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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크릿/인과응보/업/일체유심조 - - 행복 (3)

장백산-1 2013. 6. 15. 15:43

 

 

[법상스님 일요법회 녹취] (3.24)"幸福"(3) " 因果應報, 業, 一切唯心造 |설법 녹취록

인본 | | 조회 12 |추천 0 | 2013.06.15. 04:46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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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어제도 보니까 날씨가 아주 완전히 봄 날씨를 되찾은 거 같습니다. 이제 우리 법당도 아마 들어오는 입구가 벚꽃이 만발하지 않을까? 어제 어딘가를 지나가는데, 벚꽃엔딩이라고 하는 거, BuskerBusker버스커버스커라는 가수가 부르던 노래가 나오는데, ~ 우리 호국사 들어오는 입구에 벚꽃이 다 만발하고 떨어지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이게 막 가슴 떨리고 빨리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부터 아마 한 달 전후해가지고 좀 아름다운 곳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자기마음속에 아름다운 것들을 담고 있으면, 세상을 보는 어떤 사물을 볼 때 事物을 보는 觀点이 自己 마음 안에 어떤 필터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解釋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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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하면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경우는 취약하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아주 좋은 상황처럼 여겨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여겨지는 것뿐이지, 그 사람에게 여겨지는 것일 뿐이지, 事實은 이 世上의 모든 것은 恒常 中立的이라고 그러죠. 中立的이고 中道的입니다. 어떤 좋은 境界나 나쁜 境界가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좋고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世上에 없다는 거죠. 언제나 自然스럽고 그러한 일이 그렇고 그러한 일이, 如如한 일이, 언제나 한결같이 自然스럽게 펼쳐지고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고 갈 뿐이다. 장마가 되면 단지 비가 올 뿐인데 사람들은 비가 와서 어떻다. 안 좋다. 좋다 나쁘다. 이렇게 分別하는 生覺을 하고 解釋을 할 뿐이고, 또 눈이 내리면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또 아주 싫다. 하는 사람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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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모든 狀況이 마찬가지라는 거죠. 예를 들어 한 30年 어떤 하나의 職場을 가지고 있다가 그 職場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그것은 그냥 自然스럽게 어느 길이든 山을 갈 때도 길을 가다가 다른 길이 나오면 둘 중에 自然스럽게 選擇되어서 가야 되잖아요. 예를 들어 강은 이렇게 개울물이 이렇게 내려오다가 두 갈래 길이 나오면 고민하지 않죠. 그냥 自然스러운 흐름에 내맡기고 흐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 맡기고 흐를 뿐이니까, 因緣 따라 흐르니까 아무런 힘을 줄 필요도 없고 計算할 필요도 없고 여기는 좋은 길이고 저긴 나쁜 길이라고 分別할 필요도 없이 그냥 힘을 배고 그냥 흐를 뿐입니다. 우리 인생도 사실은 어떤 한 가지 길을 가다가 다른 길로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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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成功이거나 失敗라는 건 우리 머리로 그냥 生覺하는 것이고, 또 내가 좋다 나쁘다는 건 내 머리로 그렇게 生覺할 뿐이지 事實은 그냥 自然스러운, 또 다른 길로 그냥 가고 있을 뿐인 거죠. 이 世上은 恒常 그렇게 새로운 어떤 삶의 可能性을 向해서 그냥 마음을 활짝 열고 거부하는 마음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自然스러운 흐름에 따라 내 맡기고 흐를 때 우리 마음은 괴로워질 일이 없겠죠. 그런데 이제 우리는 거기 좋거나 나쁘다는 分別을 恒常 하고 있고, 分別의 필터를 우리 안에 딱 內裝시켜 놓고 있는 거죠. 장착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든 좀 否定的인 生覺을 많이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보더라도 계속 투덜거리죠. 좋은 걸 봐도 투덜거리고 辱을 하고 나쁘게 해석을 하고, 그 사람 안에는 어떤 필터가 좀 어둡고 濁한 필터가 이게 딱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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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좀 좋은 걸 봐도 별고 안 좋아 보이는 거에요. 잘하는 사람을 봐도 박수쳐줄 마음이 안 나고 질투와 좀

