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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8정도의 수행 중 정업(正業)의 수행

장백산-1 2024. 6. 12. 14:53

초기불교 8정도의 수행 중 정업(正業)의 수행


팔정도의 4번째 정업은 바른 행위다. 앞서 설명했듯이, 팔정도를 이 삼업에 대비해 본다면 정사는 의업, 정어는 구업, 정업은 신업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정견이라는 무명이 사라진 바른 견해가 먼저 있고 나면 정사라는 의업이 바로 설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입으로 짓는 구업과 연이어 몸으로 짓는 정업이 바로 설 수 있는 것과 같은 순서의 이치라 볼 수 있다.

정(正)을 연기, 중도, 무아, 자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정업은 ‘연기’적인 견해와 사유가 바탕이 된 바른 행위를 의미하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행위를 의미하고, 실체론적인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아’의 행위이며, 결과적으로 살생과 도둑질, 사음 등의 몸으로 짓는 악업을 여읜 ‘자비’로운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너무 게을러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거나, 혹은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양 극단을 떠나 조화로운 중도로써 적절히 일하고, 운동하고, 움직이며 행위하는 것이 곧 정업이다. 또한 이 몸이 지수화풍이 인연 따라 모여 인연 가합된 무아임을 모르고, 이 몸을 ‘나’라고 착각하여 집착하게 되면 외모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이 몸이 병들고 늙게 될 때 내가 붕괴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것이 정업인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떠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가 바탕이 된 바른 행위는 곧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으며, 사음을 떠난 행위인 것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행을 떠난 청정한 행위이다.

이와 같은 바른 행위야말로 우리 불자들이 실천해야 하는 생활 속의 ‘몸의 수행’인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만물이든 살생하지 않는 불살생의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이며,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자비롭게 나누어 주는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이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청정한 행위가 바로 정업의 수행인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 동식물 등에 대한 파괴와 살생 등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정업이라는 수행에 어긋나는 행위가 된다. 인간의 동물 살생을 보면, 가축들은 인간의 단순한 식욕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생명의 정신에 반하는 무자비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성장촉진제, 성호르몬, 항생제 등을 과다하게 투여 받으며 대량사육과 대량사육을 강요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식 때문에 사육되고 죽어가는 동물로 인한 환경오염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 약 12억마리의 사육면적은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그들은 수억 명을 넉넉히 먹여 살릴만한 양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소의 증가는 열대우림 지역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는 등 열대우림 파괴의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처럼 인간 욕망에 의한 동물사육과 살생은 결국 엄청난 환경오염을 재촉하고 있다. 이 모두가 정업 즉, 바른 행위가 아닌 삿된 행위다. 결국에는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에 무지하여, 인간만이 자연보다 우월하며, 우위에 있다는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인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며, 자연을 약탈하는 이 모든 것이 바로 불투도라는 정업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업인 것이다.

정업, 즉 바른 행위란 결국 연기, 무아, 중도, 자비, 무분별, 무집착, 무주의 행위다.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에 끄달려가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행위의 결과가 없다. 유위행이 아닌 무위행이기 때문이다. 정업 즉, 무위행은 해도 한 바가 없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은 이는 온갖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이 업보를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한 바가 없는 무주, 무위의 행이기 때문이다. 바른 정업이란 이처럼 하되 한 바가 없는 집착 없는 행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