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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8정도 수행 중, 정사(正思)의 수행

장백산-1 2024. 6. 10. 14:43

초기불교의 8정도 수행 중, 정사(正思)의 수행


팔정도의 2번째 정사(정思)는 정사유(正思惟) 혹은 정지(正志)라고도 부르며, ‘바른 생각’ ‘바른 뜻’ 혹은 ‘바른 마음가짐’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에서도 ‘바른’이라는 것은 연기, 중도, 무아,  자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해 생각할 때 실체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생각을 의미한다. 또한 사유하되 그 사유에 사로잡히지 않는 함이 없는 생각이다. 즉 생각하되 생각한 바가 없고, 생각이 필요할 때 생각을 사용하지만 그 생각에 구속됨이 없는 생각을 말한다.

마음속에서 좋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를 때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이기적이다’라고 여김으로써 그 올라오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좋은 생각이 일어날 때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나쁜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생각 하나를 가지고 양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고,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와 무아, 중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바르지 못한 사유일 뿐이다.

연기와 무아, 중도적인 사유라면 그 생각 또한 무아임을 알아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실체화하지 않는다. 오온과 십팔계에서처럼 생각도 느낌도, 의지도 모두 인연 따라(연기) 생겨난 것일 뿐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으며(무아),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치우쳐(중도) 집착(무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정사유란 어떤 생각이나 사유가 일어날 때에도 그것이 비실체적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고,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그렇기에 누구도 과도하게 미워하지도 않고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처럼, 사유하되 사유한 바가 없는 것이야말로 참된 정사유다. 생각의 주인이 되어, 생각을 써먹기는 할 지언정, 생각은 꿈과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아 스스로 만든 생각에 휘둘리고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정사유는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방식의 생각을 바른 생각이라고 여겨 그런 생각을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정사유가 아니다. 수행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 얻는 것이 아니다. 애쓰고 노력해 얻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취하고 버리려는 생각이기에 중도적이지 않은 것이다. 불법은 취하고 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중도의 공부다. 참된 중도에 바탕한 정사유는 바른 사유를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여 정사유를 선택하고 악사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 자체가 분별망상이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보통 수행하는 이들은 고요한 삼매를 얻으려고 생각을 억눌러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을 수행으로 알지만 수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필요한 생각은 다 꺼내어 사용하되, 그 생각에 전혀 걸림이 없는 것이다. 생각하되 생각한 것이 없는 것, 그것이 참된 정사유인 것이다.

그래서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것이 정사인가. 탐욕을 뛰어넘은 생각, 성냄을 없앤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정사유를 실천하게 되었을 때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싫어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에 대해서도 성내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애착함으로써 탐욕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정사유는 일체 모든 대상을 무한히 자비롭게 바라볼 뿐 타인을 해치려는 생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어떤 생각도 실체가 없는 것인줄 안다면 그 생각을 대상으로 집착하거나, 성내거나, 해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