기분 나쁘고 야~ 저 사람은 저렇게 잘되니까 나는 상대적으로 박탈감 같은 걸 느끼게 되고, 그래서 동일한 상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나쁘게 보는 거죠. 자기 안에 어떻게 보는 것이 담겨 있느냐? 이거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필터가 아름다울 때 내가 점점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때 더 重要한 事實은 내가 보는 觀点대로 世上은 나에게 펼쳐지고 創造되어서 나에게 다가온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이제 또 한 가지가 아~ 나와 지난번에 이거 했었나요? 여기 파란색 읽어봤었죠? . 지난번에 이 부분까지 한거 같은데, 상대방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을 내가 경험한다고 했고, 상대방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의 미래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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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相對方에게 좀 막 다그치고, 힘들게 하고 괴롭혔다. 그러면 내가 내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다그침을 당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게 왜 그런가 하면 緣起法的으로 우리는 同體 大悲적으로 同體的으로 우리는 온 宇宙가 全部 다 連結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와 타인이라는 존재는 서로 連結되어 있는 '하나'라는 겁니다. 서로 나눠지는 存在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이고, 남의 가족은 남의 가족이다. 그렇게 生覺을 하다보니까 내 가족만, 나만 부자가 되고 행복해야 된다는 生覺을 하고 다른 사람의 幸福에는 그렇게 큰 關心이 없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의 삶의 方式은 전혀 우리와 다른 점은 뭐냐 하면

나와 너의 差別이 分別이 完全히 다 끊어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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例를 들어 내 자식, 내 아버지, 내 누이, 내 동생이라는 觀念에서 온 宇宙全切에 遍滿해지는 槪念으로 바뀌는 거죠. 울타리가 깨어지는 겁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나라는 자아라는 울타리가 完全히 깨어지고, 온 宇宙全切에 있는 모든 存在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형이 되고, 누이가 되고, 또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은 동생이 되고,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손자가 되고, 요렇게 바뀐다는 거죠. 그래서 이 事實을 안다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事實을 안다면 내가 相對方에게 무엇을 行하느냐? 그것이 바로 내가 내 人生에서 받을 일을 決定한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에게 어떤 方式으로 상대방과 關係를 맺느냐? 그것이 내가 내 未未卽 내가 나 自身과 어떻게 關係를 맺는지. 내 未來를 어떻게 가꾸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단적인 例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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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相對에게 幸福을 經驗하게 해주면 내가 幸福을 經驗하겠죠. 反對로 내가 상대에게 苦痛을 경험하게 해주면 내가 내 인생에서 苦痛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쉽게 그냥 - + 에너지라고 한다면 辱을 하거나 남들을 한 대 瀑行을 하거나 갈구거나 무시하거나 소외시키거나 그러면 同一한 것이 내 人生에 벌어지는 거죠. 내가 누군가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폭행을 당하고, 강금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소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거죠. 反對로 내가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상대방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뭔가 자꾸 나눠주고 베풂으로서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나로 因해서 아~ 풍요를 경험하는 사람, , 그 사람 배가 고픈데 나로 인해서 주림을 채우게 됐어요. 내가 딴 사람의 주림을 채워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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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언젠가 이 宇宙法界로부터 내가 주림을 당할 때 그 주림을 채워지게 되는 果報를 받는 거죠. 그래서 이를테면 大衆供養. 많은 사람에게 먹을 걸 베풀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먹는 거로 궁핍할 일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내가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은 方式으로 決定이 된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은 사랑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고, 또 칭찬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칭찬해요. 하는 방식이 아주 너무나도 좋죠. 그런데도 상당히 칭찬에 인색하잖아요. 사람들은 자기자랑을 하기를 너무나도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자랑할 때 칭찬해주는 것은 못하거든요. 왜냐하면 자기 자랑하는 사람 보면 재수가 없으니까. 