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법칙 - 제 1 화 : 마음을 찾습니다.(부메랑의 법칙 ) 임진년 새해벽두에 "마음"이란 화두를 생각해 봅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어느날 이런 生覺을 합니다. "난 물이 그리워 물을 보고 싶어 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얄까 까말까 아니면 창공처럼 푸를까?" 그것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물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 흰고래를 만났습니다. "고래야, 물은 어떻게 생겼니?" 고래왈 " 물은 말이야. 글쎄, " 하면서 하얀물기둥을 쭈욱 뿜고 지나갔습니다. "아하, 물은 하얀기둥처럼 생겼구나." 그러나 다시 의심이 들어서 이번엔 문어에게 묻습니다. "문어야 물의 생김새를 얘기해 줄래?" "물은 이렇게 생겼지." 하면서 까만 먹물을 뿜으면서 갔지요. "물은 까만 먹물처럼 생겼구나" 그런데 다시 의심이 들었습니다. "아니야, 물이 저렇게 까말리가 없지." 상어를 만나서 물을 찾고 있는 자신의 애타는 심정을 애기했습니다. 상어는 아무 말없이 지느러미를 세우고 물속 위아래를 헤엄쳐 지나 갔습니다. 그러자 푸른색이 도는 물보라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물은 푸른 물보라처럼 생겼구나라고 生覺했지요. 그렇게 지친 몸으로 고향에 다시 돌아 오는 길에 이 번엔 복어를 만났지요. "복어야, 물을 찾고 있는데 물 좀 보여 줄래?" 그러자 복어는 홀쭉한 배에 물을 가득 채워서 남산만하게 만든 다음 얘기했습니다. "잘봐, 이게 바로 네가 찾는 바로 그 물이란 거야." 그리고 입안 가득 물을 뿜어냈지요. 그러나 물을 찾는 그 물고기는 복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볼래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은 하얀색도 아니고 까만색도 아니고 푸른빛도 아닌 투명한 그 자체였기 때문이지요. 그 물고기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아니 내가 찾는 물은 이 세상 어디애도 없는거야."라고 말입니다. 불자라면 한 번쯤 "마음이란 무엇일까?'스스로에게 물어 봤을 것입니다. 물을 찾는 물고기처럼, 여기저기 다니면서 마음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질문도 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보면서 혹시 부처님의 경전에 마음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 하면서 열심히 읽고 웠던 기억은 없습니까?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로 부르고 시로도 쓰고. 참말로 마음을 찾고자하는 노력은 실로 눈물겨우리 만큼 여정이지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산사의 스님을 찾아 가서, "마음을 찾고자 왔습니다. 마음을 보여 주십시요." 하면 대게 스님들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마음의 문제는 뒷전에 두고, "보살님이 마음을 찾겠다고? 기도나 열심히 하시지 아니면 보살도를 더 닦아라." 등등의 대답을 들은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마음은 어떤 물건입니까? 그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기에 중생에서부터 보살 부처에 이르기까지 다 마음. 마음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음은 찾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자체로 있는 물건입니까? 불교(佛敎)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입니다. 부처님은 49년간 팔만사천의 가르침을 법문으로 남겨 두셨지요. 우리 민족의 보물인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을 한 번 보는데만도 8년에서 1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설법의 양에도 기가 탁 막히지만, 이렇게 많은 설법을 하셔야만 하셨던 석가모니부처님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어린 아기를 바라보는 애타는 엄마의 심정, 그리고 불빛을 쫓아서 쏜살같이 불꽃으로 날아들어서 타죽는 불나방을 바라보는 그런 심정 아니였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찾으란 가르침을 시종일관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神)이 되란 얘기도 아니고, 신의 노예가 되란 얘기도 아닙니다. 말 잘 들으면 천국(天國)을 선물로 주겠다는 가르침이 어디 있던가요? 물을 찾는 물고기의 교훈을 스스로 깨달으면 "마음이란?" 물음에 분명한 답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기 위해서 오신 자애로운 분이시지요.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으면 마음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안으로 돌이켜 봐야 마음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부메랑을 던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 듯. 지금 서있는 그곳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마십시요. 마음을 향하는 항해에 불자님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마음을 찾고 계십니까? (마음의 법칙 - 제 2 화는 : 一切唯心造 (콩 팥의 법칙)입니다 ) 눈이 내리면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나요? 내리는 눈을 보면서 생각하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어린이는 눈썰매와 눈사람을, 청춘의 남녀는 데이트의 설레임을,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서는 출근길의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같은 눈을 보면서 마음에 그리는 그림이 다 다릅니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 각각 다른 이 生覺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마음의 법칙 제 2 화 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얘기하고자 합니다. 일체유심조라니 무슨 말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다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다 지었다면, 산도 마음이 만들었고 바다와 하늘 비행기 애완강아지등등 우리가 보고 만지고 사용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히말라야 험한 설산도 아마존의 방대한 밀림도 북극의 거대한 빙하도 아니 지구밖의 끝없는 우주도 다 마음이 만들었다니, 황당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형체도 없고 빛깔도 없는 마음이 어떻게 이런 거대한 산하대지를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법화경에 보면,부처님이 중생과 이 세계의 수효를 말씀하시면서, 항하강(갠지즈강)의 모래수보다 더 많은 항하강이 있고 그 하나하나의 항하강 모래보다 더 많은 우주세계가 펼쳐져 있다고 하시자 2,000명의 아라한들이 일시에 퇴전해버립니다. 