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계가 아닌 마음의 세계 / 릴라
언젠가부터 나는 이 세계에 태어나 살고 있다고 여겼다. 이 세계의 환경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이 세계라는 시공간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나긴 세계의 역사 속
어느 시점에서 내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났고, 일정 시간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이 분명하고
여겼다.
그때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 세상이 두렵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 내던져진 듯한 나의 존재가 불안했다. 삶, 인생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흐릿했다.
어린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내가 몹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친구들은 자신의 부모님이 모욕을 당하거나 비난받으면 마치 자신이 그런 것을
당하는 것처럼 몹시 화를 내고 울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 부모님이 비난
이나 모욕을 당하더라도 내가 당한 것처럼 동일시(同一視)가 되지 않았다. 내 부모님이 비난받는데
화가 나지 않는 나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보자면 부모님과 애착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그렇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심리학적 설명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무언가 더 큰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타자에 대한 유착이나 동일시가 나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는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언니나 오빠는 분명 나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친구들과도 친밀하게 지내고
사람들과의 관계, 그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시선들에 대해 나보다는 훨씬 예민했다. 그래서 삶에 더
적극적이었는데 나는 언제나 주변인처럼 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빠져나갈 길도 보이지
않았다. 유년기를 생각하면 언제나 주변인, 방관자, 관찰자 그리고 멀리서 그들과 그들의 삶을 보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처럼 살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항상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이란 없다는 것을. 모두가 나의 내레이션이었다는 것을.
이 시절 나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짤막한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시인
사람들 사이엔 공간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치할 수 없고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가
좁혀져서 일치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할 수 있고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섬이 있기 때문에. 늘 혼자여야 하는 삶이 두렵고 외롭다. 이 삶의 면면이
어떠한 지도 알 수 없고 내가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더욱이 그런 삶을 사는 나는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희미한 그림자와 같다. 모든 것이 흐릿한 상태가 젊은 날의 삶이었다.
사유(思惟)를 통해 그 공간, 그 거리, 틈새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언어로 그 틈새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그 틈새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확인한 것은이 틈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아니다. 생각은 생각하는 대상과 일치할 수
없다. 부딪침은 상대방의 존재감만 더 부각시킨다. 뭔가 이상하다. 삶이 이런 것이라면 탈출구가 없다.
삶의 모호성, 인생의 불가지성, 덩달아 느껴지는 나 자신의 불분명함. 이런 삶을 평생 살다 간다는 것은
너무도 비참하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떠한지 내가 사는 삶이 무엇이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만 보내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너무 억울하다. 그때 만난 것이 선(禪) 이었다. 선(禪)은
고요함이다. 선은 적멸(寂滅)이다. 선은 공(空)이다. 선은 바로 지금 여기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화엄
세계이다.
우리네 삶은 본래 선(禪)이다. 선을 만나면서부터 나의 착각과 실수를 보게 되었다. 가장 큰 실수는
이 세상과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이었다. 이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이 모든 갈등의
시작이었다. 존재라는 것은 나의 상황이나 세상의 상황에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내가 태어나고
사라져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라고 여겼다.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 세상을 일정 기간 살아가는 내가 따로 존재해야 한다. 더불어 모든 사물뿐만
아니라 사유까지 존재하는 것이 된다. 눈앞에 사물들이 낱낱의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이 사물들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 사물들은 일정한 시간을 세상에 머물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사물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사물이
이렇게 나타날 수 없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이전에 여러 겹의 의식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무지의 세월이었다. 분별의식, 분별심, 분별하는 생각이 너무도 순식간에 진행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지금 눈앞에 컵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은 지나온 삶과 현재의 경험의
결과이다. 어느 시점에 이 물건이 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지금 컵을 보니 이 시각적인 경험상을 컵이라고 이름 붙여 존재로 만들고 있다.
만약 과거에 이런 물건을 보지도 못했고 이 물건이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학습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것은 지금의 이 컵이 될 수 없다. 지금 이렇게 지나온 삶 동안 받아들인 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금 지각하는 작용과 이름을 붙이는 의식과정을 거쳐 컵이라는 객관적인 물건이 존재하는
것처럼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 마음에서 말이다. 모든 것은 다양하게 변주된 의식의 응집이다. 지각의
으식, 느낌의 으식, 사유의 의식, 의지의 의식, 분별하는 의식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하여 지금 눈 앞에
있는 컵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의식은 바로 마음의 묘용(妙用)이다.
세상 모든 것이 이와 마찬가지다. 세상이 있다면 세상이라는 분별의식이고, 내가 있다면 나라는 분별
의식이다. 그리고 내가 상대하는 세상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나와 함께 나타나는 의식이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경으로 두고 일어나고 있고, 옳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깔고 성립되고 있다.
나와 세상, 행복과 불행, 좋고 나쁨이 모두 마음 하나에서 쌍으로 일어난 다양한 분별의식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 속의 내가 아니라 세상이 곧장 나이다. 남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곧 나다.
본래 어디에도 틈이 없었고 공간도 시간도 섬도 없었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고 괴로워하거나 분노할
존재가 따로 없고 오고 갈 틈새, 거리, 공간이 없었다. 이 세계가 낱낱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착각이
틈새와 갈등과 외로움과 두려움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마음 하나의 세계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온갖 것을
차별 없이 드러내는 이 마음 말이다. 우리는 늘 이 세계를 살았다. 이 세계를 떠난 적이 없다. 나와
세계가 동시에 출현하는 이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마음 하나의 공(空)한 세계이다. 이것이
참된 삶이고 참된 나 자신이다. 이것이 선(禪)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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