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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있게 마음을 쓰자

장백산-1 2025. 3. 19. 23:08

책임감 있게 마음을 쓰자

 


지금껏 무엇을 느끼면서 살았는지, 무엇을 생각하면서 살았는지, 무엇을 바랐는지, 어떻게 분별하고 인식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자. 오늘 저녁에는 잠들기 전에 하루 종일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바라며, 분별했는지를 되짚어 본다면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창조될지 진단해 볼 수 있다. 매 순간순간 마음으로 일으키는 것은 삶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미래를 만들어가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마음을 쓸 때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지금 쓰는 마음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면 책임감 없이 마음을 쓰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불행을 습관적으로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앞으로 올 불행을 끌어당기는 연습임을 알아야 한다. 불행한데 어떻게 불행을 안 느끼느냐고 하겠지만, 삶의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어서 단점도 있지만 동시에 장점도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불행한 사람들은 늘 부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습관이 있다. 불행한 한 가운데에서도 분명 그것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양면성이 있다고 했지만, 근원에서 본다면 일체 모든 것은 중립적이다.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스스로 좋거나 나쁘다는 생각을 덧씌운 것일 뿐이다. 연봉을 5천을 받다가 4천을 받게 되면 물론 괴롭겠지만, 그 괴로움은 5천 받을 때와 비교했기 때문이 아닌가. 혹은 남들과 비교했기 때문이 아닌가.

 

아프리카, 인도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혹은 연봉 3천 만원을 받는 사람과 비교한다면 나는 풍요로울 것이다. 이 말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처럼 ‘비교’는 허망하다는 뜻이다. 비교에서 오는 분별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현실은 늘 있는 이대로일 뿐이다.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현실이 괴로운 이유는 이 있는 그대로인 삶에 대해 내 스스로 비교 분별 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더 가지고 싶은데 못 가져 괴롭고, 싫은 것은 없애고 싶은데 안 없어지니 괴로운 것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삶은 단순하다. 그저 삶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다만 분별해서 보아야 한다면, 싫은 것을 보고 느끼기 보다, 좋은 것을 보고 느끼면 된다.

 

초기경전에 사념처(四念處)라는,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네 가지 수행법이 있다.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가 있는데, 이는 몸, 느낌, 마음, 법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도 느낌과 마음에 대한 관찰이 중요하게 제시되어 있듯이, 느낌과 마음을 온전히 관찰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창조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허망하게 분별없이 창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