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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 선어록] 법에는 거리가 없다

장백산-1 2025. 4. 17. 23:39

법에는 거리가 없다

 

“조주에서 진부(鎭府)까지 가는데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300리다.”

 

“진부 (鎭府) 에서 조주까지 오는 데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거리가 없다.”

 

✔선지식은 방편과 본질을 자유자재하게 쓸 줄 안다. 세속과 출세간을 자유롭게 오고간다. 법을 물으면 법으로 답하고, 일상으로 물으면 일상으로 답한다.  

 

조주에서 진부까지 거리가 300리라는 것은 일상적인 물음이고 일상적인 답이다. 큰스님이라고 해서 늘 법만을 설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매일 선문답만 하면서 살지 않는다. 선문답은 특별한 경우, 즉 제자가 법을 묻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드러낼 뿐이다.

선지식이라고 해서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묻는데, 법으로 답을 해서는 안 된다.

 

진부에서 조주까지 오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도 만약  300리라고 답했다면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대화다. 그런 대화 이런 선어록에 실릴 일은 없다.

 

진부에서 조주까지 오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법으로 답을 한다. 순간 일상이 비일상적인 선문답으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스승은 언제나 제자에게 제자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매 순간을 공부로 이끌어 주기 위해, 평범한 일상에서 순간 선으로 도약하여  선법문을 펴신다.

 

법에는 거리가 없다. 진리에는 멀고 짧은 거리가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라는  당처가 눈앞에 있을 뿐, 거기나 그 때는 없다. 다만 지금 여기 목전에 있는 것만이 언제나 항상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살아오면서 ‘그 때’를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가? 혹은 ‘그 곳’에서 살아본 적이 단 한 번만이라도 진짜로 있는가? 이것은 당장에 내 경험에서 우러나와 증명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간적으로 과거나 미래를 살아본 적이 없고, 공간적으로 그 자리 그 곳 다른 공간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

 

다른 시간 공간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다른 공간 시간을 생각했을 때뿐이다. 분별했을 때만 과거 미래 현재가 분별되고, 여기와 저기와 거기가 분별될 뿐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은 없다. 아무리 먼 거리를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먼 거리를 간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발 위에 있었을 뿐이다. 땅 위에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많은 세상을 보고, 여행을 하며 수많은 다양한 것들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눈앞’ 목전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대상을 따라가지 않으면, 색깔과 모양이라는 색경(色境)에 끄달리지 않으면, 언제나 ‘보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글쓴이: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