보기 싫으니까 꼴 보기가 좀 싫고, 나보다 자기 잘났다는 얘기를 자꾸 하는 거 같으니까 그 얘기만 들으면 빨리 넘기고 싶은 거예요. 다른 얘기로. 그걸 자꾸 이렇게 해주면 저 사람만 너무 뜨니까. 그런데 저 사람이 너무 뜬다는 것은 곧 내가 나라는 我相이 縮小된다는 걸 同時에 意味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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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은 우리 我相으로 봤을 때 그런 거죠. 眞理로 봤을 때는 相對方이 自己 자랑할 때 이게 機會입니다. ~ 크게 福지을 수 있는 좋은 機會라는 거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찬탄의 공덕. 華嚴經에서도 내가 행복한 마음으로 眞心으로 찬탄해주면 그 功德이 내 功德이 된다. 이럽니다. 내가 로또 당첨된 사람을 박수쳐주면, 부러워할게 아니라 박수쳐주면 내가 그 만큼 풍요로움을 언젠가는 내가 받을 수 있게 되죠. 그러니까 불교는 神奇한 것이 物質的으로 實際 그 돈을 내것으로 만들어야지만 富者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物質的으로 豊饒로워졌을 때 그걸 眞心으로 축하해줘도, 그 物質이 나에게 올 수 있는 因緣을 심은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게 이제 마음의 功德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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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로 實際 그 돈을 벌어야지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 돈에 대해서 祝賀해주고 稱讚해주고 찬탄해주는데도 그 福德이 나에게 同一하게 주어진다. 이게 아주 놀라운 겁니다. 남들이 좋은 일할 때 손가락질 할게 아니라. 그래. 니 잘났다 할 게 아니라 그거를 한번 박수쳐주는 것이 우리에게 거저, 거저로 福을 지을 수 있는. 그러니까 남들이 보기 싫을 때 찬탄해주는 것만으로도 同一한 福을 그냥 거저로 지을 수 있는 아주 좋은 機會가 되고 契機가 되는 거죠. 이거 映像 봤습니까? 안 봤죠? 이 영상을 틀어주려고 틀었더니 장병들 병장들이나 우리 신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場面을 딱 틀어줬더니 장래가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우와~ 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이게 왜 이거가지고 이렇게 좋아하지? 이게 그렇게 좋은 얘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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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이랬더니 이 영상을 틀자마자 에이하고 인상을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봤더니 시크릿이 애들이 생각하는 걸 그룹 시그릿인 줄 알고 걸 그룹 생각하는 줄 알고 신나했다가 갑자기 인상을 쓰더라고요. 이왕 잠깐 보겠습니다.(....)

이러한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크릿이라는 책과 영화가 아주 세계적으로 엄청난 선풍적인 인기를 확~ 휘몰아치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 內容을 보면 쉽게 말해서 끌어당김의 법칙. 다시 말해서 내가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어떤 生覺과 行動을 이 世上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相對方에게로 내보냈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무엇이 끌어당겨질지가 全的으로 決定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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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自身의 삶은 全的으로 自己 自身이 만들어내고 創造해 나가는 것이라는 어떤 華嚴經의 一切唯心造의 가르침. 혹은 阿含經에서 말하는 因果應報. 業因果報의 法則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거창하게 그동안 우리가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少數의 어떤 智慧로운 賢者들, 聖人들에게만 알려졌던 人類의 어떤 偉大한 遺産과도 같은 公開되지 않았던 秘密을 이제 여러분에게 公開한다. 하면서 거창하게 이렇게 했단 말이죠. 實際로 이것이 상당한 어떤 商業的인 效果도 걷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떤 東洋的인 思考方式이나 불교적 觀点에서 봤을 때 이것은 너무나도 當然하고도 아주 單純한 어떤 불교로 말하면 아함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因果業報의 아주 단순한 가르침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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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많은 人氣를 불교이렇게 해서 얘기하니까 그렇게 큰 人氣를 못 끌다가 시크릿이러니까 솔깃하게 된 理由 중에 하나가 여기서는 보세요. 우리가 생각행동을 世上으로  내보내면 必然的으로 생각행동을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들어올게 決定이 됩니다. 그런데 불교는 무엇을 내보느냐가 重要하잖아요. 어떤 業을 짓느냐가 重要하죠. 業이라는 것은 行爲를 意味합니다 말로 하는 行爲. 生覺으로 하는 行爲. 또 行動으로 하는 行爲인데, 어떤 行爲을 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業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果報가 決定되니까 果報는 우리가 生覺할 바가 없어요. 