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법문 듣기 (09:57) ☞ 제3절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7. 열반진색(涅槃眞色) 涅槃眞色(열반진색) Ο 涅槃(열반)은 色(색)ㆍ聲(성)ㆍ香(향)ㆍ味(미)ㆍ觸(촉)ㆍ生(생)ㆍ住(주)ㆍ 壞(괴)ㆍ男(남)ㆍ女(여)의 十相(십상)이 無(무)함. Ο 色是無常(색시무상)이나 因滅是色(인멸시색)하여 獲得解脫常住色(획득해탈상주색) - 涅槃經 - Ο 如來藏中(여래장중) 性色眞空(성색진공) 性空眞色(성공진색) 淸淨本然(청정본연) 周遍法界(주편법계) - 楞嚴經 - Ο 一毛孔中(일모공중)에 無量佛刹(무량불찰)이 莊嚴淸淨(장엄청정)하여 曠然安立(광연안립)이라 - 華嚴經 - Ο 刹刹塵塵(찰찰진진)이 俱說俱聽(구설구청)하여 說聽(설청)을 同時(동시)하니 妙哉(묘재)라 此境(차경)이여 - 四明敎行錄 - Ο 妙色湛然常安住(묘색담연상안주) 不移生老病死遷(불이생노병사천) - 名義集 - 우리는 색(色)이라 하면 색즉공(色卽空)인 허망한 색이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하고 진색(眞色) 또는 묘색(妙色)을 보통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색즉공 제법공하는 그러한 색과 묘색과 진색은 경을 보면 엄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진공묘유(眞空妙有)는 공(空)의 실체로 나타나는 실존적인 실상(實相)의 색 곧, 진색(眞色)이요 묘색(妙色)인데 이것을 부정하면 대승불법(大乘佛法)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은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생ㆍ주ㆍ괴ㆍ남ㆍ여 의 십상(十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무상(無相)이라, 상을 여읜 영생(永生)의 자리요 번뇌가 멸해 버린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열반은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색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촉감이나, 또는 우주가 생기고 사람이 생기고 무엇이 생겼다는 생상(生相)이나, 또는 머물러 산다는 그런 머무름[住]이나, 머물다가 다시 파괴되는 괴상(壞相)이나, 또는 남자다, 여자다, 하는 상(相)도 열반경계에는 없는 것입니다. 남, 여가 뚜렷이 구분이 있는 것은 욕계의 범주 내에서 뿐입니다. 욕계를 떠나면 벌써 남, 여의 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상(十相)이 없는 것이 열반상이라는 말입니다. 열반경에서는 '색시무상(色是無常)이나' 물질적인 색은 덧없지마는, '인멸시색(因滅是色)하여' 이 무상한 색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획득해탈상주색(獲得解脫常住色)이라'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모든 번뇌를 해탈한 진실한 색(色) 곧 무량무변한 청정광명을 얻을 수 있다는 법문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하는 바와 같이 저 물질의 끄트머리, 물질의 근원에는 광명만 남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란 것은 사실은 광명 위에 이루어진 광명의 파동입니다. 색이 비록 무상하나 이 무상한 색(色)이 멸함으로 말미암아서 해탈상주색 즉 성ㆍ주ㆍ괴ㆍ공에도 상관없고 또는 생ㆍ주ㆍ이ㆍ멸에 상관없고, 인간의 생ㆍ로ㆍ병ㆍ사에도 상관이 없이 항시 영원히 머무는 해탈상주색인 묘색, 진색인 무량광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능엄경에는 '여래장중(如來藏中)에 성색진공(性色眞空)이요 성공진색(性空眞色)이라' 무량공덕을 갖춘 불성(佛性) 성품의 묘색(妙色)은 바로 진공이요 여래장중에는 성품 곧 본체가 비어 있는 공(空)한 자리가 그대로 실상인 진색(眞色)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정본연 주변법계(淸淨本然 周遍法界)라' 본래 청정한 진여 불성이 우주에 두루해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에는 '일모공중(一毛空中)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미소(微少)한 터럭 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나라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하여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장엄하고 청정하게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 그대로 광활하게 보존돼 있다는 법문인데 능엄경, 화엄경, 유마경 등에 있는 법문입니다. 상대를 초월한 세계에는 크다, 작다, 많다, 적다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즉 나요, 내가 즉 삼친대천세계이고, 하나의 티끌이 삼천대천세계요,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한 티끌입니다. 이런 심심미묘한 가운데서는 하나의 터럭 구멍 가운데 무량불찰(無量佛刹)이, 삼천대천세계가 장엄 청정히 들어 있지마는 그것이 조금도 축소도 안되고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진진찰찰(塵塵刹刹)이 구설구청(俱說俱聽)하여' 우주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땅이나 저 땅이나, 적광토나 사바세계나 극락세계나, 또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일체 모두가 다 함께 설법하고 함께 듣는다는 말입니다. 저 영국의 18세기 시인 월리암 블레이크(Blake, William 17571827) 시(詩)에도 모래알 한 톨에서 우주를 보고 장미꽃에서 천지조화를 본다는 시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마는 도인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시인은 이와 같이 신비한 우주의 조화를 느낍니다. 어느 국토 어느 나라, 사바세계나 극락정토나, 또는 나무나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렇게 범연히 보아 넘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로 보면은 모두가 진여불성 아님이 없기 때문에 서로서로 설법하고 설법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로 유기적(有機的)인 원융무애한 생명체입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말라고 여러 모로 캠페인을 하는 것은 좋으나 철학적으로 모든 존재의 동일(同一)한 생명관을 가르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책입니다. 중국의 황하(黃河)를 저 하류(下流)에서 제 아무리 맑히려 해도 맑힐 수가 있겠습니까? 저 황토층에서 황토가 내려오니 상류(上流)를 맑혀야 하는데 무슨 일이나 근원을 맑히는 데는 철학적 종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 원리를 파악해 버리면 저절로 자연 훼손을 하지 말라고 안 해도 일체가 동일한 생명이라고 생각할 때 어떻게 함부로 파괴하겠습니까? 지금 사회 운동권에서 고생하는 분들은 더러는 헛고생, 서투른 짓을 많이 합니다. 찰찰진진 두두물물이 모두가 서로 설법하고 서로 듣고 있습니다. 풀도 설법하고, 풀도 듣고 있고 돌멩이 하나도 설법하고 같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청(說聽)을 동시(同時)하니' 먼저고 나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동시에 설법(說法)하고 청법(聽法)한다는 말입니다. '묘재(妙哉)라 차경(此境)이여!' 이 경계가 얼마나 신묘한 것인고! 이 게송은 사명(四明 知禮∼宋時代) 존자라고 하는 분의 게송입니다. 천태교의 위대한 분이라서 존자라고까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묘색잠연 상안주(妙色湛然 常安住)하여' 묘색이 고요하고 맑게 항시 안주한다는 말인데 신묘한 진공묘유의 색, 청정미묘한 생명의 광명이 항시 안주해서 '불이생로병사천(不移生老 病死遷)이라' 생로병사에 따라서 옮기지 않는다. 생로병사야 있든 말든 일체 차별 경계를 초월하여 영원불멸하게 빛나는 청정광불(淸淨光佛) 바로 아미타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