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학(象數學)
상(象)과 수(數)
우주의 모든 변화는 운(運)과 기(氣)의 승부(勝負)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변화현상의 승부작용이란 것은 다만 관념적인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현실적인 사(事)와 물(物)에서 포착할 수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이것은 다만 관념적인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실학(實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변화현상을 실학적으로 연구하고 또 이것을 실용화하려면 사물의 변화와 꼭 부합되는 기본법칙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며, 또는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운과 기의 운행법칙이므로 그것은 사물을 탐색하는 방법인 상(象)과 수(數)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동정(動靜)하고 있는 모든 사물은 그 변화상태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하다 할지라도 상(象)의 기미를 잘 관찰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장중지물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을 신비로 생각하는 것은 총명과 관찰력이 불급한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환상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주의 사물들이 단순히 상(象)만 나타낸다고 하면 상의 가부판단에 있어서 많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조화는 이와 같은 폐단을 방지할 수 있는 자연수(自然數)가 상(象)과 함께 흐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상수(象數)라고 하는 바, 수(數)는 상(象)의 의미를 밝혀 주며 또 그의 내용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오운(五運)과 육기(六氣)의 변화작용은 이와 같이 상과 수에 의해서 그 내용을 관찰할 수 있고 또는 밝혀 줌으로써 그것이 현실적인 실용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상과 수는 이와 같이 변화원리를 실현하는 방법과 수단이 되므로 그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사물에서 상을 관찰하거나 또는 수의 흐름을 알아내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수철학(象數哲學)의 성패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과 수에 대한 관찰력 양성은 철학적인 절대요건으로서 대두하게 된다.
1. 상(象)의 개념과 성립
상(象)이라는 개념은 형(形)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만일 형(形)을 인간의 감각에 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象)은 일반적인 인간, 즉 명(明)을 잃은 인간이나 또는 자연법칙을 관찰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인식되기 어려운 무형(無形)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象)은 사실상 무형(無形)인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세속적인 사회생활과 거기에서 오는 사욕 때문에 어두워진 근시안적인 사람의 이목에만 무형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원자세계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공기나 색소 같은 것도 또한 상(象)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행(五行)의 목화토금수라는 것도 그의 본질은 다섯 가지의 상(象)인데 다만 그것이 응결(凝結)하여서 형체를 이루게 되면 물체가 되고 분열하여서 기화(氣化)하게 되면 그것을 상(象)이라고 한다. 그런즉 형(形)과 상(象)이란 것은 현실적으로는 이질적인 음성(陰性)과 양성(陽性)의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나 그 본질을 따져보면 일본체(一本體)의 양면성(兩面性)에 불과하다.
형과 상은 이와 같은 관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형(形)은 볼 수 있지만 상(象)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상(象)이 비록 무형(無形)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형(形) 이전의 기본이라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형(形)은 반드시 기미(機微)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몽매하게 됨으로 인하여 형(形)에서 상(象)을 찾으려고 하지도 못하며 또는 그 법칙을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분노할 때에는 반드시 그 분노의 주체인 간기(肝氣)가 흥분하고 있는 상(象)이 오행의 생극(生剋) 원리대로 안면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내심으로 그의 노기를 감추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상(象)이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이 때에 있어서 일반 사람은 그러한 상(象)을 보지 못할지 모르나 총명한 사람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象)과 철학(哲學)은 불가분의 양자(兩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상(象)을 연구하는 목적은 철학적 진리를 탐색하며 또는 명(明)을 양(養)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象)을 연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것을 연구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수(數)와 괘(卦)에서 상(象)을 관찰하는 방법을 공부하여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수식(數式)이나 수열(數列)에도 자기자체의 상(象)이 있고 팔괘(八卦)에는 만물이 변화하는 상(象)이 망라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선들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서 수상(數象)을 연구했으며 또는 그것을 계발하여서 괘상(卦象)으로 발전시켜 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상(數象)과 괘상(卦象)을 연구한 다음에는 물상(物象)을 연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수상과 괘상에서 그의 기본과 법칙을 연구하는 것은 物에서 상(象)을 파악하려는 기초 공작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라야 물상을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수상(數象) -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수(數)는 계산(計算)을 위하여 인간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고 수(數) 자체가 진리(眞理)이며 철학(哲學)이다. 