수 있는데. 못 쓰지요. 그러니까 너무나도 자유로워졌단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있을 때만 원만 구족한 게 아니라 ‘없다’라는 것이 더 자신을 깨닫게 할 수 있어요. 이걸 평생 죽을 때까지 가져갔었으면 그걸 깨닫지 못하고. 그걸 실천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겁니다. 물질은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지잖아요. 아까 욕 한마디 한 게 생겼다 사라지고 끝난 것처럼. 물질은 생겼다 사라지고 끝납니다.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