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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 선어록] 병이 나으면 먹던 약은 버려라

장백산-1 2025. 2. 19. 18:47

병이 나으면 먹던 약은 버려라

 

다만 매 순간에 깨끗한 거울처럼 정신이 깨어 있을 뿐, 있고  없는 것들에 얽매이지 말라.

 

말을 했다 하면 과녁이 생기는 것과 같아 화살을 부르니, 거울처럼 깨어있다는  말도 옳지 않다.

 

만약 매 순간 거울처럼 깨어 있음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면 이 역시 마구니의 말과 같고, 외도의 말과 같다.

 

병이 나으면 먹던 약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부처라는 견해도 망상이니 만들지 말라. 부처는 중생을 위해 처방한 약인데, 병이 없으면 부처라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 거울처럼 깨어있으라는 말은 거울이 대상 사물을 그냥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출 뿐, 좋다거나 나쁘다는 대상으로 나누어 분별하지 않는 것처럼, 일체 있고 없는 모든 것들을 다만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되,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선공부요, 마음공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공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을  ‘거울처럼 깨어있는 것’이라고 규정 해 놓으면, 벌써 그 말에 허물이 생긴다. 말이란 전부 다 방편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된 것은 전부 허물이 있다. 최대한 허물이 없는 말로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말은 깨뜨려야 할, 달을 가리키는 방편인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래서 선어록과 경전 등에서는 끊임없이, 말로써 ‘이 자리’, ‘이 진리’를 표현하고, 끊임없이 가리키고 있지만, 그렇게 이 자리 이 진리 이 마음을 말로 표현해 놓고 또 다시 끊임없이 스스로 세워 놓은 그 말을 다시 타파하여 없애버린다.

 

어떤 때는 본래면목을 깨달으라고 말을 했다가 본래면목이라고 할 만한 한 물건도 없다고 하여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설하고,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라고 말을 했다가 다시 해탈도 없고 열반도 없다고 말한다. 유식(唯識) 불교에서도 승의제(勝義諦)라는 진리를 설하고 나서 다시 승의무자성(勝義無自性)을 설한다.

 

말로 표현되었다 하면 표현된 그 말은 벌써 방편이 되고, 그 방편은 강을 건널 때까지만 효능을 지닌다. 특정한 방편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혹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그 맥락 속에서만 제한된 진리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말을 했다 하면 과녁이 생기는 것과 같아 화살을 부른다. 말로 표현된 모든 것들은 전부 선지식에게는 한 방 맞을 소리다. 허물없는 완전한 진리의 말이란 없다.

 

그래서 매 순간 거울처럼 깨어있으라고 말하고, 분별없이 보라고도 말을 하지만, 그 말에 머물러, 그 말을 지키려고 하고, 그 말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 역시 마구니의 말이 되고, 외도의 말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경전의, 선어록의 일체 모든 말들 그 어떤 최고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머물러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이 나으면 먹던 약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방편의 효용가치를 다했으면 그 방편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지금 불교계를 보면, 방편이 진리인 줄 착각하고, 손가락이 달인 줄 착각하여 그 방편에만 급급한 모습들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라는 말  또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부처란 본래 없다. 중생이라는 하나의 착각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 착각을 여읜 부처를 임시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분별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무분별이라는 말을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지, 사람들이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무분별이라는 방편의 말을 따로 할 이유가 없다.

 

중생들이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을 여읜 멸성제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괴로움이 있으니, 그 괴로움을 없애주고자 온갖 방편을 써가면서 그 괴로움이라는 환상을 깨뜨려주는 것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