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을 내려놓고 보면 그대로 고향이다 - - 종범 스님
근대에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선사인 만해 한용운 이라는 스님이 계신다. 스님은 많은 글을 남겼는데,
많은 글 중에 ‘선 밖의 선(선외선/禪外禪)’이라는 글이 있다. ‘선 밖의 선(선외선/禪外禪)’이란 참선이니
좌선이니 선정이니 하는 말을 전혀 쓰지 않고 또 그런 훈련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을 말한다는 것이다.
‘선 밖의 선(선외선/禪外禪)’이라는 글은 당시 만해 스님이 서울의 선학원(禪學院)을 다니실 때 안국동
입구에서 상추를 파는 노점상이 있었는데, 상추를 사려고 노점에 온 주부가 상추를 고르며 흥정하고 있
었다.
상추를 사려고 고르는 주부가 상인에게 말하기를 “상추잎이 왜 이렇게 작습니까?”하였다. 그러자 상인이
“아닙니다. 작게 보면 작지만 크게 보면 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용운 스님은 깜짝
놀라며 생각하기를 ‘저 사람들은 선정(禪定)이 무엇이고 참선(參禪)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일상 생활 속에서 선(禪)을 말하고 있구나’ 하였다. 선(禪)은 마음이고 지혜(智慧)이고 실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 속에 선(禪))이 있는 것이다.
"작게 보면 작고, 크게 보면 크다"는 이 말속에 중요한 면이 있다. 사람들이 보통 ‘무엇이 있으니까 보인다’
라고 말하고, ‘산이 있어서 산을 오른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있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이 세상은 하나밖에 없어야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세상이 아니라 모기가 보는 세상이
다르고, 파리가 보는 세상이 다르고, 새가 보는 세상이 다르고, 뱀이 보는 세상이 다르고, 사람이 보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불찰미진수(佛刹微塵數)의 세상, 즉 티끌같이 많은 세상, 티끌같이 많은 우주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각자 각자가 제나름대로의 세상,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소나무 한그루를 볼 때도 기분이 좋을 때는 소나무가 이쁘고 좋게 보이고, 기분이 괴로울 때에 보면
밉고 괴롭게 보이는 법이다. 결국 세상은 보는 기분대로 보이는 것이지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고향(故鄕)에 있는데 늘
나그네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의 나그네 즉 중생인 것이다. 언제나 늘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알지 못하고 나그네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해스님이 1917년 정사년에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무엇
인가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 때 깨달음을 얻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 을 남기셨다.
남아도처시고향 (男兒到處是故鄕) 남자대장부가 가는 곳 마다가 고향인데
기인장재객수중 (幾人長在客愁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향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가
일성갈파삼천계 (一聲喝破三千界) 큰 소리 한 마디에 삼천대천세계(우주)를 부숴버리니
설리도화편편비 (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숭아 꽃잎들이 조각조각 날고 있구나
이것이 깨침의 세계이다. 우리의 마음이 진짜 고향이다. 이 고향을 모르고 항상 마음 밖으로만 고향을
찾는데 자기가 찾는 고향은 자기가 만든 고향이다. 자기가 만들고 버리고 또 반복하는 것이 중생인데,
이런 중생이 바로 항상 고향에 살면서 고향의 나그네로 사는 중생이다.
