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 나반...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져"

장백산-1 2010. 1. 7. 23:44

"나반...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져"
<특별연재>'환단고기 재조명'학술대회<3>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환단고기 탄생의 역사'(중)
 
박성수

 

환단고기의 역사세계

1) 삼성기
 
「삼성기三聖記」에는 두 종류가 남아내려 왔었는데 서로 유사하고 또한 어느 것도 완편이 아니었다. 「삼성기」두 편 중 하나는 우리 집(계연수)에 있었던 것인데 안함로 (安含老)가 찬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동중(元董仲)이 찬한 것으로 평안북도 태천의 백관묵(白寬黙)이 얻어 보관해 온 것으로 이것을 「삼성기」하권으로 삼는다. 그리고 상·하를 모두 합해서 「삼성기」 전이라 한다.

그러므로 계연수 선생이 『삼성기』를 상·하로 나누었으나 실은 서로  편자가 다르고 소장자(所藏者)도 다른 이본(異本)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이 정본(正本)인지 알 수가 없는 책이다.

삼성기 (1) 상편 안함로 찬 계연수 소장

삼성기 (2) 하편 원동중 찬 백관묵 소장

그런데 위의 『삼성기』(1) 상권의 찬자 안함로는 어떤 사람이었나. 안함로의 신원은 확실하다. 안함로는 신라 시대의 스님으로 본명이 김안홍이라 하였다. 『해동고승전』에는 신라 진평왕 23년(601)에 왕명을 받들어 중국 수나라에 가서 4년간 대흥성사(大興聖寺)란 절에서 수도하다가 4년 뒤인 진평왕 27년에 귀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 안함로는 보통 명승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안홍법사라 하여 진지왕 원년(576)에 수나라에서 귀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 되었건 안함로 일명 안홍법사의 신원은 밝혀져 있으나 『삼성기』 하편의 저자인 원동중은 그 신원이 미상이다.

「삼성기」를 편찬한 사람의 신원은 그러하고 「삼성기」를 소장했던 사람의 신원은 어떤가 하면, 『삼성기』 상편을 간직했던 분이 운초 계연수( ?-1920)였다. 이 분은 근대 인물이다. 평안북도 선천의 선비로서 해학 이기 선생에게 사사하다가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 애국지사였다.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계연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석주 이상용, 백암 홍범도(1868-1943), 그리고 오동진(1889-1930) 등과 서로 벗하고 살았고 『환단고기』를 내는데도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신원 미상의 원동중이 찬한 「삼성기」 하편은 평안북도 선천의 백관묵 진사가 소장했던 것을 계연수가 얻어 소장해 온 것이라 한다.

2) 『태백일사』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쓴 이는 이맥(李陌, 1455-1528)이었다. 이맥은 연산군 때 사람인데 너무 강직해서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그리고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당했다.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嵒)의 현손이었다.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다시 등용되는데 그때 내각에 소장되어 있던 비장도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우리 역사의 시작 즉 상고사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이맥이『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 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이라하나 焚書令이 맞을 것이다.)을 내린 지 불과 50년만의 일이다. 세조 2년에 왕은 각도 관찰사에게 엄명을 내려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상고사 기록을 압수하라 한 것이다.

이 명을 어기고 책을 숨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위협하였으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비슷한 문화혁명이었다. 이때 압수된 고기의 서목들이 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 내용이 『태백일사』에 수록하였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잠시 이맥이 『태백일사』를 쓰게 된 동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서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하였다."

『태백일사』란 태백산 환국의 잃어버린 역사란 뜻이다. 태백의 역사가 왜 빠졌는가 하면 조선왕조가 태백의 상고사를 인정하지 않고 이 사실을 숨기기로 한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단군 이전의 역사쓰기를 금지했던 것이다. 상고사는 금지된 역사요 국시(國是)에 위반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조(1456-1468)가 『태백일사』의 소장자를 죽이겠다고 까지 으름장을 놓았겠는가.

「태백일사」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전한 분이 바로 이맥의 후손인 해학 이기였다. 이기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 나라가 망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자결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나라 상고사를 밝혀준 민족사학에 기여한 분이었다.

일십당 이 맥의『태백일사』속에는 다음과 같은 네 종류의 사서가 수록되어 있다. 1)단군 이전 시대 즉 환국과 신시 시대에 관한 기록, 2)단군시대의 기록, 3)단군 이후의 시대 즉 고구려에 관한 기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4)경전 류(類)가 수록되어 있다.

----------------------------------------------------------------------
1) 단군 이전에 관한 기록

(1)「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제1

(2)「환국본기桓國本紀」제2

(3)「신시본기神市本紀」제3

2) 단군시대에 관한 기록

(4)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가 상 하

-번한세가 상 하

3) 경 전 류

(5) 소도경전본기 제5

-천부경

-삼일신고

4) 단군이후의 시대에 관한 기록

(6) 고구려국 본기 제6

-대진국본기 제7

-고려국본기 제8

----------------------------------------------------------------------


「태백일사」 서두에 나오는 「삼신오제본기」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삼신오제본기」는 환국시대와 신시시대에 관한 기록이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도 앞서 나온 「삼성기」<상, 하>와 같이 태시기(太始記)로부터 시작된다. 태시기는 창세기를 말한다. 북애(본명 權俔)의 『규원사화』에 조판기(肇判記)와 태시기(太始記)가 있듯이 「삼신오제본기」에도 태시기가 있어 천지 창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는 “태고에 음양이 갈라지지 아니하고 홍몽한 채 오래 닫혀 있었다. 상계에 문득 하나의 대주신(大主神)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환인이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삼신오제본기」에서는 『표훈천사(表訓天詞)』를 인용하면서 태초에 천제(天帝)가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 그리고 사방에 암흑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니 시간이 흘러 옛것이 가고 지금이 오더니 마침내 오직 한 빛이 밝았다(只一光明矣). 상계(上界)에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이가 곧 상제(上帝)이시니라. 그 주체는 일신(一神)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작용할 때에는 삼신이다.

