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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 식(識)의 전변과 십팔계

장백산-1 2023. 9. 1. 16:17

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 식(識)의 전변과 십팔계


초기불교에서는 내가 세상을 접촉함으로써 인식이 생기는 과정을 십팔계로 설명한다. 눈귀코혀몸뜻 6근이 색성향미촉법 6경을 만날 때 6가지 인식인 6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눈으로 모양을 볼 때 보아서 아는 마음인 안식(眼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6근도 6경도 모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6근 6경으로 인해 연기(緣起)되어져 생겨나는 6식 또한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

즉 우리 생각에는 여기에 내가 있고 저 바깥에 실체적이고 독립적인 세상이 있어서 내가 바깥의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나도 공하고 세상도 공하고, 인식한다는 것 또한 연기적인 허망한 현상인 공일 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바깥에 있는 세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안에 세상을 보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보이는 세상이 별도로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볼 때 우리의 뇌는 과거의 선험적인 기억들을 재빨리 검색한 뒤에 그 세상과 비슷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그것과 비교 대조해서 눈앞의 대상을 과거의 그 기억으로 대충 묶어서 규정짓는 것이다.

즉 바깥의 대상 자체를 온전하게 봐서 대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과거 기억의 조각들과 업의 그림자라는 그물망에 걸러서 머릿속으로 대충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내 마음 안에서 바깥 대상을 인연으로 또 다른 기억의 찌꺼기를 꺼내어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는 눈귀코혀몸뜻(6근)으로 색성향미촉법(6경)을 끊임없이 접촉하고는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6경, 즉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부한 과거 기억들을 재조합해서 재상영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가리켜 식(識)에서는 말 그대로 ‘오직 식 뿐(唯識)’이라고 한다. 오직 식(識)일 뿐이지 별도로 나라는 실체와 세계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식이 전변하여 허망하게 조작되어진 것으로 식이 주관과 객관으로 전변할 뿐인 것이다. 이렇게 식이 전변한 것 중에 인식 주관 즉 보는 부분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보여지는 인식의 대상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내가 저 바깥의 꽃 한 송이를 볼 때, 꽃을 보는 나는 견분이고 보여지는 꽃 한송이는 상분이다. 이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 속의 인식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기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이지, 별도로 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꽃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식은 견분과 상분,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이를 ‘관계를 맺는다’ 혹은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연’이라고 한다. 주관의 보는 부분인 견분은 ‘능히 연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연이 되고, 보이는 대상은 연해지는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소연’이 된다.

또한 인식에서  이 ‘식(識)’은 분별한다, 헤아린다라는 의미로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계를 분별해서 헤아려 알기 때문에 ‘량(量)’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즉 인식 주관을 능량, 인식 대상을 소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유식에서 말하는 식전변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평소 안에 있는 ‘나’와 밖에 있는 ‘대상’을 독립적이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유식에서는 그 안팎의 주관과 객관 모두가 식이 전변한 것으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식하는 주관인 견분도 능연식으로 식이 전변한 것이고, 인식 대상인 식의 대상 즉 소연경 또한 식이 전변한 것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언뜻 보기에는 ‘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초기불교의 무아와 대승과 중관의 공사상을 잇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나도 없고 외부에 내가 마주하는 대상도 없는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좋고 싫은 대상이 있다고 여기는 데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모든 대상과 사람들은 사실 그만의 독자성을 지닌 누군가이거나 무언가가 아니라, 사실은 내 안에서 그렇게 인식된 연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곳에도 집착할 곳이라고는 없다. 허망한 분별심이 헤아려 능량과 소량이라고 분별할 뿐, 분별할 것은 단 하나도 있지 않은 것이다.

글쓴이: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