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세계 기원 묻는 질문에 붓다가 침묵한 진짜 이유

장백산-1 2022. 4. 28. 13:30

세계 기원 묻는 질문에 붓다가 침묵한 진짜 이유

세계 안에서 세계 경계 대해 논하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불교 세계관은 무시무종…서로가 원인 결과되는 열린 체계
중중무진의 인연생기가 생명 실상이고 그 장이 바로 우주

 

 

‘최초’에 대한 관심은 신화나 종교에서만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를 형성하는 인과관계의 매트릭스 바깥에 있는, 최초의 시작이 되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를 상정하여 이를 제1원인 혹은 ‘부동(不動)의 동자(動者)’[unmoved mover]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이 개념은 이후 서양 중세 철학에서 기독교의 초자연적 유일신관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차용되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초자연적 신적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 ‘최초’를 상상하면서 창조주 혹은 ‘제1원인’을 상정하는 것은 본질주의(本質主義, essentialism)적 사유의 산물이다. 본질주의는 그리스 철학 이래 서구 형이상학과 신학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이념으로, 실체적 본질의 탐구를 통해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유형태다. 동아시아 유교에서 세계의 근본 질서로서 상정하고 있는 이(理) 혹은 이치 또한 본질주의적 사유의 산물이며, 붓다 당시 바라문교에서 세계창조와 만물의 근원으로 여기고 있던 브라흐마(梵, Brahma) 또한 본질주의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세계의 기원에 관한 불교적 입장이라 할 무시무종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날 초등학생이라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세계의 ‘시작과 끝’ ‘유한과 무한’과 같은 질문들은 붓다 당시에도 바라문들과 사문들 간에 널리 공유하고 있던 의문이고 자신들이 속한 교단의 전승에 따라 이러저러한 답들도 있었던 것 같다. 초기불전의 62견(見)이나 14무기(無記)에 등장하는 질문들이 그 증거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붓다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침묵’이 그의 유일한 대답이었다. 이러한 붓다의 입장에 대한 불교계의 설명은 대체로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논의의 ‘무익함’ 때문이라고 한다. 요컨대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먼저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단 살리고 나서는 그 화살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왜 쏘았는지 등등의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지적 호기심이 늘 ‘실용적’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무익함’만으로 붓다의 침묵을 설명하는 것은 붓다가 그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라든가 아니면 ‘몰라서’ 답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 붓다의 침묵(沈默)과 무시무종(無始無終)은 어떠한 관계인가? 무시무종은 말 그대로 ‘시작도 끝도 없음’을 뜻한다. ‘시작이 없다’(無始)는 말은 단지 ‘창조’를 부정하는 말인가, 아니면 ‘모른다’는 말인가, 혹은 알 필요 없는 ‘무익한 지식’이란 말인가? ‘끝이 없다’(無終)는 말은 마찬가지로 ‘영원’을 뜻하는가, 아니면 잘 모르거나 혹은 쓸데없는 무용한 지식일 뿐이라는 건가?

우리는 붓다의 침묵을 잘못 이해해왔다. 붓다의 침묵은 철저하게 이성에 바탕한 합리적 사유의 결과다. 세계 ‘안’에서 세계의 ‘경계’를 논하는 것, 시간 ‘안’에서 시간의 ‘바깥’을 논하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인식이며 논증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내-존재가 세계의 ‘시작과 끝’ ‘안과 밖’을 논하는 것은 관념적 구상일 뿐이다. 이는 마치 “나에게 설 땅과 충분히 긴 지렛대를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한 아르키메데스의 말이나, ‘토끼의 뿔’처럼 관념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구적 희론에 지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했던 제1원인론에 대해 합리적 논증이 불가능하다는 반론이 서양 지성사에서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버트런드 러셀(1872~1970)에 의해 처음 제기되고 이후 데이비드 흄(1711~1776),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붓다의 침묵이 가지는 세계철학사적 의미는 더욱 놀랍다. 세계-내-존재로서 최초의 기원에 관한 인식은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며 논증 불가능한 것임을 붓다는 이미 오래전 그의 침묵을 통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독화살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독화살을 뽑고 치유된 사람은 왜 화살의 출처를 묻지 않을까? 자신을 쏜 화살이 어디서, 왜, 누가 쏘았는지 궁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치유된 그에게 ‘어디서, 왜, 누가’ 등과 같은 세계의 ‘시작과 끝’, ‘유한과 무한’에 대한 의문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독화살의 비유가 세계의 무한과 유한 등과 같은 본질주의적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질문은 질문하는 자의 세계인식의 반영이다. 본질주의적 세계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그의 질문들은 병통을 치유한 지금 더 이상 질문거리가 되지 않는다. 독화살은 ‘어디에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 만든 것이었다. 이른바 중도실상을 깨달은 것이다(중도실상에 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붓다의 침묵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무시무종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흔히 무시무종을 ‘영원’과 같은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무시무종, 즉 ‘시작도 끝도 없다’라고 하는 것은 인과관계에 관한 언명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본질주의적 사고와 실체론적인 선형적(線形的) 인과관계는 동전의 양면이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이러한 사고의 전형적 사례다. 요컨대 어떤 존재 a가 있으면 a를 있게 한 원인이 있을 것이며 원인의 원인을 계속 소급해 거슬러 가보면 최초의 어떤 존재, 이를테면 A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시무종은 그와 같은 실체론적인 선형적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붓다가 보기에 우주 전체는 생명의 그물망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a는 b의 원인이고 b는 c의 원인이고 다시 c는 a의 원인이다. 요컨대 a는 다른 모든 존재의 원인이자 또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가 바라보는 우주의 모습이자 생명의 실상 아닌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는, 중중무진의 인연생기가 생명의 실상이고 그 장(場)이 바로 우주다.

더구나 붓다는 인간존재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인간종’(人間種)이라는 닫힌 체계 안에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근원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열려있는 체계’로서 생명의 그물망을 상상하였다. 따라서 무시무종 ‘시작도 끝도 없다’는 붓다의 언명은, ‘최초의’ ‘단 하나의’ 원인을 상정하지 않는, 생명의 그물망, 생명의 실상에 관한 표현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30호 / 2022년 4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