그러므로 수(數)가 나타내는 모든 상(象)은 허상이 아니고 실상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은 그의 본질대로 상이 나타나고 상에는 반드시 그 상의 내용인 바의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며 또한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물론 이것을 탐색하는 현실적인 목표는 사물 자체의 상에서 직접적으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연구하기 위하여서 수상에서 찾는 방법부터 공부하여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하도(河圖)는 자연수(自然數)가 통일하는 상(象)을 표시한 것이고 낙서(洛書)는 자연수가 발전하는 상(象)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의 산합(散合)하는 상(象)을 연구하면서 수상(數象)과의 관계를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하도(河圖)를 살펴보면 하부에 있는 육(수)은 一(수)을 내부에 안고 있는 상인데 일이 내부에 있고 육이 외부에 있는 것을 표시한 상은 바로 육이라는 성수(成數)가 일이라는 생수(生數)를 포위하는 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象)이 북방정위에 있는 것은 육(六)이 결국 포위망을 이완하면서 일(一)을 방출할 수밖에 없는 상(象)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도의 일(一: 數)은 아직 그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상(象)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그러나 반면으로 낙서를 보면 一(水)은 정북방에 놓였고 육(수)이 서북방에 있다. 낙서에 이와 같이 표시된 것은 낙서는 하도와 같은 의사표시만이 아니고 이미 행동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서북은 수축이 미극한 곳이요, 정북은 통일이 완성된 곳인 바 여기에서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자를 정명할 때에 六자는 'ㅗ'와 '八'하는 두 글자의 상을 합하여서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지하에 있는 八(木)이 상향하려는 상을 육자에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런즉 이러한 육이 외부를 포위한 상을 하도에 표시한 것은 다만 一六이 생의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지만 낙서에 六을 서북에 놓고 一을 정북에 놓은 것은 六은 아직 완전한 통일이 아니고 정북의 一에 이름으로써 완전한 통일이 되어 가지고 동북위에서 팔(生)하려는 행동과정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즉 우리는 一이 다로 변화하는 준비기본은 一六八의 준비과정인 北方 坎水에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적인 변화(생장)의 象은 洛書에 있고 다만 그의 기본만 河圖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은 육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육은 일이 완성을 도우면서 또한 형의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은 생명의 본질이고 육은 형체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하도는 팔(목)이 외부를 포위하고 삼(목)이 내부에 있다. 그런즉 이것은 분열하려는 陰形인바 그것이 전혀 생의만 가지고 있던 육에서 이만큼 발전하여서 동에 와 있고 또는 생명의 본질이었던 일이 삼이 되어서 이미 동방의 내부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런즉 이것은 북방의 일이 이 만큼 팽장한 象을 표시한 것인즉 이것이 바로 천도가 생화하는 상이다.
그런데 낙서는 관찰하면 동북위에 팔이 있으니 이것은 북방육일이 발하려는 뜻이다. 그런즉 삼이 동방정위에 있는 것은 삼이 이 동방에서 주동역할을 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삼의 개념은 일이 자기의 기본인 음을 쓰고 발한 상을 표시한 것이다. (일은 기본양이라고 하고 이는 기본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전은 삼을 정명하기를 일가어이라고 하였으니 실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방정위에 이와 같은 삼이 있어서 동북위의 팔의 도움을 받으면서 팔하려는 뜻을 실현한다. 그런즉 천도에 있어서 일의 통일은 삼의 분열로 인하여 파괴되면서 다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일이 삼으로 발전하고 육이 팔로 발전하는 수상이다. 그러나 일이 사실상 화를 포위하면서 일을 만들었던 것인즉 삼의 분열이란 것은 곧 화[불]의 발전이므로 그 다음은 화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火의 위를 하도에서 보면 칠(화)은 외부에서 발하고 이(화)는 내부에서 그의 발산작용을 견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육일수, 팔삼목 하던 수목작용에서는 육이나 팔의 음은 형을 만들고 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표면에 있으면서 확장되는 존재였는데 이칠화와 사구금의 과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음이 내부에 있으면서 오히려 양의 발산을 견제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불[火]이 만일 분열하게 되면 반드시 형을 잃게 될 것인즉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여야 할 것이므로 하도의 상이 이와 같이 표시된 것이다. 하도는 다만 이와 같은 의미의 표시에 불과했지만 낙서에 있어서는 동남방에 四(金)가 있고 정남에 구(금)가 놓여서 구금이 불을 포위하는 주동역할을 하고 사금이 구금의 작용을 방조하고 있는 상이다. 이것을 하도에 비하면 불의 포위작용으로서는 아주 구체적이다. 이와 같이 금이 들어와서 불을 포위하는 것이 바로 우주변화의 진상이다. 그렇다면 四자와 九자의 상에 그러한 뜻, 즉 금의 의미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을 연구하여야 한다.