어떤 業을 짓느냐에 따라서 짓기만 하면 行爲는 오는 거니까. 그러니까 불교에선 끊임없이 自己 自身을 變化시키라고 합니다. 自己 自身이 좋은 業을 짓고 좋은 修行을 닦아서 어떻게 삶을 變化시켜야 된다라고 얘기를 해요卽 나의 變化에 焦点을 맞춰서 얘기를 했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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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거 關心이 없는 겁니다. 자꾸 불교가니까 나보고 變하라고 자꾸 그러고. 나는 富者가 되고 싶은 結果를 얻고 싶은데. 야 부자가 되고 싶은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그만큼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스스로 마음으 평화롭게 쓰고 행복하고 부자라는 마음으로 작은 거가지고 감사하게 살줄 알아야 네가 부자가 되는 거지. 하면서 現在의 그 自身의 삶에 焦点이 맞춰지니까 一般人들의 關心을 못 갖는 겁니다. ~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確信을 먼저 줘야 된다 이거죠. 그런데 끌어당김의 법칙은 먼저 네가 어떻게 바뀌어라. 이 얘기보다도 일단 부자가 될 수 있다.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모든 것이든 다 얻을 수가 있다. 그게 바로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이 끌어당김의 법칙만 알면 願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하고 아주 希望的인 結果的인 이것을 얘기해준다는 거죠.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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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깊이 들어가면 어떻게 생각행동을 바꾸는지를 얘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겐 더 솔깃한 거죠. 나를 바꿔라. 이거보다 야~ 넌 부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그래서 더 많은 人氣를 끌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끌어당김의 法則이 바로 因果應報의 法則을 얘기합니다. 卽, 내가 어떤 原因을 이 世上에 提供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必然的인 結果를 끌어당겨지게 된다. 業의 따른 그 果報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業報의 法則이 바로 業을 지으면 自然스럽게 뭐가 따라오는 거잖아요. 끌어당겨지잖아요. 그래서 여기서는 다른 말로 끌어당김의 法則이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의 人生에 나타나는 모든 現狀은 당신이 끌어당긴 것이다. 마음에 어떤 生覺이 일어나든지 바로 그 生覺한 것이 당신에게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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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제 불교에서도 아주 그 뭐랄까, , 위대한 우리는 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몸으로 행동했으니까 거기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게 당연하다라고 認定하고 믿고 있고요. 로 하는 것도 아~ 그 結果가 올 수 있겠구나. 認定이 어느 정도 됩니다. 그런데 生覺으로 한 것조차도 結果로 나타날까? 내가 生覺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데. 아무도 저 사람이 어떤 生覺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結果로 나타나지? 그게 어떤 實際的인 어떤 을 가지고 決定的인 物理的인 現狀世界를 創造한다는 게 말이 되나? 이렇게 生覺한다는 거죠. 現代 科學에서도 밝혀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卽 모든 細胞 電子 原子 그 根源的인 波動은 그냥 波動의 狀態로만 無限한 可能性의 狀態로만 存在한다는 거죠卽 粒子와 波動으로 이 世上이 이루어져있는데, 事實은 粒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波動의 狀態로 언제나 어디서나 存在하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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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波動하는 에너지의 狀態로만 存在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 에너지 狀態로 存在하는 것이 이것도 粒子잖아요. 物質이잖아요. 모든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物質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物質처럼 보이지만, 事實은 粒子의 波動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런데 波動이 粒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아주 單純하다는 겁니다. 내가 意圖를 일으켰을 때, 意圖를 일으켰을 때 意志를 내 마음을 일으켰을 때 한 生覺을 딱 일으켰을 때 그 瞬間 그 에너지 波動이 粒子化 되는 거에요. 物質化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그 어떤 聖人들이나 이런 가르침들을 보다보면 때때로 그런 게 나와요. 物化라고 그러나? 예를 들어 空中에서 物顯을 시킵니다, 物質을. 예를 들어 寶石을 虛空에서  만들어낸다든가, 物顯을 시키는 場面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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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떤 多樣한 어떤 그 神通自在한 것들이 나오는데 언뜻 느끼기에는 저게 말이 되나 싶지만, 事實은 原則에서 본다면 그것이 可能한 겁니다. 