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홋날이 아닌 당장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부처가 되라
온전한 알아차림 - 언젠가 부처가 되려 하지 말고, 당장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라
드물게 이따금씩 찾아오는 법우님들 중에는 당장에 괴로운 일들 때문에 수행이나 깨달음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러 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 지나치기까지 하신 분들 또한 더러 있다.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야 당연한 서원(誓願)이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안 될 일. 중도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빨리 깨닫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면 도리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한 깨달음의 향기를 놓치고 만다.
깨달음을 미래의 언젠가의 일로 설정해 두어서는 안된다. ‘빨리 깨쳐야겠다’거나 ‘언젠가 깨닫겠지’ ‘왜 이렇게 깨달음이 늦어지지’ 하는 조급한 마음은 전부가 다 분별이고 망상이다.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오직 당장 지금 이 순간의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해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고 의식이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란 말이 있다. 깨달은 사람이 되면 내가 깨달았다는 아상(我相)이 사라지고 오직 매 순간순간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시간의 개념 자체가 그냥 텅 비어 있으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개념 또한 텅~비어 있다. 오직 매 순간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점은 언젠가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깨닫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있는 행위를 얼마나 하고 있는가를 늘 살피는 주시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누가 하는가. 다 이룬 부처의 행위만 깨어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깨어있는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 문제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문제이다. 부처님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의 연속이지만, 어리석은 우리들의 행위는 깨어있는 행위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언젠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행위가 깨어있는 행위가 되기 위해 애쓰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시간은 환상이다. 과거로부터 직선상으로 시간이 흘러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그 시간이 미래로 흘러간다는 생각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시간이 공(空)하다면 깨달음을 어느 세월에 찾을 것인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이며, 불성의 작용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10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법신부처가 사는 것이 된다. 그러니 부처가 되기 위해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부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부처가 될 것인가.
법상 스님 <법보신문/2003-10-22/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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