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공(空)'이란 무엇인가?

장백산-1 2020. 9. 30. 19:52

'공(空)'이란 무엇인가?   - - 이광진 박사

 

‘공(空)’이란 무엇인가? ‘공(空)’은 대승(大乘)불교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다. 그래서 이 단어 공(空)의 뜻을 알면 불교를 다 이해했다고 할 정도로 ‘공(空)’은 불교에서 핵심 단어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이 ‘공(空)’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매우 고차원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공(空)’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하나님처럼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궁극적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공(空)’을 ‘본무자성(本無自性)’의 기호로 본다. 불교는 이 세계가 인연(因緣 : 직접원인과 간접조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일체 현상에는 본래(本來)부터 갖추고 있는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독자적(獨自的)인 본성(本性)인 자성(自性)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같은 가르침 바로 ‘본무자성(本無自性)’을 함축해서 한 글자로 표현한 말이 ‘공(空)’이다. 따라서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면 ‘공(空)’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승려이자 법사인 법상도 ‘공(空)’의 의미를  ‘본무자성(本無自性)’과 비슷하게 잘 설명해 준다.“ ‘공(空)’, ‘무아(無我)’는 ‘없다’라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일체 제법이 연기, 즉 인연생 인연멸 한다’는 사실을  ‘공(空)’, ‘무아(無我)’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 현상은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며, 중도(中道)이고, 무분별(無分別)인 것이다. 공(空)의 모습이 바로 연기(緣起)이고, 연기이기에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어 본래무자성(本來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법사 법륜은 ‘공(空)’의 실천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아주 쉬운 예를 들어 잘 설명해 준다. 매일 절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는 한 노파가 있었다. 이 노파에게는 매우 슬픈 사연이 있었다. 그녀가 시집을 가서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남편이 애석하게도 이 전쟁터에 나갔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그녀는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이 여인은 그 참혹한 전쟁의 혼란기에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웠다.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오직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신앙으로 기도하면서 버텼다.

 

다행히도 두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한국의 좋은 대학교의 의대와 공대에 각각 진학해 졸업을 한 뒤 둘 다 국비장학금으로 미국 유학을 갔다. 그 후 그들은 미국에서 각각 교수와 의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노파는 한국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자식들이 한국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가 염려되어 미국에 와서 함께 살자고 간청했다. 이 노파는 고민 끝에 한국에 있는 재산을 다 정리하고 미국으로 갔다. 한국을 떠날 때, 그녀는 한국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이 끝나고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마음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이 노파의 미국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 판, 그야말로 생지옥(生地獄)이었다. 이 노파는 영어를 할 줄도 모르고, 길도 모르고, 운전도 못하니 자기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토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답답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가끔 자식들이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주고, 식당에서 외식도 하게 해주었지만, 이런 걸로 답답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이 외출하자고 해도 따라가고 싶지 않게 되었고, 자식들은 결국 자기들끼리만 외출하는 형국이 되었다. 너무나 속상하고 살기가 힘들어서 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해도, 자식들은 “어머니, 왜 그러십니까? 해드리는 밥 잘 드시고 편안히 주무시면서 잘 계시면 되지,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고생을 하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 한국 절이 생겨서 그녀는 다시 절을 열심히 다녔다. 그러나 기도만으로는 미국생활의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법사 법륜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법륜은 그 노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살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 아시지요? 모든 것이 보살님의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보살님 스스로 자초한 겁니다.”

 

법륜스님의 이 말에 이 노파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보응을 받느냐고 반문했다. 두 아들이 나쁜 자식들이지 자신이 자식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따졌다. 이에 법륜은 이렇게 말했다. “보살님은 착합니다. 착한 건 좋지만, 보살님은 어리석습니다. 보살님은 두 아이만 잘 키우면 내가 후에 편안하게 잘 살 거라고 생각을 하셨는데, 마치 주식 투자를 하듯이 자식들에게 투자를 한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데 투자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왜 무엇을 자식에게 바랍니까? 금강경을 많이 보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금강경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남에게 베풀 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입니다. 남에게 베풀 때 대가를 바라게 되면, 보살님 처럼 이렇게 두 자식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아들들에게 뭔가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 기대가 보살님 뜻대로 안 되어서 괴로운 겁니다.”

 

다시 이 노보살은 반문했다. “그래, 내 잘못이라고 칩시다. 내가 두 아들에게 기대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자식은 자식의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법륜이 답했다. “이런 걸 따지면 한이 없습니다. 제가 봐도 보살님 두 아들은 나쁜 놈들입니다. 자식이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오늘부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저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고 남이다.’ 항상 절을 하면서 ‘저놈은 남이다. 남이다. 남이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녀는 발길을 끊었던 그 절에 한 달 후에 다시 찾아가 법륜을 만났다. 법륜이 물었다. “보살님, 그동안 왜 절에 안 오셨습니까? 매일 절에 와서 기도를 하셔야 되지 않습니까?” 이에 이 노파는 “부처님은 절에만 계시는가요? 제가 깨쳤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 노 보살은 법륜에게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과 불교를 잘못 배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화가 치밀어 올랐었단다. 자기가 이런 소리를 듣는 것도 자식들 때문이라는 생각에, 자식들을 보기만 해도 눈에 불이 일어났다고 한다. 너무 화가 나서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저놈의 자식은 남이다. 남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식을 보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더라는 것이었다. 자식이 남으로 보이니까 화가 가라앉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또 자기 자식이더라는 것이다.

 

드디어 이 노보살은 자식이 남으로 보이는 순간 마음의 불이 내려가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이후로 그 노보살의 삶은 천지개벽(天地開闢)하는 것처럼 바뀌었다. 남은 자기에게 밥도 주지 않고, 용돈도 주지 않고, 재워 주지도 않는데, 남이 이렇게 자기를 대접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 가지가 다 고마운 거였다. 생각이 바뀌니까 말투도 바뀌고 행동도 바뀌게 되었다. 밥을 얻어먹었으니 설거지라도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방 청소도 하고, 자식들이 용돈을 주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알게 되었다. 노 보살이 그렇게 변하니까 이제는 자식들이 어머니를 서로 모시겠다고 나온단다. 

 

이제 이 여인은 괴로워 하는 마믐에서 자유(自由)로워지는 해탈(解脫)을 경험한 것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자식도 남이다”라는 생각의 전환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법륜은 ‘공(空)의 도리’라고 한다. ‘공(空)’은 거창한 초월적(超越的) 진리(眞理)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空)’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일상(日常)의 진리(眞理)라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