내 意志가 내 意識이 그 現實을 實際 끌어당기고 創造하는 것인 삶의 事實은 基本 原則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生覺,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그대로 내 삶의 現實을 고스란히 創造해냅니다. 아주 무섭고도 危險한 거죠. 우리 生覺이. 그러니까 좀 나쁜 想像을 많이 하거나 나쁜 映畵를 좋아하거나 瀑力的인 映畵를 좋아하거나 이런 좀 나쁜 記事에 이렇게 솔깃솔깃하는 사람이라면 한 生覺 좀 돌이켜 봐야 되죠.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나쁜 뉴스나 나쁜 폭력적인 영화나 이런 걸 자꾸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닮게 되어 있어요. 배우게 되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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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면 좋은 뉴스거리. 좋은 이야기, 사람을 만나도 자꾸 좋은 사람 만나고, 이렇게 절에서 좋은 道伴 만나고, 부처님 工夫하는 이야기 거리 나누고. 그렇게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全切 에너지를 저절로 함께 共鳴이 되는 겁니다. 저절로 닮아가는 거죠. 내 에너지 波長이 주변과 共調를 同調를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자주자주 절에 다니고 자주자주 마음공부 수행 밝은 것에 마음을 쓰게 되면 저절로 내 안의 모든 波長 하나하나가 그리로 닮아가게 마련이죠. 그래서 마음도 아주 아름답게 쓰게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야기를 했어요. 나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强調되고 두려워하거나 崇拜 되는 生覺은 어떤 것이든지 그 卽時 利用 可能한 가장 便利하고 適節한 物理的인

形態로 스스로 옷을 걸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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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강조되고 있던 生覺들, 심지어 두려워하거나 숭배되는 生覺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몸이 좀 안 좋아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한번 된통 아팠었거든요. 큰 病을 한번 걸렸었다가 이제 다 나았습니다. 完全히 나았다고 病院에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以後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거에요. 그냥 지나가다가 기침한번 할 수 있는데 그냥 기침한번 한걸 가지고 어, 또 병이 오는 거 아닌가? 하고 두려움에 떨어요. 끊임없이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겁니다. 언젠가 나에게 병이 올 거 같고.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들이 조금만 아파도, 조금만 기침을 해도 바로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거에요. 아프면 큰일 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 강박관념이 너무 커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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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한 生覺에 딱 두려움에 사로잡히니까 그때부터 그 아이들은 하여간 틈만 나면 病院에 가 있는 거에요. 집에 있는 거보다 병원에 가 있는 날이 더 많고. 사실은 병원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병원에 보내고. 그러니까 그것이 두려움의 어떤 現狀이거든요. 그렇게 두려워하니까 病을 두려워하니까 나도 모르게 내 자식이 病院에 가 있는 物質化 現狀이 저절로 저절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은요, 現實化되기가 쉽습니다. ? 우리는 마음속에 오래 머물면서 强調되는 것이 現實로 나타나는 거예요. 倫理的인 것과는 相關이 없습니다卽 마음속에 좋은 것을 想像하든 나쁜 것을 想像하든. 좋은 것을 오래 가지고 있든 나쁜 것을 오래 가지고 있든. 마음속에 오래 가지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現實化 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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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게 얼마나 强力한 에너지입니까? 나쁜 쪽으로 강력한 에너지잖아요. 강력하게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 그것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안 먹어야 된다. 