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예법이 그러하니 그냥 따를 뿐
황벽이 염관제안(鹽官齊安, ?~842)의 회상에 있을 때 대중(大中, 당 16대 임금의 연호) 황제는 사미(沙彌)로 있었다. 황벽이 불전에서 불상에 절을 올리는데 대중 사미가 물었다.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고, 중생을 구할 필요도 없는데, 스님께서는 절을 하여 무엇을 구하려 하십니까?”
황벽이 대답했다.
“부처를 구할 것도 없고, 법을 구할 것도 없고, 중생을 구할 것도 없지만, 일상의 예법이 이와 같으니 그저 일상의 예법을 따를 뿐이다.”
“무었이 견성(見性)입니까?”
황벽이 대답했다.
“본성이 곧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 곧 본성이다. 본성을 가지고 다시 본성을 볼 수는 없다. 듣는 것이 곧 본성이니, 본성을 가지고 본성을 들을 수는 없다. 만약 그대가 본성이라는 견해를 만들어 본성을 듣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의 다른 법이 생기게 된다.”
✔ 부처를 구할 필요도 없고, 법을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황벽은 절을 하고 예불을 모신다. 예불을 하고 절을 하는 일상의 예절은 지켜도 좋고 지키지 않아도 좋다. 거기에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불을 안 하면 부처님이 싫어하고, 절을 안 하면 부처님이 꾸중하시는 것은 아니다. 절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큰 공덕이 쌓이는 것도 아니고, 절을 안 한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예법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다. 깨달으면 마음이 자유자재하여 그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온 우주법계가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이기에 절을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일 뿐이다. 애써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세간법이라는 법규와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곳이니, 세간에서는 세간의 법을 마땅히 따른다. 따라도 좋고 따르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기에 마땅히 따라 주는 것이다.
출세간에서는 나와 너가 따로 없고, 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없지만, 세간에서는 명확히 네 것과 내 것이 구분된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와 내가 따로 없으니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것은 아니다. 분별할 것은 똑같이 세간법대로 분별하고 산다.
그것이 바로 십우도(十牛圖)의 입전수수(入纏垂手)다. 깨달음이 원만해지고 나면 다시금 세상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동사섭(同事攝)하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평범하게 산다. 그들이 하는 대로 일도 하고, 함께 농사도 짓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세속의 예법을 그대로 따르며 세간에서도 출세간에서도 아무런 걸림 없이 산다.
어설프게 불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공(空)하다는 데 사로잡혀, 모든 것이 공하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고 하며, 높고 낮은 것도 지키지 않고, 예의범절도 지키지 않고,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을 깔보기도 한다.
보는 것이 곧 본성이고, 듣는 것이 곧 본성이다. 그러나 본성이라는 견해를 지어내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곧 불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전부 다 불성일 수 있지만, 어떻게 말하더라도 견해로 지어 말한다면 전부 다 허물이 된다.
글쓴이: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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