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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한 '공화국'

장백산-1 2020. 10. 17. 12:51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한 '공화국'

 

정만진 입력 2020.10.17. 10:54

 

 

정치 폭압과 경제 실정으로 무너진 유신 독재

 

[정만진 기자]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비상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대통령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의 금지, 헌법의 일부 효력 정지와 비상 국무회의에 의한 대행, 새 헌법 개정안 공고'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박정희는 이를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하는 유신(維新)'이라고 설명했다.

 

열흘 뒤인 10월 27일 비상 국무회의는 평화적 통일 지향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표방한 개헌안을 의결·공고했다. 약 한 달 뒤인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율 92.9%, 찬성율 91.5%였다. 헌법이 11월 21일에 통과했는데도 이름이 '11월 유신' 아닌 '10월 유신'으로 정해진 것은 박정희가 10월 17일 대통령 선언을 발표할 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투표는 11월 실시, 결과는 10월 확정

 

현기영의 1985년 창작 단편소설 〈겨우살이〉는 당시 상황을 증언해준다. 서울 어느  고등학교의 동료 교사인 '권'과 '나'가 핵심 등장인물이다. 소설의 첫머리 월일은 개헌 투표(유신헌법) 하루 전, 즉 1972년 11월 20일이다. 내일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진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학교 당국은 교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오늘 단축 수업을 한다고 알린다. 학교장은 교사들에게 일찍 수업을 파해서 시간 여유가 생겼으니 모두들 가정방문을 나가라고 지시한다. 학부모들을 찾아다니며 내일 개헌 투표에 결코 기권해서는 안 된다고 홍보하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사 1인당 30호 이상의 가정방문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학부모로부터 도장을 받아오라고 명령했다.

젊은 교사인 권과 나는 학교장의 지시에 맞서 교육의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는 요지의 반대 발언을 한다. 하지만 두 사람도 결국은 가정방문을 위해 교문을 나서게 된다. 모두들 가정방문을 마치고 나서 저녁 무렵 술집에 모여 울분을 토로한다.

이듬해 봄 교사들 개개인 앞으로 교육부장관의 서신이 전달된다. 향후에는 반드시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권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린다. 동료 교사들은 권이 '봄을 기다리지 않고 도피성 이민을 떠났다'고 평가한다.
 


유신 헌법이 내세운 개헌 정신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박정희 본인의 영구 장기 집권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국회 국정감사 폐지, 대통령에 국회해산권 부여

 

유신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대통령 선출도 국민 직선제가 아니라 각 지역에서 뽑힌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 투표하는 간선제로 바꾸었다. 또 법원의 판단 없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대통령에게 주었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은 없애는 대신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을 부여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투표율 92.9%와 찬성률 91.5%를 보여주었다. 놀랍다. 어떻게 이토록 일사분란할 수 있을까! 1961년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그해 12월 17일에 실시한 개헌 국민투표 때 투표율 85.3%, 찬성률 78.8%보다도 높다. 종신 대통령을 하겠다는 데도 이렇게 열심히 투표장에 가고, 또 찬성을 하다니!

1975년 2월 12일 박정희는 독재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강해지자 신임을 묻는 형식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때 찬성률은 73.1%로 1961년 12월 17일 개헌 투표 때와 엇비슷했다. 그러나 유신헌법 국민투표 때 91.5%보다는 많이 낮은 찬성률이었다. 그런데 1980년 10월 22일 신군부가 대통령 간선제를 실시하겠다며 실시한 국민투표 때는 다시 투표율 95.5%, 찬성률 91.6%가 되었다. 
 

대통령 간접선거 때의 투표율과 찬성률

간선으로 대통령을 뽑은 선거에서도 투표율과 찬성률은 대단했다. 1972년 8대 대통령 선거 때 유권자 2359명 중 2357명이 박정희 후보를 찍었고(2명 무효), 1978년 9대 때는 2581명 중 2577명이 박정희 후보를 찍었다(무효 1, 기권 3). 1980년 11대 때는 2540명 중 2524명이 전두환 후보를 찍었다(무효 1, 기권 15). 

 

이극찬의 <정치학》>에 따르면, 정치 체제·정책 결정 과정(정치가, 정당, 압력단체, 대중운동, 언론 등의 활동)·정책 집행 과정(공무원, 경찰 등의 역할)·정치 주체(국민 본인)에 관해 국민이 어떠한 지식·감정·가치판단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회는 전근대적 전통 사회, 과도기적 신민(臣民) 사회, 시민적 민주 사회로 구분된다.

 

네 분야 모두에서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 시민적 민주 사회, 정치 체제와 정책 집행 과정에는 긍정적이지만 정책 결정 과정과 정치 주체에는 부정적이면 과도기적 신민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전근대적 전통 사회로 규정된다.

 

유신 헌법 등 독재 체제를 세우고 유지하는 국민 투표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은 줄곧 압도적으로 긍정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1960-80년대의 우리 사회가 시민적 민주 사회였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정치 제도와 권력적 통제가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의식도 없이 그저 전제적 통치자가 바라는 대로 따라다닌 무정치형(無政治形, apathitical) 인간 사회였다고 하겠다.   

 

시간이 흐르면서 높아진 우리 국민들의 정치의식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높아졌고, 박정희 정권의 실정과 폭압은 더욱 심각해졌다. 유신 체제가 한계점에 도달한 때는 1979년이었다.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하고 연금하는 등 정부의 강압책은 끝이 없었지만, 야당·재야 세력·학생·시민사회의 저항은 오히려 고조됐다.

 

노동자들의 반발도 계속 이어졌다. 급기야 8월 11일에는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노조를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맞아죽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날 경찰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국회의원들, 기자들도 무차별로 폭행하였다. 

 

김영삼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여당은 이를 사대주의라고 규탄하면서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를 요구하는 등 부산의 민심이 크게 반정부로 치달았다.

 

▲  부마항쟁 당시 계염령이 선포된 부산대 정문의 모습

ⓒ 부산대기록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실정에 민심 돌아서 

 

이 무렵은 경제적으로도 나라의 전반적 민심이 극히 나빠져 있었다. 중화학공업에 대해 이루어진 과잉·중복 투자로 말미암아 국가 경제가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가 되자 정부는 중소기업, 봉급생활자, 노동자, 농민 들에게 국가 경제 안정화 비용을 떠안겼다. 중소기업 부도율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도시 하층민의 생활고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10월 16일 부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군중은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경찰차를 부수었다.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20일 시위를 진압했다. 하지만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격으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 이 기사를 쓰는 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과 이극찬 저서 <정치학>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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