四자는 口자와 八자이다. 그런즉 四자 속에는 팔이라는 쪼가리의 성질을 가진 것이 들어가서 포위당하고 있는 상이 있은 즉 이것은 분명히 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다음 구자는 乙,乃인즉 乙자는 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乃자의 뜻은 양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즉 九자의 뜻에는 乃이라는 양이 발전하려고 하지만 乙의 굴하는 성질 때문에 발전이 정지되고 있는 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전에 九자의 뜻을 합야, 취야 라고 한 것은 실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계고 해본 바와 같이 四九의 象속에도 역시 위와 같은 수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즉 낙서에서 이와 같은 상이 표시된 것은 우주 발전의 변화를 수상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인바 이것을 金火交易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金의 位인데 하도에서는 사(금)가 내부에 있고 구(금)가 외부에 있어서 구금의 종합작용은 내부의 사금이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구가 지니고 있는 양금의 성질이 사의 견제와 합세함으로써 양을 포위하는데 성공하는 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서에서는 서방에 화가 와 있다. 다시 말하면 이화는 서남방에 있고 칠화는 정면에 있는데 이것은 이화로서 칠화를 속에 포장하려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화를 포장하는 것은 남방에 있는 사구금이 하는 것이지만 화 자체로 보더라도 이화로서는 수렴하려고 하고 칠화는 항상 발산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음양조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의 수상을 살펴보면 二자는 두 개의 一자가 합하여서 二자가 된 것이다. 그런즉 二라는 것은 一이 팽창하여서 늘어난 상이므로 二가 수축되면 다시 一이 되려고 하는 상이 있고 칠자는 삽자가 아직 미완성된 상이다. 즉, 십자의 종획이 곧게 내려가야만 할 것인데 곧게 못 가고 구부러진 상인즉 이것은 십토 이전의 상태다. 이칠화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수상에서 개념을 취한 것이다. 그런즉 이것도 역시 자기 자체의 수상을 가지고 화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오와 십의 數象을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하도에는 오(토)는 중앙에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중앙의 중앙이다. 십토는 중앙에 있기는 하지만 오의 상하에 각각 五개씩 있으니 이것은 중앙의 표면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십토가 오토를 포위하고 있는 것은 오는 십에 비하여 반분 밖에 늘어나지 못한 것이므로 이것은 아직 속에 있는 상이 있고 십은 수의 최대 확장이므로 표면이 놓이는 상이 있다. 그러므로 오토는 확장하려는 토요, 십토는 종합하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토라고 한다. 그런데 낙서는 중앙에 다만 五土數 밖에 없다. 그런즉 여기에는 생장하는 상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도처럼 15수가 있어야만 수장하는 상이 있을 터인데 오수밖에 없은즉 이것은 수장의 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낙서를 先天 象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와 십수에는 다른데 없는 특별한 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와 십은 중수라고 하는 사실이다. 수는 본래 사물의 작용가치를 규정하는 것이므로 모든 상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중수라는 특수한 성질을 지닌 것은 토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상이 토의 조화에 의하여서 이루어지듯이 모든 수상도 여기에서 조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중요한 토의 수상은 과연 어떠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자에는 一이라는 陰과 ㅣ이라는 陽이 중심점에서 교차하는 象을 이루고 있다 그런즉 십이란 것은 음과 양이 절대 동일치로서 교회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것은 음과 양의 중화된 성질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십이 비록 이와 같은 중이라고 할지라도 만일 자오의 정중선 서쪽에 조금만 치우치게 되면 절대 중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십은 본성이 절대중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중작용의 최대역할을 한다. 각설하고 십자가 이와 같이 취상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한 것은 십의 성질이 중이란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또 五자는 전자로서Ⅹ로 쓴다. 왜 그와 같은 취상을 하였는가 하면 오는 그 작용가치가 십에 비하면 반밖에 못 되기 때문이다. 五자의 복판에 있는 ×자는 십자로 볼 때 그것이 정중을 유지하지 못하고 유위로 경도되고 있는 상에 불과한즉 이것만으로도 벌써 십자에 비하면 가치타락이다. 그 위에 아직 二의 속에서 활동하고 있으므로 五자의 상을 이와 같이 취한 것인즉 오의 작용가치는 십의 절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술축미의 사토 가운데서 미토(십)를 제해 놓은 진술축토의 활동양상을 생각해 보면 오의 수상을 이와 같이 취한 선성 조자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이상 소론을 생각해 보면 모든 수는 우주가 발전하는 상의 활동하는 모습대로 표시된 청사진인즉 이것은 계수상의 기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자연수 자체가 바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그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數象을 약론하였거니와 수상의 연구는 반드시 수의 변화와 중을 참조하면서 연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언하는 바이다.
'氣 哲學, 동양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易의 기초 ~ 陰陽 (0) | 2011.02.13 |
---|---|
[스크랩] 易의 기초 ~ 道 = 太極 (0) | 2011.02.13 |
[스크랩] 과학 역(易) ~ 4 (0) | 2011.02.13 |
[스크랩] 과학 역(3) (0) | 2011.02.13 |
[스크랩] 과학역(2) (0) | 2011.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