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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고찰

장백산-1 2021. 10. 13. 15:46

죽음에 대한 고찰   - - 법상스님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죽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의 대답은 '지금 여기에서 죽을 수 없다'는 대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생각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왜 지금 여기에서 죽을 수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놓아라 놓아라 하고 그래서 이만하면 다 놓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도 그럼 생사(生死)까지 한 번 놓아보라고 
하면 머뭇거리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살아있음'이라는 이 몸뚱에 대한 마지막 집착심(執着心), 즉 아집(我執)을 놓아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놓고 또 놓으며 수행을 하는 이유가 이 몸뚱이 편히하려는 데에 있기 때문에
행복하고자 하는, 혹은 자유롭고자 하는 이 모든 욕망이 결국 '나'를 향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도대체 '나'까지 놓으라고 하니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나'까지 놓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지만
정작 참된 자유와 행복은 그렇게 마지막 '나'를 놓았을 때 밝게 드러납니다.'나'에 대한 일체의 집착과 걸림을 
놓아버리면 '나'는 일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됩니다.

이렇게 '나'라는 아집(我執)과 아상(我相)을 놓아버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법집(法執)과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함께 놓아지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모두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空)하고 허망(虛妄)한 것인 줄 알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忘) 나를 비롯한 일체의 모든 상(相)을 놓아버리게 되면(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 업식으로 물들어있는 인연가합(因緣假合)의 존재인 '거짓 나(假我)'가 비워지고 밝은 '참나', 즉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드러납니다.(즉견여래/卽見如來)

'거짓 나(假我)'를 비우고 놓아버리고 죽이는 '죽음에 대한 고찰' '죽음명상'은 현실세계에서 아웅다웅하며 
죽을둥 살둥 살아오던 속좁은 거짓 나를 돌이켜 밝고 넓은 참나로 비춰줄 것입니다.

먼저 종이 한 장과 볼펜을 준비하고 조용히 앉습니다. 잠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죽는다면'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하나 하나 적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죽지 못하게 가로막는 이유가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 부모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그동안 살며 꼭 붙잡고 왔던 일에 대한 열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10가지 정도로 정해 놓고는
그것들 중에 먼저 집착심을 끊어내기 쉬운 것부터 하나 하나 끊어내는 명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기에 앞서 우선 이 몸뚱이가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몸뚱이가 살아있게 되면 몸뚱이에 의존해 버티고 있는 온갖 집착이며 번뇌들이 날뛰며 죽음에 대한 명상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몸뚱이 먼저 죽이고 나야 마음, 생각, 집착들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인도에서 장례식을 하듯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장례를 치르고는 스스로의 몸이 썩어지고, 문드러지고, 
냄새나는 모습들, 그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을 관(觀)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4대 요소인
화(火)의 기운이 없어져 싸늘해지고 곰팡이가 피고 썩어드는 몸의 모습,
풍(風)의 기운이 없어져 굳어지고 썩은 고목처럼 내던져진 몸 모습,
수(水)의 기운이 없어져 마르고 쪼그라드는 몸 모습,
지(地)의 기운이 없어져 서서히 없어져 가는 몸의 모습들을 관해 봅니다.

그렇게 제 몸뚱이 죽은 모습을 명상하고 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버리기 쉬운 것부터 버려나가는 것입니다.
'까짓 턱 놓을 수 있겠다' 하는 마음으로 집착심을 하나 하나 끊어보는 것입니다.

한 생각 턱 놓고 나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집착심을 끊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동안 살아오며 평생을 
붙잡고 있던 그 무거운 집착심일지라도 한 생각 '그래 까짓거 놓아보자'하고 나면 놓지 못할 일도 아니구나 
느끼실 것입니다.

이를테면 애착하던 자식도 제 인연따라 제 생명으로 살아갈 뿐이지 '나 없으면 못살아' 하는 마음은 부모의 
집착심이며 무명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내가 키운다'는 아집이 자식을 망쳐놓고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까짓 턱 놓는다고 생각하면 '그래 제 인연따라 잘 살겠지' 하고 자식에 대한 집착심을 놓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던 애인도 지금이야 헤어지면 어떻게 될 줄 알지만 오히려 놓고나면 자유로워집니다. 나는 괜찮은데 
'상대가 너무 괴로워 할까봐' 놓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지만, 그 생각 또한 어리석은 분별심이며 돌이켜보면 
'자기 괴로움'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나는 안 괴로운데.'하지만 실은 자기 괴로움 때문에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바로 아집(我執)입니다.

아집(我執)이 아닌 상대를 향한 자비심 때문이라면 이 세상에 힘겨워하는 모든 헤어진 이성들이 다 내 괴로움이 
되어야 하지만 그런 동체대비의 마음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까짓 턱 놓고 나면, 애착을 온전히 놓고 나면 
오직 고요해질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돈, 명예, 권력, 지위, 사회적 영향력, 학벌, 직업,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일들에 대한 집착 
등등을 놓고 나면 난 무엇으로 어떻게 사나 하지만 한 번도 놓아보지 못하고 너무도 꽉 잡고 살았기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지, '그래 까짓 그렇게 생각하니 놓지 못할 것도 없지' 하고 한 생각 돌이키는 일은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차피 칼로 진짜 죽어 보자는 얘기가 아니라 한 생각으로 나를 얽어매던 집착심을 끊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 한번 해 봐?' 하고 거짓 나와의 치열한 싸움을 벌여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참구의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갖 '나'와 '대상'에 대한 집착심을 끊고, 온전히 나를 비우고 죽이는 방하착(放下着)을 실천해 보고 나면,
한결 마음은 텅 비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과 온갖 대상에 대한 집착들을 맑고 고요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크게 한 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내가 죽어야 진정한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텅 비어 일체를 턱 
놓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온 세상이 다 내가 됩니다. 사사로운 내가 죽고 나면 밝은 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지 않으면 안된다. 빛은 한번 어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주의 가르침이다."

또 [잡아함수사념경]에서는 "만일 비구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닦아 익히면 반드시 복과 이익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