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讀禪) - 신심명 읽기 14. / 무사인
지금 머무는 곳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 아주 확실히 머물러라. 그곳은 육체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욕망도 아니고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다.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없는 곳에 확실히 머물러라. 그 머무름은 막힘 없는 통함이다. 장애물 하나 없이 확 트여 있지만, 어디로도 가지 않고 바로 지금 머무는 곳이다. 한 물건도 없어서 발 디딜 곳 없는 곳에 머무는 것이 영원한 안식처이다.
放之自然 놓아 버리면 본래 그러하니,
눈을 뜨면 앞이 보인다. 보통 눈을 뜨면 하나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고 초점을 맞춘 대상 이외의 시야에 있는 사물은 시야 속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이 때에는 무엇이 보이느냐에만 관심이 있어서, 보이는 대상만을 쫓아 다닌다. 이제 어느 사물에도 초점을 맞추지 말고 앞을 바라보라. 무엇을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앞의 광경이 모두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에는 다만 본다는 사실만이 변함 없는 진실일 뿐이다. 무엇이 보이느냐 하는 것은 관심 밖이다. 다만 본다는 사실만이 변함 없는 진실임을 확인하고나면, 무엇을 보더라도 이제는 보이는 대상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한결같이 보고 있는 변함 없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대상에 눈길을 멈추지 말라, 그러면 늘 변함 없는 스스로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體無去住 본바탕에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움직임과 머무름은 대상에 관한 일이다. 눈길을 주고 옮기고 함에 따라 머무름과 움직임이 번갈아 일어난다. 그러나 눈길을 한 대상에 고정시키고 있을 때나 다른 대상으로 옮길 때나 눈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눈을 열고 있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다만 보는 일이 있을 뿐이다. 보는 일에는 움직임과 머무름이 따로 없다. 바로 지금의 이 마음도 밝은 곳에서 눈을 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또렷하고 분명하여 어둡고 밝음이 따로 없다. 상쾌하면 상쾌한 그대로 또렷하고, 불쾌하면 불쾌한 그대로 또렷하고, 아프면 아픈 그대로 또렷하고, 피곤하면 피곤한 그대로 또렷하고, 졸리면 졸린 그대로 또렷하고, 화나면 화나는 그대로 또렷하다.
任性合道 본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니,
나타나는 경계 마다에 끄달려서 자유가 없는 것은 본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경계 마다 물리치고 일 없는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도 본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주시하고 있는 것도 본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고 신경쓰지 않는 것도 본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본성도 없고 맡기는 일도 없는 것이 본성에 맡기는 일이다. 본성을 찾지도 않고 맡기려고 애써지도 않지만, 어둡지 않고, 다른 것이 없고,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고, 언제나 또렷하여 결코 부정할 수 없고, 다른 것이 혹시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일어나지도 않고, 속이 편안하고, 흔들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우뚝 벗어나 방해받음이 없고, 보고 싶은 것도 없고, 찾고 싶은 것도 없고, 목말라 하는 것도 없고, 단단한 고체같이 요지부동한 것이 바로 본성이다.
逍遙絶惱(소요번뇌) 한가히 거닐면서 번뇌가 끊어졌네.
늘 무슨 일을 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늘 수많은 것들을 보고 있지만, 한결같이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 마치 화가가 온갖 그림을 그려내지만 한결같이 하나의 손을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늘 온갖 감각과 두뇌를 사용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이 하나만 사용하고 있다. 늘 온갖 장소에 다니고 있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다. 늘 움직이고 있지만, 한결같이 이 자리일 뿐이다. 늘 온갖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한 생각도 한 적이 없다.
진리를 말하지도 않고 허위를 말하지도 않는다. 한결같이 바로 이 자리 뿐이므로 다른 일이 없고, 다른 일이 없으므로 한가하고 힘들지가 않고, 한가하고 힘들지 않으므로 번뇌 없이 편안하고, 번뇌 없이 편안하므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므로 달리 찾는 것이 없다.
繫念乖眞(계념괴진)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과 어긋나,
산들바람 부는 날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숫가에 서서 호수의 물을 바라보라.
물결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밀려 가고 또 밀려 간다. 일어나 밀려가 없어지고 일어나 밀려가 없어지고 하는 물결은 끝이 없다. 끝 없이 일어나 밀려가 없어지는 물결을 따라 눈길도 끝 없이 따라 다닌다. 새로 일어나는 물결에 눈길이 가고 물결을 따라 가다가 물결이 사라지면 다시 새로 일어나는 물결에 눈길이 간다.
호수는 온통 생멸하며 출렁이는 물결로 가득차 있다. 눈 가득히 보이는 것은 물결뿐이다. 그렇게 하염 없이 보고 있는 어느 순간, 그렇게 끊임 없이 일어나 밀려가 사라지는 물결에도 불구하고, 물결은 언제나 변함 없이 그 자리에서 그렇게 출렁이고 있을 뿐임을 문득 알아차린다. 일어나 사라지는 물결은 눈속임이고, 언제나 변함 없는 물이 있을 뿐이다.
昏沈不好(혼침불호) 어두움에 빠져서 좋지 않다.
육체의 눈은 빛이 있으면 밝게 보고, 빛이 없으면 어두워서 보지 못한다. 보기도 하고 보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보는 경우에도 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어서 차별이 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빛이 있어도 보고 빛이 없어도 본다. 마음의 눈은 언제나 보고 있을 뿐, 보지 못하는 어둠이 없다.
육체의 귀는 소리가 나면 듣고 소리가 나지 않으면 듣지 못한다. 듣는 경우에도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차별하여 듣는다. 그러나 마음의 귀는 소리가 나도 듣고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듣는다. 마음의 귀는 언제나 듣고 있을 뿐,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의 귀를 열면,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고 듣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어둠이 그대로 밝음이니 어둠에 빠질 수가 없는 것이다.
- 계속
* 무사인님의 신심명 나머지 해설은 저의 까페http://cafe.daum.net/yourhappyhouse <기원 발심 수행>방에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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