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챙기는 방법
어떤 알아차림이 선명한 알아차림인가?
앞으로 갈 때나, 뒤돌아 설 때나, 앞을 볼 때나, 옆을 볼 때나, 팔다리를 구부릴 때나 펼 때나, 음식을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나, 대변이나 소변을 볼 때나, 걷고 서고 앉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잠깰 때나, 말을 할 때나, 침묵할 때나 ,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는지를 늘 관찰하며 행동해야 한다. 이와 같이 분명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마음을 챙겨야 한다.
✔ 언제 어느 때고 할 것 없이 수행자는 현재에 즉(卽)한 순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여기의 현재에 드러나 있는 지금 이대로를 지금 이대로 보라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이나, 분별을 개입시키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참된 알아차림은 바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분별없는 있는 그대로의 봄을 실천할 수 있다. 길을 걸을 때, 손가락이나 팔다리 하나를 움직일 때, 옷을 입고 벗을 때,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대소변을 볼 때, 말할 때나 침묵할 때도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저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거울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추듯, 아무런 편견, 견해, 분별없이 그대로 비춰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의 수행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수없이 많은 생각과 망상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루에 5만 가지 정도의 생각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 90% 이상이 부정적인 생각들이나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공연한 걱정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 엄청난 생각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느라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바로 볼 수 없다. 매 순간 깨어 있는 연습을 하라.
물론 그렇더라도 그것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나 망상과 싸워 이기려는 모든 노력은 거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망상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에 5만 개의 생각이 일어난다면 5만 번 의도적으로 그 모든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아마도 우리는 하루 종일 생각과 싸워야 할 것이고, 아마도 그러다가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이다.
지금까지의 위빠사나, 관법(灌法) 수행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어찌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것을 수행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을 경험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수행이 잘 될 때보다 수행이 안 될 때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잘 되는 수행도 몇 번이지 5만 번을 연이어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이 사념처의 수행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깨어있는 마음 연습을 할 수 있다. 물론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완벽한 위빠사나를 할 필요는 없다. 또 가능하지도 않다. 잘 안 될 때 괴로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수행에 소질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사념처는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틈틈이 매 순간 순간 생각과 분별망상이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그 망상 덩어리를 매 순간 따라가며 망상이 나를 지배하고 있음을 그저 평범하게 알아차려라. 생각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을 허용해 주라. 바로 그것이다. 내가 도저히 의도적인 수행으로는 이겨낼 수 없을 만큼의 망상이 올라오고 있고, 사람들은 그런 망상에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망상과 분별의 힘은 사람들을 단 한 순간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즉 사념처(몸, 느낌, 마음, 법)은 올라오는 모든 망상들과 싸우는 도구나 무기가 아니다. 다만 올라오는 그 수많은 망상 분별심이 나를 24시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나의 괴로움은 바로 그 망상 분별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망상 분별을 수용해 주라. 올라오는 분병 망상이 마음껏 올라오도록 허용해 주는 것이다. 망상 분별을 상대로 싸우려 하지도 말고, 없애려고도 하지도 말고, 붙잡거나 버리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분병 망상의 존재를 허용한 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면서 허용해주면서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흘려보내 주는 것이다.
망상 분별 그것은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 사념처는 내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무위로써,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알아차림이고 관수행이다.
이처럼 사념처, 위빠사나, 관법수행은 인위적으로 애써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볼 때 저절로 놓여지고, 저절로 자연스러워지며,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허용해 주는 것에 가깝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렇게 바라보면서 깨닫게 된다. 그 분별 망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망상 분별로 인해 사람들이 단 한 번도 망상 분별없는 텅~빈 본래의 자리에서 쉬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 그런 통찰이 생기게 되면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이치에 따라, 분별 망상은 점차 힘을 잃게 된다. 그렇게 인위적이던 분별 망상이 무위의 자연스러운 허용과 관찰에 훈습되면서 점차로 망상 분별심이 조복되는 것이다.
그러다 그렇게 알아차림과 자연스러운 허용이 지속되다 보면, 문득, 홀연히, 몰록 분별 망상이 어느새 딱 끊기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면서 순간 분별 망상이 없는 텅 ~빈 본연의 자연 상태가 드러나는 것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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