삼신은 천신이요 일신이다. 그런데 나누면 환인 환웅 단군 등 삼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신은 본시 하나이지 셋이 아니라 한 것이다.

무릇 삼신은 천일(하느님)이라 하고 지일地一(땅의 신)이라 하고 태일太一(사람의 신)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고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였다.

삼신 중 천일은 조화(창조) 지일은 교화(교육) 태일은 치화(통치)를 주관한다고 하였는데, 『고려팔관기(高麗八關記)』에 따르면 천일은 곧 환인이요 지일은 환웅이요 태일은 단군이라 하였다.

『고려팔관기』에 삼신설(三神說)이 있다. 가로대 “상계의 주신을 천일이라 하여 조화를 주관하고, 하계의 주신을 지일이라 하여 교화를 주관한다. 중계의 주신은 태일이라 하는데 치화를 주관한다”고 하였다. 또 “환인씨는 어버이의 도를 써서 천하에 쏟으며 신시씨는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한다. 왕검씨는 왕의 도로써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하였다.

삼신은 환인 환웅 단군인데 환인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환웅은 환인이 이미 만들어 주신 것을 교화 즉 가르쳤고, 단군은 환웅이 가르친바 그대로 다스렸다. 그런데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삼신은 각기 다른 방법을 썼다. 즉 환인은 백성을 가장 정에 넘친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환웅은 스승처럼 가르쳤고, 단군은 임금처럼 다스렸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백성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다스린다는 것이다.

3) 나반과 아만

그러면 삼신이 내린 곳이 어디냐. 바로 태백산인데 이 태백산은 지금의 개마고원이다. 개마고원은 평안도와 함경도 경계에 있는 고원으로서 한국의 지붕으로 알려져 왔다. 백두산의 어원도 개마고원의 개마(蓋馬)에서 나온 이름이다.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산 이름을 삼신이라 한 까닭은 대저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닐었기 때문이다. 혹은 삼(三)은 신(新)이요 백은 신(神)이라 신은 고(高)가 되고 고는 머리(頭)가 된다.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에서 바뀐 이름이라 하면서 해(奚)는 희다는 뜻이요 마리(摩離)는 머리라는 뜻이니 백두산의 이름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삼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교화하고 치화하였다고 하였으나 삼신 이전에 인류의 시조가 있었다. 바로 나반과 아만이었다. 나반과 아만은 우리말의 아버지와 어머니란 말이다. 이 두 분이 서로 아사달(아이사타, 阿耳斯它)에서 만나 처음 혼약을 맺고 후손을 나았으니 이것이 인류의 시작이자 동시에 우리 민족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조상은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사타라 한다. 일명 사타려아(斯它麗阿)라고도 한다.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다. 구환의 64민은 모두 그 후예이다. 그러나 그 뒤 구환족은 각각 흩어져서 일산일수(一山一水)에 나라를 만들어 서로 경계를 쳐서 살게 되니 서로 창세의 줄기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반과 아만이 서로 만난 곳은 천해(天池, 바이칼호)가 있는 곳이며 서로 만난 날은 7월 7일이었다. 훗날의 하백(河伯)은 나반의 후손이었다.

하백은 천하(天河)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바로 나반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 날 용왕에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四海)의 여러 신들을 주관케 하셨다. 천하를 일명 천해(天海)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北海)가 그곳이다.

그럼으로 북해가 우리 민족의 원주지라는 것인데, 7월 7석날에 둘이 만났다는 것은 가필일 것이다. 그리고 북극에서 천도(天道) 즉, 홍익인간의 가르침이 처음 계시되었다.

천하의 주(注)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났다. 고로 천일의 물을 낸다. 이를 북수(北水)라 한다“고 했다. 대저 북극은 수정자(水精子)가 기거하는 곳이다.

이같이 나반과 아만이 태초에 혼인하여 그 후손시대가 오래 계속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환인이었다. 이 분이 나반의 뜻에 따라 선정을 베푸니 그를 또한 아버지(안파견 또는 커발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환인이란 분이 나타나 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여 임금으로 추대되었으니 이를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고 커발한(居發桓)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이고 커발한이라 함은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을 이름이다. 이로부터 환인의 형제 아홉 명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셨으니 이를 9환64민이라 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태초에 나반과 아만이 계셨고, 이어 오랜 후세에 환인이 나타나고 환웅, 단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로 계속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관련기사
"단학회의 상고사관은 환인·환웅 중심 역사관"

기사입력: 2009/12/24 [10:00]  최종편집: ⓒ 환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