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 - - 원각경(圓覺經)
법문을 하다 보면 대개가 옛날에 스님네들이 간절하게 해주신 법문(法門)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기도 하는데, 내내 옛날 스님네들이 가지고 쓰던 얘기를 똑같이 해 주지만, 그 내용이 달라요. 그런데 문제는 똑 같지만, 스님들이 얘기해 주는 해석과 뜻이 달라요. 내가 볼 적엔 아주 전혀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 다른 점을 얘기할 테니 들어 봐요.
삼백 년 전에 월봉(月峰) 스님이 금산사(金山寺)에서 선지식(善知識)으로 이름을 크게 떨치며 많은 학인(學人)들을 가르치고 있었어. 그 때 벽송 지엄(碧松智儼) 선사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인가를 받고 월봉스님 문하에 와서 학인 노릇을 하면서『원각경(圓覺經)』을 배우게 되었지.
『원각경(圓覺經)』에 무슨 말이 있는 고 하니,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 이런 법문(法門)이 있어요.
그런데 월봉 스님이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 그걸 어떻게 토(吐)를 달아서 학인들에게 가르쳐 주는가 하면, ‘무변허공(無邊虛空)에 각소현발(覺所顯發)이니라.’ 이렇게 가르쳐 준단 말이야. ‘각(覺)’은 '깨달은 자' 부처님(佛)이야. ‘가(邊, 시작과 끝)없는 허공(虛空)에 부처님이 나타난 바’ 이런 뜻이야. 그러자 벽송스님이 월봉스님께 말했어. “아닙니다. 그렇게 토(吐)를 달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월봉스님이 벽송스님에게 “그래? 그럼 어떻게 토(吐)를 달아야 되느냐?”고 말씀했어.
벽송스님이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이다 라고 달아야 그 뜻이 맞습니다.”라고 하니 “예끼, 이 미친 놈아!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스승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지, 학인이 버르장머리 없이 이견(異見)을 다느냐!” 하니까 벽송스님이 “스님, 그래도 토(吐)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무변허공(無邊虛空)에 각소현발(覺所顯發)이니라’라고 하면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는 주체(主體) 따로 있고, ‘각(覺)’이라는 객체(客體)가 따로 있다는, 즉 주체와 객체가 둘로 나뉘어서 분별해서 하는 말이 된다 이 말이야.
월봉(月峰)스님은 ‘무변허공(無邊虛空)에 각(覺)이 나타난 바이다’라고 새긴 것이고,
벽송(碧松)스님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이다’ 라고 새긴 것이다.
벽송스님이 새긴 것은 ‘가(邊, 끝)없는 허공(虛空) 전체가 그대로 각(覺, 깨달음) 그 자체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무변허공(無邊虛空)과 각(覺)하고 둘로 나눠놓은 것이 아니지. 이처럼 어떻게 토(吐)를 다느냐에 따라 전혀 해석이 다르다 이 말이야. 월봉스님 벽송스님 둘이 서로 아니다, 맞다 싸우다 월봉 스님이 제안을 하셨어.
“네가 정 그렇다면, 대승 경전(大乘經典) 중에 하나인 이 원각경(圓覺經)은 중생의 망상으로 해석하여 서로 싸울 일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토(吐)를 다는 것이 맞는가를 화엄신장(華嚴神將)이 판단을 해주게 화엄기도를 하자. 사흘동안 기도를 해서 만약 네 말이 옳고 내 말이 틀렸으면 내가 화엄신장의 철퇴를 맞을 것이고, 네가 틀렸으면 네가 화엄신장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그래서 화엄기도를 사흘 동안 했어. 사흘 기도를 하고 회향일(廻向日)에 누더기를 입은 어떤 수좌(首座) 한 명이 절에 왔어. 와서 딱 앉았는데, 옛날에도 누더기 입은 수좌한테는 아주 절대적인 진리를 물어 봐. 그 수좌스님이 심판을 하는 거야.
두 스님이 '에'와 '이' 토 중에 어떤 토(吐)가 옳으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그 수좌스님 말이 “토(吐)를『 이』로 놓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거든. 그 말이 똑 떨어지자마자 월봉 스님이 그냥 저 뜰 바깥에 탁 나가떨어지면서, 떼굴떼굴 구르면서 피를 토하고 죽어 버렸어.
그렇게 되니까 ‘아하! 비록 벽송스님이 월봉스님 문하의 학인이었지만 학인의 소견이 옳은 것이로구나!’ 이런 것을 대중이 판단을 했어. 그런데 화엄 신장은 사흘 동안 기도하는 중에 왜 그런 흔적을 못 보여주었느냐하면, 대승경전의 대승 도리를 감히 화엄 신장이 어떻다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 판단을, 눈을 갖춘 정안(正眼) 납자(衲子)가 와서 딱 내려 주니까 그제서야 냅다 월봉스님에게 철퇴를 가한거야, 정법을 위해서. 그래서 호법 신장(護法神將)이야. 옛날 부처님 때부터 부처님이 호법신장에게 정법(正法)을 항상 보호(保護)하라는 위촉(委囑)을 하셨기 때문에 그 책임을 이행한 거지.
그래서 그날 그런 일이 있었어.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토(吐)를 달아 해석하는 것에 달렸어. 해석에 따라 아주 그렇게 다른 도리가 있어. 내가 말하는 중에, 혹시 옛날 스님네들 하던 말 그대로 가져다 하더라도, 그 뜻이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으니까,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 새로운 뜻을 발견해야 돼요.
-원담스님(圓潭眞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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