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라는 것은 없다

장백산-1 2012. 6. 9. 19:05

 

 

                나는 없다

      

        고통을 느끼는 主體 ... "나"는 없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의 正體는 生覺입니다.

괴로운 生覺을 떠올리면 괴롭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生覺을 버려라' 라고 하셨고,

'生覺을 버리기 위해 수행(사타마)하라' 하셨습니다.

生覺을 없애고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삼매 수행은

고통을 느끼는 主體,

卽 나(我)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불교의 根本 思想은 무아(無我)'라 하셨고,

'상처 입을 "나(我)"'는 없다는 겁니다.

 

상처 입는 肉體일까요? 마음일까요?

'나'가 肉體라면, 죽은 屍身에게 욕을 하면 죽은 屍身도

마음의 상처를 입어야 하는데 屍身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럼 '나'가 生覺하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마음이란 本來 形體나 모습이 없습니다.

모습과 형체가 없는데 무엇이 고통이 있느냐는

이론이 성립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생의 마음은 마음의 힘이 妙하고 强해서,

스스로 錯覺하고, 스스로 그렇다고 믿어버림으로 因하여

고통의 늪에 빠져 들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뭔지, 고통이 뭔지 分析을 해볼 生覺은

일체 해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分析할 生覺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저 괴로워하거나 신세한탄만 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分析하는 종교입니다.

즉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分析하고, 마음을 다스려 괴로움을 끝장냄으로

決局 幸福(열반)에 도달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도, 내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괴로움이 持續됩니다.

苦痛당하는 '나'라는 主體가 없다는 事實을 알게 된다면

精神的인 모든 괴로움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나”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도 "나"지요.

그럼 당연히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나'를 分析해야만 합니다.

만약 "나"가 있다면 치료가 가능해 질 것이고,

만약 "나"가 없다면 치료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걸 전도몽상(轉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즉, 錯覺이라는 거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없는 '나'를 내가 있다고 生覺하니까 

내가 스스로 錯覺했다는 뜻 입니다.

根本이 무아(無我)인데 전도몽상(轉倒夢想)을 하여 苦痛 받는

不幸을 스스로 自招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 라는 거지요.

 

고통은 原來 없는데, 고통을 당해야 하는 主體가 없는데,

뭔 고통이 있겠습니까마는 無智의 衆生들에게는

그리 쉽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人間은 몸인 物質과 精神인 마음으로 構成되어져 있고,

이것을 오온(五蘊)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오온(五蘊)에서 온(蘊)이란 무더기를 뜻 합니다.

다섯 가지 무더기란 뜻 卽 다섯 가지의 集合體라는 의미입니다.

 

五蘊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입니다.

색(色)이란 몸뚱이를 뜻하는 物質이며,

나머지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은 精神/마음을 뜻 합니다.

 

첫째, 肉身(色)

둘째, 마음/精神(수, 상, 행, 식)

   - 수(受) : 느낌

   - 상(想) : 이미지 生覺

   - 행(行) : 意志

   - 식(識) : 認識

 

불교에서는

마음을 수(受), 상(想), 행(行), 식(識)) 4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서 가장 主된 것은 식(識)이며

나머지는 그 識에 따른 反應입니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으로

苦痛이 어떻게 發生하는지 따져보면

 

첫째, 식(識)이 예전에 불쾌한 記憶을 떠올립니다 → 認識

둘째, 그럼 불쾌한 느낌이 듭니다. 기분 나쁘지요 → 느낌

셋째, 그럼 想像합니다. 生覺하지요.

      저 못된 것을 어떻게 혼내줄까? → 상상/생각

넷째, 生覺이 結定되면 뭔가 行爲를 하려고 합니다. → 의지

 

이렇게 계속 生覺이 이어지면서 返復됩니다.

 

존재를 괴롭히는 게 바로 느낌입니다.

느낌이란 것도 마음 중에 하나이며,

네가지 중에 하나가 바로 느낌입니다.

느낌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느낌이란 無常한 것이며, 永遠한 것이 아니다.

無常한 것에 執着하는 것이 바로 苦痛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治療하려면, 마음에 대해서 分析해야만 합니다.

불교만큼 마음에 대해 詳細히 分析해놓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네가지로 區分된 마음, 이 네가지 모두 다 永遠하지 않습니다.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이 네 가지 마음은 每 瞬間瞬間 항상 變化합니다.

 

고통당하는 그 主體가 나인데,

분석해보면 나라는 主體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生覺일 뿐입니다. 生覺을 할 때만 내가 存在하는 듯 한 錯覺을 불러일으킵니다.

괴로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괴롭고 불쾌한 生覺을 할 때만 괴롭습니다.

 

問題는 끊임없이 生覺하고 또 生覺하는 마음, 이것이 고통입니다. 고통스런 生覺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執着이라고도 하며,

執着은 한 生覺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問題입니다. 이 執着이 나를 利己的이게끔 만듭니다.

 

삶의 고통에서 解放을 원한다면

生覺하는 主體를 찾고, 찾다보면

生覺하는 主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텅 비어 있다는 事實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本來 마음 모습虛空(텅 빈 바탕)과 같습니다.

가끔씩 바람에 실려 먼지가 虛空에 흘러들어오긴 하지만

虛空의 本體(본래 마음 모습)은 언제나 텅 비어 있습니다. 

이것과 같이 우리 마음도 虛空과 같습니다.

그냥 가끔씩 또는 때때로 불쾌한 生覺, 기쁜 生覺 등이 먼지처럼 흘러들어오지만 그 먼지를 "나"라고 錯覺면서 사는 게 사람입니다.

 

主人은 虛空인데, 먼지가 主人行勢를 하는 거지요.

理由는

마음이란 것이

物質인 肉體를 "나"라고 錯覺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物質이 나가 아님을 알아야 하고,

둘째는 이 마음/정신이 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하나하나 分析해나가는 게 불교 공부 입니다.

나 自身을 分析해나가면서 精神이 어떻게 作用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분석함으로 인해 어디에서 고통이 생기는지도 당연히 알게 됨으로 고통까지도 직접 스스로 제거가 가능합니다.

 

불교는 마음이 核心인데, 불교 공부를 하시려면 가장 먼저

五蘊을 배우셔야 합니다.

五蘊이 바로 텅 비어있는 “나(我)”입니다.

 

반야심경이란 경을 많이 들여다보셨을 것입니다.

앞 부분에 “照見五蘊皆空” 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서 五蘊이 바로 텅 비어 있는“나(我)”를 뜻 합니다.

 

불교는 나를 깨우는 공부이며,

곧 나를 알았을 때가 부처인 것입니다.

불교만큼 自己 自身에 대해 알아가는 종교나 철학은 없습니다.

열심히 나를 찾는 공부를 하여 自由로운 世上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 옮긴 법문-

-무진장/행운의 집-

 

 

 
Ramona, Giovanni Marra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