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 不守自性隨緣成

장백산-1 2013. 7. 7. 19:26

 

제6구 不守自性隨緣成

 
 
自性을 지키지 않고 因緣따라 이루네
 
모든 法들은 지킬 자성(自性)이 따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關系) 속에서 스스로 끊임 없이 變化하고 있습니다.
변화(變化)가 自性입니다.
變化와 부동(不動),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 있는 한 場面이
공성(空性)의 場,
무자성(無自性)의 場입니다.
 
 
空性의 장(場), 수연(隨緣)의 텅~빈 모습
 
지금까지 다섯 게송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미 이 게송의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연기실상(緣起實相)의 뜻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生함으로 저것이 生하며,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滅함으로 저것이 滅한다

[此故彼有 此故彼生 此故彼無 此故彼滅]'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存在의 有無나 生滅은 存在 그 自體로서 結定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依存關係로부터 發生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全的으로 저것의 原因이면서 同時에 저것을 原因으로 하는 結果입니다.
 
때문에 모든 法들은 條件의 變化에 依해서 多樣한 모습으로 나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과 사물들의 이와 같은 自己 나툼은 相互 依存關係의 條件만큼이나 多樣한 얼굴로 나타납니다.
 
앞의 게송에서 法性의 不動性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時空 밖에 있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時空은 變化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지만, 時空 밖에 있는 不動도 變化의 이면(裏面)이나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變化 그 自體가 實은 不動이기에 變化가 있을 수 있다고도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서의 부동성(不動性)을 무자성(無自性), 곧 自性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며 不動性 그대로 變化의 움직임을 '因緣을 따른다[隨緣]'고 할 수 있습니다. 단 變化의 因緣을 따름이란 多樣한 이것과 저것의 關係 속의 條件 變化를 뜻하고 있는데, 이것과 저것의 근본실상(根本實相)이 무상무아(無相無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저것의 無常無我라는 뜻은, 知覺作用은 自己對相을 一定한 틀 속에 가두고서 아는 것인 데 反하여, 좌선삼매(坐禪三昧)를 通해서 바로 알아차리는 삶의 根據는 단 한 瞬間도 紙覺된 內容처럼 停止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事物들을 停止된 모습으로 把握하고 一定한 틀을 通해서 認識하면서 갖게 되는 아상(我相)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음을 깊은 洞察로 如實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 我相이 끊어진 자리에서

無我와 無相인 時空의 본디 모습을 알게 되니 이를 연기법(緣起法), 공(空), 진여(眞如)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自性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法들은 지킬 自性이 따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關係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 없이 變化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變化이기 때문에 지킬 自性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禪)에서 知覺을 通한 사유(思惟)로나 言語表現을 通해서 變化를 알아차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온갖 法들의 變化와 이를 가리키는 '變化'라는 말은 相互 矛盾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變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知覺과 言語는 限定되고 停止된 時空의 領域만을 알아차리고 表現할 뿐, 삶의 實相을 理解하는 것이 아니라 知覺과 言語의 再生産만을 합니다. 더구나 變化란 恒常 부동(不動) 그 自體의 變化이기 때문에 더더욱 言語나 生覺으로 알 수 있는 對相이 아닙니다.
 
여기서 因緣을 따른다고 했을 때, 因緣, 곧 條件들의 變化를 따르는 또다른 軸의 自性이나 條件의 裏面에

빈 모습으로 存在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자성(自性)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因緣條件을 따르는 것으로

無自性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 있는 한 場面만이 공성(空性)의 장(場), 無自性의 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法性의 不動을 노래한 몇 구절을 이어받아서 뒤에 나오는 이것과 저것들의 關係를 華嚴에서 포착하여 이야기하는 緣起의 兩面인 상입(相入)과 상득(相卽)의 關係 설정을 豫告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인연을 따른[隨緣] 빈 모습이 모든 法들의 實在며 個體인 同時에 全切를 나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