거식증에 걸린 사람들이 살찔까봐 두려워해서 안 먹으려고, 거식증에 걸린 사람이 안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안 먹고 안 먹고 안 먹고 안 먹고 하다가 結局에는 巨食症이 瀑食症으로 바뀌는 理由가 에너지가 너무 한쪽으로 두려움 쪽으로 치우쳐 있으니까 그게 均衡을 맞추기 위해서 갑자기 다른 에너지로 확~ 바뀌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두려워하는 에너지가 오히려 거꾸로 그 반대되는 것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내 인생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하고 두려워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두려움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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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내려놓는 가장 빠른 方法은 그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直視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두려움이 생겼을 때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를 怨望하지 않고 너는 또 이 모양이냐? 또 그 두려움을 가지고 生覺하고 있는 거야? 넌 이거밖에 안 되라고 다그치지 않고 許容해 주는 겁니다. ‘, 내 안에 이런 두려움이 있구나.’ 하고 認定하고 許容해주는 거에요. ‘그래.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면서 慈悲로운 마음으로 다독여주는 겁니다. ‘, 네가 이렇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또 드러났구나. 내안에 이렇게 두려운 마음으로 얼마나 안쓰럽고 측은한지 모르겠구나.’하고 그것을 그대로 認定해 주는 겁니다. ‘괜찮아. 괜찮아. 왔다가 네가 있고 싶을 때까지 있다가 그게 갈 때 가도록 내가 許容할게. 있을 만큼 있어라.’ 그렇게 내버려두는 거에요. 바라보고 觀察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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卽 觀한다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判斷 없이 觀察한다는 것은 곧 智慧를 意味하고요,

괜찮아 괜찮아하고 있을 만큼 있다가 가고 싶을 때 가하는 것은 受容하는 것을 意味하고요,

그리고 이걸 辱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넌 이거밖에 안 되는 놈이야?” 하고 따지지 않고 괜찮아.”하고 얘기해 주는 거, 이게 바로 慈悲를 意味하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 이러한 어떤 지혜와 자비의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대하게 됐을 때 그 두려움이 놀랍게도 빠르게 消滅되는 거죠. 자기 안에 있는. 그러니까 그런 現實이 이제 創造되지 않겠죠. 두려운 現實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强調되는 生覺, 그런 것들이 現實이 된다는 거죠. 崇拜 되는 生覺, 執着 같은 것들, 어디 强하게 執着되어 있는 部分들, 그 部分들이 오히려 그런 現實을 자꾸 불러오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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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잭 캔필드 라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宇宙에서 가장 强力한 法則이며, 重力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作動하는 법칙이다. 우리는 宇宙萬物과 神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그러한 連結은 끊을 래야 끊을 수가 없고, 이게 바로 緣起法을 얘기하죠. 相依相關的인 宇宙가 宇宙에 보낸 生覺과 에너지는 거울처럼 그에 相應하는 經驗과 事物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내가 宇宙로 내 보낸 生覺과 에너지는 거울처럼, 그에 相應하는 經驗과 現實 事物을 우리에게 되돌려 줍니다. 이렇게 끌어당김의 법칙은 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이야기를 했어요. 힌두교 신비주의 불교 유대교 그리스토교 이슬람교 고대 바빌론 어떤 문명에서 이집트문명에서까지도 이런 이야기들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거죠. 즉 이 얘기는 이 眞理의 어떤 일부분은요, 어느 한군데만 制限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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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도 眞理는 드러날 수가 있죠. 요즘의 어떤 社會처럼 社會 各 部門部分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眞理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그죠? 섹스피어라든가 베토벤이나 소크라테스도 그랬고 플라톤이나 에머슨, 피타고라스, 뉴턴, 괴테. 이런 사람들의 어떤 思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거죠. 또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을 끌어당긴다는 어찌 보면 類類相從의 法則도 같은 意味입니다. 또 캐서린 펀더는 자신이 당신이 生覺과 感情과 마음속 그림과 말을 通해 外部世界로 發散하는 모든 것이 당신 삶에 그대로 되돌아 온다고 이야기를 했고, 또 레이먼드 홀리 월 박사는 願하는 바를 끊임없이 生覺하면 그것은 必然的으로 당신에게 다가온다. 生覺은 磁石과 같아서 그것의 支配力에 反應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긴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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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살아있는 磁石이다. 당신의 生覺에 어울리는 사람과 事件과 狀況과 環境이 당신의 삶으로 自然스럽게 끌려오기 때문이다. 生覺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삶에 實際로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잠깐 영상 보겠습니다. (...)

