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진짜 나, 참나, 주인공, 불성은 없다. - 삼법인 강의(8)

장백산-1 2021. 5. 19. 19:40

[불교교리 공부하기] 진짜 나, 참나, 주인공, 불성은 없다. - 삼법인 강의(8)

본질적(本質的)인 나(진짜 나)도 없고, 주인공도 없고, 불성(佛性 : 부처의 성품)도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고정(固定)된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에 공(空)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에서 무아(無我)는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 혹은 ‘본질(本質)의 나’는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본질(本質)의 나, 즉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 참나, 진짜 나, 진아(眞我), 대아(大我), 주인공 등도 무아(無我)인가 하는 점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보통 흔히 말하길 중생의 성품을 버리고 부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거나, 거짓나를 여의고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거나, 불성을 깨닫고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지금까지 배워 온 내용과는 어긋나는 교리가 아닌가.

여기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이 반드시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근본법(根本法)과 방편법(方便法)이 등장한다. 즉 본질적(本質的)인 가르침인 근본법(根本法)의 가르침의 이해와 방편적(方便的)인 가르침인 방편법(方便法)의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근본법(根本法)과 방편법(方便法)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 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편법(方便法)은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본질적인 근본법(根本法)에 귀일(歸一)하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方便)들로 이해해야 한다. 훗날 중국불교의 교판설에 입각해 본다면, 처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3 . 7일 동안 깨달음의 본질적인 세계를 그대로 직설하셨는데 그 말씀이 너무 심오하고 어려워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뒤에 다시 쉬운 방편(方便)을 써서 설법을 하셨다는 대목이 나온다. 방편설법(方便說法)은 중생에 대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심에서 나온 방편(方便)의 가르침이다.

조금 쉽게 비유를 든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근본법(根本法)인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를 설하셨지만, 유(有)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무(無)를 설하고, 무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유를 설함으로써 근본법(根本法)인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방편(方便)을 쓰셨던 것이다. 진리(眞理)라는 산 정상에 오르는 근본법(根本法)을 부처님은 언제나 설하시지만, 진리(眞理)라는 산 정상에 올라갈 때 남쪽에 사는 사람에게는 북쪽으로 올라가라고 해야 하고, 북쪽에 사는 이에게는 남쪽으로 올라가라고 말해야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근본법(根本法)으로 가기 위한 수많은 설법에서 중생들의 근기와 여건에 맞춰 수많은 방편(方便)을 써서 법을 설하셨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은 변할 수 없는 근본법의 진리이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중생들은 무언가 의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무언가 본질적인 존재, 궁극적인 존재에 의지함으로써 좀 더 쉽게 진리의 산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랬을 때 부처님께서 ‘아니다 쉬운 길은 없다. 어려우면 포기해라. 나의 말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 나를 따르면 된다’고 했다면, 소수의 몇몇 수행자만이 깨달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많은 중생들은 진리의 산에 오를 수 있는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이 때 후대의 대승경전에서는 자비로운 방편(方便)으로 ‘그래 부처님께 의지해라.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 네게도 불성(佛性)이 있으니 네 안에 있는 불성(佛性)에 의지해라.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중생들에게 좀 더 쉽게 믿고 의지하며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방편법(方便法)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불성(佛性) 진아(眞我)라는 명칭은 어떻게 생겨난 말일까. 방편(方便)을 쓸지라도 그에 합당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일체 모든 것은 무아라고, 즉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다. 예를 들어 50%는 무아(無我)이고 50%는 진아(眞我)라거나, 99%는 무아(無我)이고 1%가 진아(眞我)라고 한다면 무아(無我)와 진아(眞我)의 구분은 엄밀해진다. 그런데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의 제법(諸法)은 100%를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중에 하나도 남김없이 100% 모든 것이 전부 다 무아(無我 : 고정된 실체가 없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온 우주삼라만상만물 100%가 전부 다 순전히 무아(無我)라면 거기에 억지로 무아(無我)라는 명칭을 붙일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 100% 완전히 ‘무아(無我)’인 것은 100% 완전 ‘아(我)’이기도 한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주삼라만상만물 100%가 전부 다 순전히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그 사실을 진리(眞理)라고 칭하고, 진리(眞理)가 머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칭하며, 진리(眞理)가 머무는 곳인 법계(法界) 전체는 그야말로 진리(眞理)의 세계(世界)이므로,  법계(法界) 전체, 즉 진리(眞理)의 세계(世界)를 방편(方便)으로 이름하여 진여(眞如), 진아(眞我),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대아(大我),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 불성(佛性), 본성(本性)이라고 칭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진리(眞理)의 세계(世界)라는 의미에서 진여(眞如), 진아(眞我),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대아(大我),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 불성(佛性), 본성(本性) 등의 많은 방편(方便)의 명칭들이 나왔지만, 방편(方便)의 명칭들은 오해의 소지를 안게 된다. 방편(方便)의 명칭들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방편(方便)이 아닌 또 다른 실체적(實體的)인 진여(眞如), 진아(眞我), 자성(自性), 청정심(淸淨心), 대아(大我), 주인공(主人公), 본래면목, 불성(佛性), 본성(本性)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많은 방편(方便)의 명칭들은 방편(方便)을 벗어나 외도(外道)의 길로 빠지게 된다. 그러니 불성(佛性)이라는 방편(方便)의 용어 또한 내 안에 어떤 고정된 실체의 불성(佛性)이 있어서 그 불성(佛性)을 발현시키거나, 일깨우거나, 숨어있던 것을 튀어나오게 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연기(緣起),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이치(理致)를 깨우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불교 가르침의 근본(根本)은 무아(無我)이다. 즉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고정된 실체는 없다. 부처, 열반, 불성, 여래장, 진여 등 그 어떤 명칭이나 어떤 것도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부처, 열반, 불성, 여래장, 진여라는 명칭은 말을 초월(超越)하는 개념(槪念)이다. 그렇기에 부처, 열반, 불성, 여래장, 진여라는 명칭에 본질적인 실체라거나, 고정된 실체라는 수식을 붙이는 순간 부처, 열반, 불성, 여래장, 진여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방편(方便)으로 불성, 진여, 본성, 주인공이나 일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런 방편(方便)의 명칭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방편(方便)의 명칭을 고정된 실체로 보거나, 어떤 실질적인 실체로 보는 순간 진리(眞理)를 외면하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불교의 어려움이 있다. 어떤 경전에서는 방편법(方便法)을 말하고 어떤 경전에서는 근본법(根本法)을 말하고, 어떤 스님께서는 주로 방편법(方便法)을 말하고 어떤 스님은 주로 근본법(根本法)을 말하다 보니 이해하기가 쉽지않고 헷갈린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것은 모든 가르침은 근본법(根本法)에 대해 중심을 두고 방편법(方便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방편법(方便法)을 일상에서 실천할 때도 그 중심에는 근본법(根本法)이 우뚝 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불성, 여래장, 본래면목 같은 방편(方便)의 명칭들에 대해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뜻한다. 유무중도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성, 여래장, 본래면목, 참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있다’고 해도 치우치고, ‘없다’고 해도 치우친다.

