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물학으로 풀어본 우리 몸의 비밀 ]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든 것이다
〈13〉울긋불긋하고 기기묘묘한 생명의 모습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의 세계는 참으로 다채롭고 다양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찾사’의 ‘사계’에서 노래하듯이 빨주노초파남보, 온갖 색깔의 꽃과 곤충들이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모양도 가지가지다. 민들레, 장미, 벚꽃, 수선화, 개나리, 채송화 … 잠자리, 무당벌레, 개미, 사슴벌레 ….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속담에서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지만, 생명의 세계에는 ‘뛰는 놈’과 ‘나는 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는 놈’도 있고 ‘헤엄치는 놈’도 있다. 먹이를 쫓는 사자와 도망치는 사슴은 뛰는 놈들이지만, 지렁이와 두꺼비는 기고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친다.
이런 생명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조물주’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생각을 ‘사견(邪見)’이라고 부른다. ‘그릇된 세계관’이란 뜻이다. 이런 생각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 발행한 것이다.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연기(緣起)’한 것이다.
무엇이든 ‘만든 것’이라는 생각은 ‘만들지 않은 것’과 비교할 때 떠오른다. 잘 빚은 만두는 ‘만든 것’이지만, 밀가루는 ‘만들기 전의 것’이다. 째깍거리는 시계는 ‘만든 것’이지만, 그 재료가 되는 철광석은 ‘만들기 전의 것’이다. ‘만든 것’은 무언가 다르다. ‘인공적(人工的: artificial) 느낌’이 든다.
시점·거리에 따라 화려하고 밋밋하고
세상 모든 존재는 결국 연기의 결과물
사막 한 가운데에 붉은 선인장 꽃이 피었다. 참으로 화려하고 신비롭기에 ‘인공적인 느낌’이 든다. 누군가 조물주가 있어서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인공적인 느낌’은 ‘배경’과 ‘주제’를 바라보는 시점(視點)의 차이로 인해서 일어나는 착각일 뿐이다.
밋밋한 모래사막이 ‘배경’이 되었기에 ‘주제’인 선인장이 ‘인공적’으로 보일 뿐이다. 모래사막은 무수한 모래알들이 모여서 이루어져 있다. 그 모래알 하나하나 역시 현미경을 통해 보면 ‘붉은 선인장’ 만큼 신비롭고 화려하다.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더욱 휘황찬란하다. 밋밋했던 밀가루와 철광석도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수많은 분자들이 얽혀 있는 웅장한 건조물이다. 이와 반대로 기묘한 꽃들이 가득한 꽃밭도 멀리서 바라보면 밋밋한 색깔 덩어리일 뿐, 화려하거나 신비로울 것도 없다. 사람들 역시 그 모습이 제각각이지만, 멀리서 본 군중은 ‘개미떼’같이 꼬물거리는 밋밋한 덩어리일 뿐이다.
어떤 방에 들어갔을 때, 그 방이 “크다”고 생각되는 것은 ‘작은 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염두에 두었던 작은 방과 비교하여 눈앞의 방을 크다고 보는 것이다. 동굴 속이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따뜻하다.
동굴 속의 온도는 변함없지만, 동굴 밖 온도와 비교를 통해서 ‘시원함’이나 ‘따뜻함’의 의미가 발생한다. 연기(緣起)한 것이다. ‘인공적이라거나 화려하다거나 신비롭다는 느낌’ 역시 실재에 대한 느낌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생각이 만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보는 시점과 거리에 따라 화려해지기도 하고 밋밋해지기도 한다. 초점과 거리를 적당히 맞추면 모든 것이 하나하나 화려하고 신비롭고 인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화려하다면 특별히 화려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신비롭다면 특별히 신비로울 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조물주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이다.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불교신문 2812호/ 4월28일자]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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