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화사회·복지

철학이란 살면서 죽음을 연습하는 것

장백산-1 2020. 7. 26. 23:29

[삶과 문화] 철학이란 살면서 죽음을 연습하는 것

입력 2020.07.26. 22:00

 

 

서울 마포대교 난간에 자살 예방 목적으로 설치된 펜스와 문구. 류효진 기자

 

 

오랜 기간 정신과 의사로 살아오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경험은 예전에 진료했던 분들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다. 면담 시,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호소하거나 삶에 더 이상의 의미나 미련이 없다고 토로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병원을 찾는 분들은 그나마 세심한 관리가 가능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정신과를 방문하지 않는 분들은 아무래도 자살위험이 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통계를 살펴보면 최근 15년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물론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삶이 너무 힘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비율이 전체 인구 대비 최고인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에 인코딩된 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탄생하며 자연수명을 마친 이후에 소멸하게 된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우리 몸의 세포는 두 가지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세포 괴사(necrosis)는 물리적인 충격이나 독성 물질과의 접촉 등으로 상처를 입어서 죽는 것을 말하며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미한다. 반면 프로그램된 괴사(apoptosis)는 정해진 운명에 의해 일어나는 죽음을 말한다.

 

따라서 개체가 자신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의 생물학자 레너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은 "정상적인 세포는 모두 일정한 분열 수명이 있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더는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변이가 일어나서 죽지 않게 된 세포를 다른 말로 ’암세포‘라고 부르는데 이놈들은 결국 개체를 파괴시킨다. 이런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한 길이 혹여 실패로 귀결될지라도, 그 길 너머에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단 한 번뿐인 인생이므로 그 운명을 사랑하자"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환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그만두는 일만큼은 절대 하지 말라고 늘 당부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이야기했듯이 세상의 사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나 세상을 행복하게 살고자 마음먹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칼 융(Carl Jung)은 "죽고 싶다고 호소하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죽음을 바라는 것이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주위의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사는 동안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단숨에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하기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이것이 자살인지 사회적 타살인지 억측을 할 뿐이다.

 

더는 유명인의 자살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일반인에게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간과한다면 누군가는 또다시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박종익 강원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