集中을 하고 또 肯定的이고 밝은 面을 내 안에서 자꾸 演習을 했을 때 그러한 現實이 다가온다. 예를 들어 나를 괴롭히던 직장상사가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면서 계속 이 사람이 떠나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라면, 어디 좀 멀리 가든가. 어디 좀 다치던가. 이 사람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싫은 쪽으로 계속 에너지를 보내면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에너지가 내 안에 쌓이잖아요. 자꾸 미워하는 에너지가 쌓이니까 그런 않좋은 現實이 오히려 더 내 삶에 다가올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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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속에서 演習하는 것이 미움을 演習하니까. 그 미울 수밖에 없는 狀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더 괴롭히고, 나를 더 미워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아예 그런 것에 대한 生覺을 탁 내려놓고 오히려 내가 願하는 에너지, 어떤 肯定的이고 밝고 아주 아름다운 모습들. 그러니까 어차피 이 世上은 解釋의 問題라고 말씀드렸어요. 中立的인 世上에 내가 어떻게 意味附與 하느냐에 따라서 意味附與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아주 밝고 肯定的이고 이런 어떤 좋은 쪽으로 解釋을 삶에 對한 解釋을 하게 되면 그런 現實이 진짜로 끌어당겨진다는 거죠. 生覺지도 못하게 나를 정말 괴롭히던 사람이 갑자기 내가 개가천선 했다거나. 갑자기 그 사람이 딴 데로 轉勤을 가게 됐다거나. 이런 일이 實際로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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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어떤 의학의 스승 같은 대체의학의 신같은 분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病이 확 낫는 경우도 있어요. 그 만큼 因緣이 되어야 만나잖아요. 그런 것들 또한 因緣이 들어올 수 있는 거죠. 활짝 열어놔야죠. 우리가 예를 들어 몸이 아플 때 아픈 거 자꾸 얘기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자꾸 많은 사람에게 얘기해야 된다고 그러잖아요. 그 말이 아프다고 해서 혼자 두려워하면서 끙끙 앓고 있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가슴을 이 세상을 향해서 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활짝 열려서 내가 아픈 부분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 그런 거 여기가면 좋다더라. 저기 가면 좋다더라. 얘기하다보면 또 정말 좋은 因緣을 만나서 또 치료할 수 있는 또 좋은 因緣도 만들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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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 宇宙를 向해 우리가 가슴을 열어서 나를 制限시키지 않고 활짝 열고만 있어도 世上에서, 이 宇宙 法界에서 나를 도와주기 始作한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實際로 物質的인 現狀世界가 내 마음 하나 바뀜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남편이나 자식을 바꾸려고 그 학교를 바꾸려고 막 기를 쓸 필요가 없다는 거죠. 내 자신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서 내 意識의 水準만큼의 世上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마음, 내 마음이 어떤 것을 많이 보고, 어떤 것에 集中하고, 어떤 것이 내 마음 안에 오래 머물러 있는지. 否定的인 에너지가 많이 머물러 있는지. 肯定的인 에너지가 많이 머물러 있는지. 그런 것들을 잘 觀察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 삶을 정말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重要한 課題일 겁니다. ~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고 이제 이것이 부처님의 業과 輪回에 關聯된 어떤 가르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음에 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成佛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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