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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수행, 정견(正見)의 수행

장백산-1 2024. 6. 9. 18:54

초기불교의 수행, 정견(正見)의 수행

 

팔정도의 첫번째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로서, 팔정도 가운데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잡아함경』 28권에서는 ‘정견이 있으므로 정지(正志) 내지 정정(正定)을 일으킨다’고 함으로써 정견이야말로 나머지 일곱 가지 실천의 구체적 내용을 규정하고 있으며 팔정도 성립의 근본이 됨을 설명하고 있다. 주로 경전에서는 정견을 ‘사성제에 대한 바른 지혜’, 혹은 ‘연기에 대한 바른 지혜’라고 설명하며, 이는 곧 무명의 반대가 되는 명(明)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바른’ 견해라는 것은 곧 연기와 사성제, 무아와 중도, 자비, 무분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견해를 의미한다. 정견은 세상을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기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이며, 고정된 실체관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비실체적인 무아로써 보는 견해이고,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견해가 아닌 중도적인 견해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일체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그러한 동체적인 자각 속에서 동체대비의 자비심으로 세상 모든 것을 보는 견해가 나온다.

 

이러한 연기, 무아, 중도가 바탕이 된 정견은 어떤 특정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견해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중도에 어긋난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 72경에서는 “고타마 붓다는 어떤 견해를 취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여래는 그 어떤 견해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견해를 없애버렸다”고 답하고 있다. 나아가 “여래는 모든 견해, 모든 짐작, 모든 ‘나’라는 견해, ‘나의 것’이라는 견해를 깨버렸고, 떠났으며, 멸해 버렸고, 없앴기에 그 어떤 사견도 생겨나지 않아 해탈을 얻었다”고 설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일도, 절대적으로 그른 일도 없으며, 의미 있는 일도 의미 없는 일도 없다. 그저 한바탕이라는 텅 빈 진실 위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중도적인 행위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뿐이다. 실체 없는 큰 하나의 바다 위에 비실체적인 파도만이 꿈처럼 오고 갈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의 정견 즉 ‘바른 견해’는 어떤 특정한 견해만을, 특정한 종교만을, 특정한 사상과 진리만을 ‘바르다’고 규정짓는 치우친 견해가 아니라 중도적인 견해다. 고정된 실체적인 진리와 견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무아), 같은 견해가 인연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진리가 안되기기도 하는 연기적인 견해이고, 그렇기에 그 어떤 특정한 견해만을 절대적으로 추종하거나, 혹은 특정한 견해를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이처럼 정견이라는 정해진 바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판단 분별로 바르다고 규정된 어떤 견해가 있다면 그것은 정견이 아니다. 아무리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를 설했을지라도 그것은 정견이 아니라,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이다. 참된 정견은 뭐라고 이름지을 수도 없고, 머릿속에서 개념지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각, 감정, 욕망, 의식 같은 것들로 투영되지 않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바라봄일 뿐이다.

 

이것을 선에서는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곧장 바라보라는 뜻에서, 즉심, 차심, 직심이라 하여 곧장 이 마음이라고 설한다. 분별이 개입됨 없이 곧장 직심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바로 진리를 보는 것이란 뜻이다. 즉 정견으로 볼 때 곧 진리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망상으로 걸러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불법, 마음, 본래면목을 곧장 바라보는 것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한다. 정견으로 보는 것이 곧 견성이다. 정견으로 볼 때 우리 앞의 현실은 괴로운 예토가 아니라, 하나도 숨겨져 있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불세계요, 입처개진의 진실된 세계인 것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