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견해가 있으면 곧바로 외도다

장백산-1 2025. 3. 18. 22:33

견해가 있으면 곧바로 외도다 / 선어록(황벽 희운/완릉록)

 


따로 구할 필요가 없으니, 구함이 있다면 모두가 고통이다. 설사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겁 동안 육도만행을 수행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더라도 이 역시 구경의 진실은 아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모두 인연으로 조작한 것에 속하기 때문이니, 그런 것은 모두 인연이 다하게 되면 무상하게 사라져 갈 것이다.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없다는 견해를 내지 말고, 법이 본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있다는 견해를 내지도 말라. 있다거나 없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분별의 견해일 뿐이니, 이는 마치 눈 속에 낀 헛된 꽃과 같다.

 

조사의 문중에서는 다만 헤아림을 쉬고 견해를 잊음을 말할 뿐이다. 헤아림을 잊으면 불도가 크게 일어나고, 분별하면 마군(魔軍)이 세차게 일어난다.

 

부처도 중생도 모두 그대가 만든 허망한 견해일 뿐이다.

 

모든 견해는 전부 버려야만 한다.

 

어떤 견해도 없다면 무변신(無邊身)이고, 만약 견해가 있다면 곧 외도(外道)라 일컫는다.

 

조작함이 없이 마음 나는 대로 지내되, 공연히 마음을 쓰지는 말라. 진실을 따로 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견해를 쉬기만 하면 될 뿐.

 

오직 말없이 계합할 뿐이니, 이를 무위법문(無爲法門)이라 한다.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이 없음을 알아서 문득 깨닫기만 하면 된다. 만약 애써 배우고자 하면 더욱 멀어진다. 만약 둘로 분별하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없어서 마음이 나무나 돌과 같이 된다면, 비로소 도를 배울 자격이 있다.

 

✔ 법은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이미 구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족되어 있는 것을 다시 구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니 어찌 고통이 아니겠는가? 수 억 겁 동안 육도만행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더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이 역시 구경의 진실은 아니다. 이 하나의 진실은 얻고 잃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없던 것을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롭게 생겨난 것이고, 인연으로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인연이 다하면 다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생멸법이지 불생불멸법이 아니다. 이 법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이 아니지 않은가.

 

법은 견해로 파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법에 대해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허망한 분별일 뿐이다. 이 조사선의 문중에서는 다만 헤아림과 모든 견해를 쉴 뿐이지, 따로 내세우는 것은 없다.

 

부처 또한 중생에 상대하여 만들어낸 허망한 견해일 뿐이다. 분별하면 중생이요, 분별이 사라지면 부처다. 그러나 분별이 사라진 사람에게 따로 부처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마치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이 최고로 바라고 추구하는 바이겠지만,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매일 같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것도 없고, 매일 아침 일어나서 스스로의 건강함에 감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건강하게 살 뿐이다. 건강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일 뿐이지, 따로 건강이라는 실체적인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병이 없는 아무 일 없는 상태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해탈과 열반, 부처 또한 그저 분별이 없는 상태다. 아무 일 없고, 문제없고, 고통이 없으며, 번뇌망상과 분별이 없는 것일 뿐이지, 따로 부처라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모든 견해는 전부 버려야만 한다. 어떤 견해도 없다면 곧 무변신보살이고, 견해가 있다면 곧 외도다. 그 어떤 견해도 내세우지 말라. 문 앞의 찰간을 무너뜨리라.

 

다만 견해를 쉬기만 하면 될 뿐, 따로 진실을 구할 필요는 없다. 이미 있는 진실을 뭐하려고 애써 다시 구하려 하는가? 추구하지 말고, 조작하지 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일 없이 마음 나는 대로 지낼 뿐, 공연히 마음 쓸 것은 없다.

 

이 법은 무위법이요 무위의 법문이다. 무위란 억지로 애쓰거나 해야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 공부에서는 애써서 배워야 할 것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무위로써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유위로 살아왔다. 어떤 유위인가? 분별의 유위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눈앞의 대상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옳거나 그른 것으로, 내 편과 네 편으로, 긍정이나 부정으로 둘로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느라 끊임없이 애쓰는 유위의 삶을 살아왔다.

 

바로 그러한 분별하는 유위의 노력만 없다면, 비로소 도를 배울 자격이 갖추어 진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