심생법생(心生法生) 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일어나야 우주(세상)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마음이
일어나야 세상(우주)가 보이지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우주)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주는 나의 마음이 일어나는 만큼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마음 바깥에
세계, 세상, 우주가 있는 줄로 알고 헤매기 때문에 항상 고향에 살면서 고향을 모르고 떠도는 고향의
나그네가 어리석은 중생인 것이다. 이것을 일러 어리석음(우치/愚癡)이라 하고 무명(無明)이라 하고
윤회(輪廻)라 한다. 자기 마음이 만들어 낸 세계(세상, 우주)인데 그같은 사실을 모르고 끊임없이
마음 바깥으로만 헤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의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
틱낫한 스님이 유명한 법문을 하였다. 40년동안 가지 못한 고향을 방문했을 때 설하신 법문인데,
“조상이 어디에 있는가? 내 몸에 조상이 있다. 내 몸에 조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조상을 만나려면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하면 된다. 마음의 고향은 나의 참마음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정신적인 고향,
신체적인 조상이 자신의 몸에 다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행복(幸福)을 누리는 길은 우리의 몸부터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몸이 바로 조상이 깃든 고향이기 때문이다. 몸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다음으로는 생각을 살펴 보아야 한다. 매일 하는 생각은 무엇이고, 일어나는 생각, 사라지는 생각은
무엇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모든 행복의 열쇠는 몸과 생각에 있는 것이다. 몸을 제대로 파악하면
조상이 물려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고, 생각을 깊이 관찰하면 거기에서 여유로움과 기쁨을 찾아낼
수 있다. 생각을 살피지 않고 마음 밖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고, 귀에 들리는 것만 쫓아 다니면
끊임없이 대상을 따라다니게만 된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몸을 살피고 생각을 살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요 진리의 열쇠인 것이다. 몸을
살피지 않고 생각을 살피지 않고 밖으로만 헤맨다면 그 떠도는 행위는 멈춰지지 않는다. 이것은 예부터
큰스님들께서 계속 가르쳐주신 바이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의 일화도 그것이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는데, 당시는
당나라 초기로 유식불교(唯識佛敎)가 번창했을 때이다. 신라의 스님이었던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은 당시
당나라로 가는 고구려와 백제의 육로가 막혀있어서 뱃길을 이용해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신라 땅을
떠나 충남 직산 지역에 이르렀을 때 비도 오고 밤이 깊어 쉴 곳을 찾다 보니 토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토굴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깨어보니 그 토굴은 무덤의 감실이었고, 해골바가지도 있었다. 길을
나서야 하지만 비가 계속 내려 길을 나서지 못하고 그 무덤 속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그런데 원효
스님은 해골이 있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지난 밤은 편히 잠을 잘 수 있었건만 알고 난 지금은
잠을 이루기는커녕 뒤숭숭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원효스님은 그것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세상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세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철저히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가고자 애썼던 중국유학길이지만 갈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공부는 책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도(道)는 형식으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공부,
도(道)는 일상 생활 속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그 깨달음으로 유학길을 접었으나 의상
스님은 홀로 유학길에 올라 10년 동안을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여 도(道)를 이루었다. 우리가 읽고있는
‘법성게(法性揭)’를 지어서 남기고 ‘법성도’를 그려서 남긴 스님이 바로 의상스님이다.
그렇듯 누구에게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다 있는 것이다. 마음이 열릴 때에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
세상만 따라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육조
혜능스님은 마음을 깊이 깨달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님 역시 책을 읽고 깨달았다거나 규칙적인 좌선
수행으로 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시장에 나무를 팔러 왔다가 시장통 한 곳에서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어디에나 다 있다. 새소리에도, 물소리에도, 바람소리
에도 다 있다. 깨달음은 마음만 열리면 되는 것이다. 딴생각 많이 하지 말고 항상 깊이 보고, 생활을
단조롭게 하고, 살피고 또 살피는 생활을 하다보면 원래 고향 속에 있기 때문에 저절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꿈속 세상에 있는 것만 보일 뿐 자기가 누워있는 집은 볼 수 없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집이 보이는 것이다. 혜능스님의 일화 중에, 스님이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법문을 하기 전에 절 앞에 꼿혀있는 깃발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이 언쟁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 하고, 한 사람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본 혜능스님이 말하였다. “불시풍동(不是風動)이요 불시번동(不是幡動)이요 인자심동(仁者
心動)이라.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향을 직접 본 혜능스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형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 만큼만 보이고, 마음 만큼만
들리는 것이다. 모든 느끼는 것이 자기의 마음 만큼만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의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거울 앞에 서보면 그림자가 거울속에 보이는데, 저것이 나의 그림자임을 알고 보기 때문에
그림자인 줄 알지만,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한번도 비추어 본적이 없는 사람은 거울 속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인지, 거울 속의 사람이 자기의 그림자인 줄 모른다.
