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는 있는데 행위를 한 사람은 없다
행온(行蘊)은 형성하는 에너지로써 ‘업(業)’을 짓게 만드는 의도적 행위다. 사람들은 보통 업을 지으면 지은 그 업은 내 안에 저장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짓고 쌓아 온 업의 무더기들(행온)을 나라고 여긴다.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면 그 악업으로인해 언제까지고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산다. 악업을 짓고 죄를 지은 실체적인 ‘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잡아함경』「제일의공경」의 “업보(業報 : 지은 업에 따른는 보))는 있으나 업을 지은 작자(作者)는 없다”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업에 따르는 보는 있을지언정 ‘업을 짓는 나’라는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는 없다.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르는 보를 받는다. 그러나 실체적 존재로써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는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촛불이 처음 탈 때의 불꽃과 시간이 흐른 뒤에 타는 불꽃은 전자와 후자가 같은 불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다른 불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는 끊임없이 흐르며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의 연결성은 있지만[업보], 독자적이고 실체적인 어떤 실체[작자]로써 있는 것은 아니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는 것이다.
10년 전에 악한 사람이 참회하고 완전히 성격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보자. 1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10년 전의 성격 나쁜 남자가 죄를 지었고, 그 보로 10년 뒤에 보를 받았을 때, 이것이 바로 업보(業報)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성격이 좋아졌어도 과거에 지은 업은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 과거에 악업을 지은 ‘그’와 현재의 선량해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똑같은 사람이라고 규정해왔지만, 10년 전부터 지금까지를 연결해주는 실체적인 ‘자’는 없다는 것이다. 무아(無我)이기에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는 없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착한 사람이야’ 혹은 ‘별로야’라고 답변하곤 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착한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그는 어떤 짓을 해도 영원히 착한 사람이겠지만, 그에게는 착한 사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착한 행위를 했을 때 착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일 뿐이다. 착한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착한행위가 먼저다. 착한행위[업]를 하면 착한사람[보]이 되는 것이지, 착한사람[작자, 실체적 존재]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
보통 우리는 사람들을 착하다거나 나쁜 어떤 사람으로 규정짓고 실체화하기를 좋아한다. 상온으로 사람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나쁜 놈, 도둑놈, 배신자, 착한 사람, 수행자, 보시하는 사람 등으로 규정 짓곤 한다.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계속 배신을 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계속해서 달아주는 것이다.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는 이치에서 본다면, 사실 배신자라는 실체는 없다. 다만 배신[업]이라는 행위를 했을 때 배신자[보]라는 말을 듣고, 배신자 취급을 받는 보를 받을 뿐이다.
그렇기에 누구든 아무리 잘못된 업을 지었더라도, 언제든 참회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과거의 그 사람은 본래 없었기 때문이다. 무아이니까.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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