예를 들어, 생사(生死)의 윤회(輪廻)는 있나 없나, 윤회가 있다면 지금의 ‘나’와 다음 생의 ‘나’는 같은 존재일까 다른 존재일까? 그것은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없고, 다른 존재라고 할 수도 없다. ‘업(業)에 따르는 과보(果報)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나 과보를 받는 자는 없다’는 가르침에서처럼,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결과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나 과보를 받는 자는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업을 짓는자, 과보를 받는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에서의 인연(因緣) 따라 가합(假合)으로 잠시 잠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지금 타는 촛불과 10분 후에 타는 촛불이 다르지만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같지만 같다고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같지만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지만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도 끊임 없이 변화하면서 흐르는 과정(過程)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생의 나와 다음 생의 나, 업을 지은 자로서의 나와 업을 받는 자로서의 나도 마찬가지다. 끊임 없이 변화하면서 흐르는 과정(過程)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같지만 같다고 할 수 없고 다르지만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이러한 관찰이 바로 중도적(中道的) 관찰(觀察)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불교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 불성(佛性)을 설한다고 해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싸잡아서 비난할 수는 없다. 언어적 제한 속에서 설명해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佛)가 되었다는 그 자체를 불성(佛性)이라는 바탕의 의미로 새길 수도 있다. 불성(佛性)을 어떤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 여긴다면 잘못된 것이나, 불성(佛性)을 하나의 부처가 될 가능성(可能性)으로 이해하면, 불성(佛性)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람들의 어리석은 무명(無明)을 타파해서 깨달으신 그 사실은, 언어로써 이해해 본다면, 어리석은 아상(我相)으로서의 ‘나’를 타파한 것이며, 그것을 ‘참나’를 되찾은 것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참나, 본래면목을 설하는데 무아(無我)를 내세워 노이로제가 걸린 것처럼 비판만 할 이유는 없다.

결론적으로 불성, 여래장, 참나라는 것을 고정된 실체적 존재 관념으로 이해하면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아(無我 : 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이기 때문에 불성, 여래장, 참나라는 것은 없다라고 결정론적으로 말한다면 그 또한 중도(中道)에서 어긋난 것이다. 어디까지나 방편상(方便上)의 명칭인 불성, 여래장, 참나, 본래면목, 주인공이라는 이름도 중도(中道)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법상스님, <붓다 수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