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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진흙소와 코로나 바이러스

장백산-1 2020. 3. 3. 20:24

두 마리 진흙소와 코로나 바이러스


"두 마리 진흙소가 서로 머리대고 싸우다가 울부짖으며 바닷속으로 들어갔는데 두 마리 진흙소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아무리 찾아보았는데도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네. 아무 소식이 없네."


-백운경한 선사 -


이 시는 당나라 때 담주 용산 화상이 동산 양개, 신산 승밀 선사와 선문답에서 밝힌 내용을 고려 말 

백운 경한 선사가 다듬어 정리한 내용이다.


용산화상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두 분 스님께서는 어느 길로 오셨소."

동산스님이 용산화상에게 되물었다. "용산화상께서는 어느 길로 오셨습니까?" 하니

용산화상이 "나는 운수 납자였던 적이 없다네."하니

"그러면 용산화상께서는 이 산에 계신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용산화상이 대답했다. "봄, 가을을 거치지 않았네."

"용산화상이 먼저 있었습니까? 산이 먼저 있었습니까?"

"모르겠네."

"어찌 모른다 하십니까?"

"나는 인간이나 하늘을 위해 이 산에 온 것이 아니네."

"용산화상께서는 어떤 도리를 보셨기에 이 산에 계십니까?"

용산화상이 답했다. "나는 두 마리 진흙소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후 아직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다네."


이 선문답은 <염송 295>에 수록되어 있다.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 선사가 선사를 예방하러 

온 사람들에게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고?'라고 즐겨 물었다고 하는데 경봉선사의 말은 아마

위에 든 용산화상과 동산스님간의 선문답에서 따온 질문일 것이다.


선어록을 보다 보면 후대 선사들이 선대 선사들의 말씀을 가져와 가르침을 편 내용을 심심치 않게 발견

하게 된다. 성철스님이 말씀하셨다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송대 선어록을 보다 보면 

청원유신 선사가 처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창의성과 저작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사람들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 말이 후대 여러 선사

들이 차용한 것을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이 말씀이 그때나 지금이나 생명력 있는 가르침

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대한민국 뿐만이 전세계적으로 건강을 위협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감염병이 전파되고 있다.

국민 각자가 조심한다고 노력을 함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운 생각은 시시각각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치료제도 없고, 예방할 수 있는 백신도 개발되지 

않은 상태라 막막하기만 하다.


국민 각자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연일 감염자 수치가 올라가고, 제때 치료받지 못한 노인

들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뉴스를 보고 듣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손을 비누로 자주 씻고 마스크를 하는 아주 단순한 일밖에 없다.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감염을 막는 최선의 일이라는 것이 마음 아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뾰족한 묘안이 없어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 아니 사람에 따라 그 이상 이런 꽉 막힌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 이런 상황은 양날의 검이 서로 부딪치는 듯한 위태로움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

막함이 교차한다.


이런 막막함이 교차하는 상황은 내가 바라는 길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극과 극을 이룬다. 지금의 

상황이 두렵고, 죽을 것만 같다. 지금의 상황과 마주치고 싶지 않고 회피하고 싶으며 달아나고 싶다. 그

러나 이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다. 벗어날 길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만약 그런 길이 있어 

그 길을 간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해를 입는다. 내 뜻대로 하자니 가까운 사람들이 다칠 것이고, 

가까운 사람들을 위하자니 내가 죽어야 한다.


이와같은 상황이 바로 두 마리 진흙소의 싸움이다. 진흙소는 오염되어 더러워진 인간의 마음이다.

두 마리 진흙소는 분별(分別) 망상(妄想), 번뇌(煩惱)에 오염되어 더러워진 인간의 마음을 진실하다고 

여기는 착각이다. 소는 소인데 청정한 흰(白) 소가 아니라 더러워진 검(黑)은 진흙소이다. 내가 마음이

바라는 상황과 현실에 주어진 상황이 적대적인 상황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언제 어디서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과 그것에 

감염되어 죽고싶지 않은 마음이 바로 두 마리 진흙소이다.


인간의 가장 큰 장애인 생(生)과 사(死)의 투쟁은 길이 보이지 않고, 끝이 나지 않는다. 생(生)과 사(死)

라는 두 마리 진흙소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는 한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 진흙소가 나온 곳, 즉 모든 존재

의 근원(根源), 눈앞, 목전(目前),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분별(分別) 망상(妄想), 번뇌(煩惱)는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평화는 없다. 어떻게 초월하는가? 어떻게 

바다, 존재의 근원, 본향(本향)으로 돌아가는가?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불안한 상황을 그려내는 마음바다, 존재의 근원, 본향(本향)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역사 이래 사람들은 자연과 무수히 싸웠고, 이웃 사람들과 무수한 전쟁을 벌였고 명분은 훌륭했다.

자연을 정복하여 풍부한 물자를 얻는 것이었고,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만 

년의 역사 동안 온갖 피를 흘리며 노력해 왔지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세포보다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이같은 두려움과 공포는 지금까지 행해온 인간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열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부합

하는 행을 하는 것만이 모든 갈등, 두려움과 분별(分別) 망상(妄想), 번뇌(煩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분별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이 세상 모든 모든 현상의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외적, 내적인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진흙소가 진흙소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 모든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만이 영원한 

해결책이다. 분별심이라는 진흙소가 나온 곳 여기에는 어떤 바이러스도 침투할 수 없다. 또한 여기에는 

두려움이라는 생각, 환상, 망상, 번뇌, 분별이 침투할 수 없다. 분별심이라는 진흙소가 나온 곳 여기에는 

상대가 없어서 싸우는 일이 불가능하다.


주유소 미터기가 올라가듯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치와 사망자 수치가 올라간다. 마스크 쓴 

사람들의 행렬이 쓸쓸하고 애잔하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모든 현상의 본향(本鄕), 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은 바로 마음이다. 숫자 따라 일렁이는 감정이 바로 마음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의 바다에 

비치는 잔상들이다.


이 사실을 명백히 보고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면 그 뿐이다.


ㅡ <몽지릴라밴드>에서 릴라 임순희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