눈으로 볼 수없는 세계라고 함부로 말한다는 이유에서지요.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많은 세계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꿈 얘기를 한 번 하고자 합니다.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개꿈부터 시작해서 물 불 바람 동물 등 온갖 것이 꿈에 나옵니다. 꿈속에서도 칼에 베이면 아프고, 불에 데이면 뜨겁고, 홍수에 휘말려 발버둥치고, 강도에게 쫓기고, 술을 마시면 취하고,글을 쓰고 노래하고 울고 웃고 정말 현실과 꿈은 하나도 다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꿈꾸는 시간의 그 세계는 꿈을 깨고 보는 지금의 세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꾸는 꿈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이 현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속에도 산과 바다와 강과 도시와 자동차와 컴퓨터 등 다 있습니다. 마음이 다 지은 바라고 하니 꿈속에서 만들어진 그 세계도 마음이 창조한 세계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셨으니 그냥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내 스스로 확신이 설 때까지 믿는 것을 유보해야 하나요? 어쨌든 꿈속의 세계 역시 누군가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애시당초 꿈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꿈속의 창조주는 과연 누구일까요? 마음입니다. 각자가 꾸는 꿈은 각자의 마음이 만들어 펼쳐 놓은 능력의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펼쳐 놓은 꿈을 한 순간에 접을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을 펼치고 접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꿈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가 꿈을 꾸는데 꿈속의 장자가 또 꿈을 꾸더니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서 날아 갔습니다. 그래서 꿈꾸는 장자도 장자고 다시 꿈속에서 날아 가는 나비도 장자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장자가 자신의 마음의 능력으로 한 번 펼쳐 만든 나비였기에 그 나비는 바로 장자 자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꿈속의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 그러면 꿈을 깨고 보는 이 세계도 다 내 마음이 만든 것인가? 란 물음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신년송에 "내 마음이 다 만든 것이니 저 부산 오륙도를 나는 갈매기가 나고 내가 곧 갈매기다."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오륙도 위를 나는 저 갈매기가 나고 내가 저 갈매기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대목이 일체유심조를 옳게 보느냐 잘못 보느냐의 갈림길입니다. 다 마음이 지었다 는 말과, 내 마음이 다 지었다 는 말은 하늘땅으로 다른 소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꿈속에서 지은 것은 내 마음이 창조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지금 보고있는 이 세계는 내 마음이 다 만든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개개의 불성들이 각자의 능력과 인연으로 지은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니 갈매기는 스스로의 능력과 인연에 의해서 창조된 생명이지 내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일체유심조를 잘못 보고있다는 뜻입니다 장자의 꿈 나비와 오륙도의 갈매기가 이제 이해가 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眞理)입니다. 참된 이치라는 뜻입니다. 일사 만사에 한 터럭이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마음의 능력을 얘기했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코끼리 다리만지기'식으로 말하고 배우는 것에 까닭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지금 일체유심조를 말씀하신다면 이렇게 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일이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우리 속담에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다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민족의 삶에 얼마나 진하게 녹아 들어 갔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와 같은 말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업을 지으면 복을 받고, 악한 마음으로 업을 지으면 재앙을 받는다. 선과 악을 떠나서 짓는 과보는 공덕(功德)을 이룬다. ' 사람의 몸은 140조개의 細胞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細胞 하나하나가 다 生命이니 곧 140조개의 불성(佛性)이 모여서 이루어진 작은 宇宙인 셈이지요. 生命을 가진 存在들의 目標는 다 幸福입니다. 풀끝을 기어가는 애벌레도 더 나은 행복을 찾아서 가는 것이고, 풀 숲의 너구리도 행복해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추위속을 걷는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목표가 행복인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내 몸과 한 몸이 된 細胞들의 幸福指數가 달라지겠지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습니다. 나도 행복하고 내 세포들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해지는 삶이 불자의 삶 아닐까요?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알고나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것 입니다. -혜원- -결가부좌 명상도량/자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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