한용운스님의 불교대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인도의 깊은 산속에 한 노인 부부가 살았는데, 한번은 술을
큰 독에 담궈 두었다. 술이 익어 걸러졌을 즈음에 할머니가 술 단지를 들여다 보니까 어떤 할머니가 단지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가서 ‘왜 나 몰래 술독 속에 다른 할머니를 숨겨두었냐’고 따졌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영문을 몰라 하며 술독에 가 보았다. 할아버지가 들여다보자 그 속에는 할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놀란 할아버지는 다시 할머니에게 ‘왜 나 몰래 술 단지 속에 모르는 영감을 숨겨두었느냐’고
따져 물었다는 것이다. 술독 속에 비추어진 그림자는 자신의 모습인데, 자신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 그 노
부부는 자신의 모습인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모습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자신의 마음이 꿈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지 않았다면 그 꿈속의 일은
없는 것이고, 또 꿈이 사라지는 즉시 그 꿈속의 일은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나의 생각이 보았던 모든 것은 다 사라지는 것이다.
생각, 마음이라는 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수, 상, 행, 식(受, 想, 行, 識)이다. 수, 상, 행, 식
(受, 想, 行, 識)은 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수, 상, 행, 식(受, 想, 行, 識)은 몸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몸이 죽는 순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한 것이다.
영가시식을 할 때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息本來空)’ 이라고 늘 하는 것이 그것이다. 환경에서 얻어진
것은 환경이 바뀌면 없어지고, 몸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은 몸이 사라지면 다 사라지는 것이다. 진짜로
마음의 고향에서 얻는 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눈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눈으로 보는 능력이
본래 마음, 마음의 고향,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슬프면 울면 된다. 하지만 울지만 말고 그 슬픈 마음이 어디서 왔는가를 찾아 들어가면 금방 깨칠 수 있다.
소리가 들릴 때 그 소리가 좋다, 싫다 분별(分別)하면서 하면서 소리만 따라가면 윤회(輪廻)이고 소리를
듣는 마음이 무었인가를 찾아 들어가면 마음의 고향, 본래 마음,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들어가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마음의 고향, 본래 마음 그 마음은 몸이 생겨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몸이 없어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 생각이 일어나면 그 마음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향에 들어가는 것은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는 마음을 돌이켜 보고, 들리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듣는 마음을 돌이켜보는 회광반조(會光返照)를 하여야 한다. 몸을 가만히 살펴보면 몸은 무상하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은 다르다. 순간 순간 늙어가는 몸인데 그같은 사실을 모른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이라고 하지만 죽는 순간만 무상(無常)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이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
을 알면 탐욕이 일어날 수가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탐욕을 살피고 살피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나그네의 시름을 벗어나 죽음이나 슬픔이 없는 마음의 고향에 이르게 되면 완전한 휴식을 얻을 수 있다.
그 속에 들어가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 그 신심만큼 자기를 확실하게 구제하는 것은 없다. 이것을 고향집
문안으로 들어가는 입문이라고 한다. 신심이 자꾸 성장해서 커지면 한단계 더 나아가 마당을 지나 마루
위에 올라간다고 하여 승당(昇堂)이라 하고,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하여 입실(入室)
이라 한다. 이렇게 단계가 있지만 믿지 않으면 입문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믿어야 향상이 되어
승당을 하고 입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실을 하고 나면 방안에서는 모든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해서 마음의 고향에 들어왔다면 자신을 위해서는 더 할 것이 없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의 고향에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 즉 보살행을 하여야 한다. 방에 들어왔더라도 그
방에서 기쁨과 편안함을 누리기만 한다면 덜 된것이고,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계속 길을
인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훌륭한 길을 찾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이해를
못해서 항상 생각을 멈추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멈추고, 놓아야 한다. 생각을 조금만 멈춰도
편안해진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생각을 멈추고, 생각을 내려놓고, 아무 분별없이 세상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고향인 것이다.
근세에 훌륭한 스님 중 한분인 경허스님의 오도송 중에 ‘돈각삼천시오가(頓覺三千是吾家)’라는 구절이
있다. 삼천대천세계, 즉 우주가 모두가 나의 집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는 말이다. 생각으로 세계를
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지 지혜로 보면 보이는 것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라는 말은 곧 가는
곳 마다 나의 고향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 고향으로 갈려면 먼저 믿어야 하고, 계속 노력하면 결국
입실을 하여 깊은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 다음에는 아직 고향을 모르는 많은 나그네들을 위해 보살행을
펼치는 것이 부처님의 길이고 불자가 가야 할 길이다.
출처: 무진장 - 행운의 집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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