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8정도 중 정어(正語)의 수행
정어는 ‘바른 말’ ‘올바른 언어생활’로 해석될 수 있다. 생각이 현실을 만들어내는 업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말 또한 힘을 가진 행위다. 의업 즉 생각이 강력한 힘을 가진 업력이라면, 그 의업의 강력한 힘을 현실로 구현하는 첫 번째 기관이 바로 입이고 말이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떠도는 생각일 때는 아직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는 순간 그 말은 하나의 강력한 힘을 지닌 업력이 되어 업보를 불러오게 된다. 실제로 인간의 뇌는 소리 내어 말을 하면, 자신이 한 말도 외부에서 입력하는 지시적 정보로 받아들여서 그 방향으로 작업을 한다고 한다. 『식물의 정신세계』에서는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린다고 한다.
물론 그렇더라도 여기서 말한 말의 힘과 창조력, 구업의 업력은 마치 꿈 속에서 꿈을 창조하는 것처럼 허망한 창조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신구의(행동, 말, 생각) 삼업으로 삶을 창조하지만, 창조된 삶 자체가 비실체적인 공(空)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어에서 바르다는 의미도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 무분별을 의미한다. ‘바른’ 말을 해야하겠지만, 그 바르다는 것이 정해진 실체적인 정해진 바른 것은 없다. 인연따라 바르다거나 바르지 않은 말이 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인연따라 너와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한다거나, 거짓말이나 이간질하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에게 하는 말이 곧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연기적 자각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비로운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무아와 중도라는 자각이 바탕이 된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은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을 내포하는 언어나 치우친 언어를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옳다거나 그르다는 양 극단의 판단이 내포된 말 대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무분별의 말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남이 나를 향해 격앙된 말투로 큰 소리를 쳤을지라도, ‘그 녀석이 나에게 화를 냈다’거나, ‘나를 미워한다’거나 하고 판단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그가 나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고만 말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서 현실을 걸러서 해석한 언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표현들이 사용될 것이다.
근원에서 볼 때, 중도와 무분별에 입각한 정어란, 모든 필요한 말을 다 하면서도 전혀 그 말에 사로잡히지 않는 언어습관이다. 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며, 방편임을 알기에 그 말의 뜻을 따라다니며 구속되지 않는다. 그럴 때 모든 말은 의미와 분별을 지닌 하나의 뜻이 담긴 말이 아닌 그저 잠시 인연따라 필요해서 사용할 뿐, 그 말의 뜻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바로 그 때 모든 말은 진언이 되고, 화두가 된다. 사실 참된 정어를 구현한 수행법이 바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화두는 그 말의 뜻을 따라가 이해해서는 안 된다. 뜰 앞의 잣나무나 마른 똥막대기, 이뭣고라는 말은 그 말의 의미 속에 무슨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은 하나의 방편일 뿐, 낙처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화두는 바로 그 말 뜻을 알려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직지인심이라고 하듯, 진리, 법, 마음을 곧장 가리키기 위해 방편으로 만든 언어 이전의 소식이다.
이처럼 바른 말은 그 말 뜻이 무슨 실체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 말 뜻을 따라 이리 저리 휘둘리는 말이 아닌, 다만 인연따라 필요에 의해 사용할 뿐, 그 말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리지 않는 말이다. 그렇기에 수도 없이 많은 말을 하더라도 한 마디도 말한 바가 없는 것이야말로 참된 말이며, 정어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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