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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없이 보기

장백산-1 2019. 6. 19. 12:21

첫 번째 자리에서 분별없이 보기



대승불교에서는 방편인 말로 표현된 진리를 세속제(世俗諦)라고 이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 또는


승의제(勝義諦)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진짜' 진리와는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일단 진리가 방편인 


말이나 문자로로 표현되면 진리가 한 번 왜곡되고, 언어라는 상(相)으로 그려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이나 글로 억지춘향이 격으로 짜맞추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이나 이름의 방편은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진짜 사과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진짜'에 그저 '사과'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사과'라는 


이름 속에 사과는 없습니다. 그 이름이 사과라면 사과를 먹고 싶을 때, 그 이름만 들어도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을까요? 당연히 아니죠. 방편일 뿐인 사과라는 이름, 언어에는 진짜 사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예로 든것 처럼 깨달음, 진리를 설명하는 방편인 모든 말에는 '진짜' '깨달음', '진짜'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깨달음, 진리는 이런 것일거야', '해탈, 열반은 이런 것이겠지' 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 보더라도, 그런 깨달음 진리는 하나의 이미지 그림이고, 방편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같은 깨달음 진리는 '진짜' 깨달음 진리가 아닙니다. 견성, 성불, 해탈, 열반, 참나, 본래면목, 


그 어떤 방편의 말에도 진짜 깨달음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인 말이나 문자에 떨어지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고 설명합니다. 


방편인 말만 붙잡아서는, 방편인 문자(경전)에 집착해서는, 특정한 상(相)으로 그린 그림을 붙잡아서는


'진짜' 깨달음 진리에 다가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라는 방편의 말도, 사과에 대한 방편인 그 어떤 


말로 하는 설명도, 사과에 대한 방편인 사진도,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진짜'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먹어 보면 될 뿐, 먹어 보고 나서 '진짜' 사과에 대한 맛을 


굿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방편인 말로 설명해 버리면, 벌써 자기 식(識, 인식, 분별심)대로 해석한 


자기만의 식(識), 인식(認識), 분별심(分別心)에서의 가짜 사과가 되고, 해석된 사과가 되기 때문에 '진짜'


사과와는 멀리 어긋나 버립니다. 



그러니 매 순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실, 진리, 깨달음을 그저 있는 그대로 온전히 경험해 보세요. 


이름 붙이지 말고, 그림 그리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말로 표현하지 말고,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십시오. 



보되 본 것을 해석하지 말고, 듣되 들은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느끼되 느끼는 것에 대해 이름 붙이지 


말고,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첫 번째 


자리, 분별 이전, 본래자리, 승의제 자리, 제일의제 자리에서의 생생한 경험입니다. 생생한 존재 그 자체


입니다. 



지금 눈 앞에 뭐가 보이나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해보십시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