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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간택하지 않고 중도적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결국 깨달을 것이다

장백산-1 2024. 6. 12. 14:41

취사간택하지 않고 중도적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결국 깨달을 것이다


마치 젖은 뗄나무에 붙은 약한 불이 빨리 꺼지듯이, 부처님 가르침이 있더라도 법문 듣기에 게으른 자는 이와 같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피울 때 불이 일어나기도 전에 자주 쉬어 버리면 불씨를 살리지 못하듯, 마음공부에 게으른 자도 마찬가지다' 의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병은 못 고치듯, 법문을 많이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남의 보물을 세더라도 자신은 반 푼도 없는 것처럼, 법문을 많이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다. [화엄경] 보살문명품에서...

 
법문을 듣기에 게으르고, 법을 가까이 함에 게으르면, 약한 불에 쉽게 꺼는 젖은 뗄나무처럼, 불 나기 전에 나무를 비비다 마는 사람처럼 불씨를 얻지 못합니다. 늘 법문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늘 법이 있는 곳에 있으며, 경전과 어록과 부처님 말씀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 있다면, 언젠가 깨달음의 불씨가 환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도 법을 나눌 도반을 만나 법을 이야기 하고, 책을 펴도 법이 담긴 책을 만나고, 모임을 참여해도 법의 모임에 참여한다면, 결국 법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법문만 많이 듣는다고 해서 다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라도 자기 병은 고칠 수 없듯, 법문을 듣고도 자기 무명의 병을 치유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법문을 많이 듣더라도, 남의 보물을 세듯, 이 마음공부는 부처님 같은 분이나 할 수 있지, 내가 어떻게 가능하겠어 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은 반 푼도 얻을 수 없습니다.

법문을 듣고 수행한다 함은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실천은 곧 불이중도입니다. 불이중도는 따로 행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닦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되 행한 바가 없이 행하는 것이 곧 불이중도(不二中道)의 실천입니다.

법문을 듣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려 하는 마음은 분별과 취사간택이어서 중도의 수행이 아닙니다. 법을 취사간택하는 것은 법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법을 자기 식대로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머리로 이해하면서 법문을 듣는 것 또한 정교한 취사간택심이기에 중도가 아닙니다. 취사간택하지 않고 중도적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이 마음공부에 게으르지 않는다면 결국 깨닫고야 말 것입니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