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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펌] [한.일 강제병합 100년] " 안중근이 살아 있다면 남북통일에..."

장백산-1 2010. 1. 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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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병합 100년]“안중근 살아있다면 남북통일에 목숨 바칠 것”
 신운용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책임연구원
ㆍ또 다른 100년, 안중근 순국

역사란 평등, 자유, 인권이 확대되는 방향 속에서 권력관계의 생성과 해체 과정이다. 한국 근대사도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동학의 실패, 일제와 친일세력의 부상은 불의한 권력관계의 형성을 초래하여 결국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체포돼 찍은 사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오늘날에도 권력관계는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권위적인 권력을 해체하여 민주화된 권력을 창출한 경험이 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지금도 새로운 권력관계 형성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근대적 권력관계의 형성을 지향하였던 안중근은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들을 위한 권력을 창출하는데 꼭 되짚어 보아야 할 인물이다. 그는 과거의 인물이 아닌 낡은 시대의 모순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인 것이다.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독립을 유지하면서 세계사의 조류에 편승하려는 일련의 세력이 조선 후기에 등장하였다.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고 밝은 시대를 열기 위해 변혁을 이끌 만한 에너지가 민족 내부에서 솟아나거나 외부에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내부에서 솟아난 동학을 에너지원으로 하기보다는 외부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열쇠로 보았다.

그는 새로운 권력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미래를 열 사상적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천주교 상층부에서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을 근대국가로 변화시킬 만한 새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는 데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던 안중근의 고민이 있었다. 안중근은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삼던 당시 천주교 상층부와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의 독립은 민권의 향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안중근은 보았다. 민권을 천주가 태중에서부터 불어넣은 천명의 본성이라고 인식한 그는 민권 향상을 위해 지방관리와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민권 향상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 대학 설립을 주장했지만 뮈텔 주교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더 이상 외국인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독립의 기반을 닦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그것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설립과 운영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처럼 그는 관념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사재를 들여가며 독립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교육에 힘썼다. 이러한 사상과 행동을 뒷받침한 것은 강렬한 민족의식이었다. 출세의 수단으로 외국어 교육이 강조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한국어가 세계에 통용될 것’이라는 주체적인 언어관을 갖고 있었다.

물론 삼흥학교를 영어학교로 소개한 당시 신문을 보건대 안중근도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영어교육은 민족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반해 현재 우리의 영어는 민족 내부의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곧 낙오자로 치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주체적 역사관을 보인 안중근은 학문을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던 친구들에게 무장이 되어 국가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에게 학문이란 민족의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결코 개인의 출세를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 이처럼 그는 오늘날의 우리와 달리, 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1910년 3월(9일 또는 10일로 추정) 면회 온 빌렘 신부(가운데 등 보이는 인물), 동생 정근, 공근을 만나고 있다. 안 의사의 동생들은 안 의사가 이 자리에서 동양평화론에 대해 얘기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이러한 안중근이기에 민족의 존립을 결정적으로 훼손하거나, 민족의 발전을 방해하는 세력과는 비록 자신에게 세례를 준 신부라고 할지라도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안중근은 러일전쟁 시기 일제의 한국 식민화에 앞장섰던 하야시 공사와 친일파의 처단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던 보안회를 찾아가 제안하였던 것이다.

을사늑약 이후 정미칠조약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제의 한국침탈을 목격한 안중근은 ‘종교보다 국가가 앞선다’고 선언하며 무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안중근에게 종교란 역사문제를 해결할 때 의미 있는 것이었다. 조선말의 역사문제는 조선의 독립이었다. 더 나아가 안중근은 우리 역사문제만 매달리지 않고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당시 세계사 문제의 해결에도 집중하였다.

안중근은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책을 주체적인 천주교 교리의 해석에서 찾았다. 그는 하느님을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뜻(천명)의 실천을 신자로서 당연한 의무로 여겨 결국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안중근 의거 소식은 순식간에 세계로 전파되어 특히 중국의 민우일보는 안중근 의거를 인도(人道)철학을 격변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가 인류철학으로 주창되던 시대에 평화를 반제이론으로 제시한 그의 탁월한 견해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일제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평화론을 전면에 내세운 안중근을 죽였다. 하지만 적국인 일본마저 안고 가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그는 인류를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책인 ‘동양평화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관념적 이론에 머문 동시대의 이론과 달리 목숨을 담보로 한 천명에 대한 구체적인 화답이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 유지를 천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이토 처단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고 자부한 안중근은 반드시 천당에 간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된 그였기에 목숨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다.

10년을 넘기는 이론이 드문 오늘날의 현실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100년이라는 시공간을 훌쩍 넘어 현재와 미래의 이론으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그는 동양평화론에서 공동의 군대 소유를 통한 군사적 충돌 해결, 공동의 은행설립을 통한 경제적 문제 해결, 젊은이들에게 2개 국어 이상의 교육을 통한 동양 각국의 상호 이해증진 등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이 오늘날 동양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유효한 수단이라는 면에서 안중근의 이론은 민족을 넘어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북한의 핵문제로 인한 마찰이 국제사회를 긴장으로 몰아 넣고 있다. 안중근의 주장에 따라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여 핵을 공동 관리한다면, 북핵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등의 핵위험으로부터 세계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국가의 경제발전은 타국과의 철저한 협력과 지원이라는 구조 속에서 가능하다는 진실을 IMF와 미국의 금융위기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현재의 국제 경제 문제는 아직도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안중근은 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평화론을 제기하였고 그 평화의 구체적 실천방법으로 동양 3국의 은행설립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하였다면 오늘날의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동양 3국이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 국제분쟁의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 안중근은 동양 3국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공유를 주장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도전은 동양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어의 국제화에 노력을 집중하는 동시에 중국어와 일본어 보급에 영어 이상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청인 것이다.

안중근 시대의 역사문제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유지였다. 이를 위해 안중근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쳤다. 당면한 오늘날의 역사문제는 ‘남북통일’이라고 단언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가 남북통일이라면 그것을 구현할 이론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일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 과정과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일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안중근대학의 설립’을 우리민족 구성원에게 제안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안중근의사를 모시는 우리의 자세를 뒤돌아보면 그 분에게 죄를 짓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확인되지 않은 주장에 근거하여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다며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안중근관계자료집 편찬 등의 안 의사 정신계승 사업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정부당국, 친일 논란이 있음에도 안 의사 사업을 하겠다며 나서는 모 언론 기관, 안 의사 정신의 선양보다는 껍데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우리는 안 의사에게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안중근의사가 ‘무슨 과 의사’라고 묻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이 현실 속에서 정부는 앞으로 한국 근대사를 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는 안 의사를 역사에서 송두리째 없애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러한 현실을 지하에서 안 의사는 뭐라며 눈물을 흘릴 것인가를 생각하면 분노하지 않을 국민이 없을 것이다.

안중근의사 앞에 늘 죄인이라며 안중근 정신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많은 국민들이 결코 우리역사에서 그 분을 두 번 죽이는 역사의 반역행위를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민족을 죽이려는 세력에 당당히 맞서 일어서는 수많은 안중근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신운용 박사(43)는 안중근 사상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드문 한국사회에서 안중근 연구에만 15년간 매달려 지난 2007년 한국외국어대 사학과에서 ‘안중근의 민족운동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자신의 박사논문을 <안중근과 한국근대사>라는 책으로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