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眞性甚深微妙法

장백산-1 2013. 7. 7. 20:13

 

 

 

제5구 眞性甚深極微妙

 
 
眞性은 깊고 깊으며 가장 微妙해
 
번뇌(煩惱)가 다 사라진 정적(靜的)인 해탈(解脫) 모습에서
잠시도 쉴 새 없이 自己를 演出하고 있음은
참으로 微妙하고 깊은 理致입니다.
이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인 연기(緣起)의 공성(空性)이
모든 存在의 근원(根源)이면서 同時에 현상(現象)이며,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으며
시공(時空)을 떠난 데서 時空으로 差別되어 나타났으며
時空의 差別 그대로가 時空을 떠나 있는 모순(矛盾)의

同一性이기 때문입니다.

 

 

삼독(三毒)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대소승(大小乘)을 區別하면서

大乘은 宇宙法界가 비로차나(毘盧遮那)

법신(法身)부처님의 나툼임을 믿고 수행하는 것이고,

小乘은 이것을 모르고 수행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毘盧遮那 부처님이란 연기법(緣起法)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修行을 通해서 緣紀법을 알 때
毘盧遮那佛  世界를 알게 됩니다. 처음 이 事實을 學習하는 立場에서 보면 差異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이 大小乘을 가르는 이유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곧 부처님의 삶을 닮아 사는 계(戒)의 모습과 禪定과 智慧를 바탕으로, 緣起法인 毘盧遮那 부처님의 世界가 具現되는 慈悲의 實踐은 始作되며 完成됩니다. 戒定慧 三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루는 根間으로 여기에 大小乘의 區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삼학의 실천 내용을 대소승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수행의 완성은 대소승의
구별을 떠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대소승의 분별이 없으며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實踐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大乘의 삶, 華嚴에서 말하는 일법계(一法界)의 삶을 이루는 것도  삼학의

실천과 완성에 있습니다.

 
늘 말했듯이 혜(慧)란 열린 마음, 곧 마음 가운데 있는 모든 壁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계(戒)와

정(定)의 완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만 不足하여도 안 됩니다. 계(戒)란

밖으로 드러난 行動, 곧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고, 정(定)이란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학의 완성은 마음 깊숙히 숨어 있던 微細妄想의 삼독심(三毒心)까지 完全히 사라져서 깨어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꿈속이나 깊은 잠속에서도 三毒心의 흐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 狀態를 三毒에

對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 곧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坐禪修行에서 좌(坐)란 단지 앉아 있음만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때문에 좌선(坐禪)의 형태가 不動心을 얻기 위한 方便이 아니라 坐禪 그 自體가
解脫을 나타내는 不動心이라고 하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부동(不動)이 앉음[坐]으로 表出되고 이 좌(坐)에서 몸과 마음이 무아(無我)로

실체(實體)가 없으며 연기법의 상호관계 속에서 끊임 없이 제 모습들을 나타내면서 정지(停止) 없이 흐르는

무상(無常)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선에서 '좌'란 깨달음을 위한 수단(手段)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自體)입니다. 坐가 不動의
표현이며 이는 앞서 말한 법성(法性)의 不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좌란 일상의
모든 행동에서 不動心을 나타냄이 됩니다.
 
앉아 있음이 그대로 온 삶을 사는 것이며 삶 全切가 해탈(解脫)로 앉아 있음입니다. 앉아 흔들리지
않는 것은 또한 無常이 그 極에서 오히려 부동(不動)이 됨과 同時에 不動이 無常의 동(動)으로
나타나듯이 坐와 不動인 姿勢가 온 世上의 變化를 表出해 내는 根本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삼천대천 세계에 나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坐와 不動이 연기법신(緣起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가장 극명한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不動心은 不動인 채로 自在하게 온 世上을 貫通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진여자성[眞性]이라고 합니다. 이 마음은 선악시비호오(善惡是非好惡) 등의 分別을 꿰뚫고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善惡是比好惡 등의 分別心이 일어난 瞬間 그것이 無我,

無常으로 제 實體를 갖지 않음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에 對해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반야바라밀을 염(念)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라고 하였습니다.
無常, 無我이기 때문에 時空을 超越하여 無常, 無我 自體가 時空이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生命의 삶들은 바로 공성(空性)을 나투고 있습니다.
 
 
연기(緣起), 모순(矛盾)의 동일성(同一性)
 
부처님 法을 배워 인생의 고(苦)에서 解脫한다고 했습니다만 人生의 苦가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빈 모습들이 찬연하게 나툰 現狀 一切, 곧 苦를 떠난 소외 없음이 우리의 本來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解脫은 삶의 目標가 아니라 당위(當爲)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모든
번뇌(煩惱)가 쉰 곳에서 찬연한 모습을 그대로 나툰 것일 뿐만 아니라, 찬연한 제 모습의 빛이
모든 法들을 貫通하여 生命의 빛을 나누고 있으면서도 相對에게는 철저히 相對 그대로
제 모습을 나투게 합니다.
 
이와 같이 걸림 없는 無限한 相互依持가 되고 있는 모습은 時空을 制限하고 있는 業으로는 把握되지 않는 깊고 妙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학습한 수행자가 마음마음마다 이 生覺을 잃지 않고
思惟하여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다스려 나갈 때 三毒心이 저절로 공성(空性)으로 化할
터이니 이 또한 微妙한 法입니다.
 
좌선수행으로 드러난 空의 빈 마음은 一切 煩惱를 다 녹여낼 뿐만 아니라 모든 선법(善法)이 저절로
일어나 온전한 生命活動의 場을 回復하게 합니다. 온전한 生命活動의 場이 곧 연기법(緣起法)이며
진여자성(眞如自性)이며 毘盧遮那 부처님입니다.
 
眞如自性인 毘盧遮那 부처님, 곧 宇宙法界身은 중생의 認識으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곳에서도 時空間의 制限을 넘어서 一切 萬物의 依持處가 되니, 가장 크다고 해도 가장 작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眞如自性은 自性이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는 것으로

無常, 無我, 緣起, 空, 毘盧遮那 부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서 時空의 制限을 넘어섰다고 해서 時空의 始作 以前이라고 生覺해서는 안 됩니다. 時空間 그
自體가 無常, 無我로 時空을 넘어선 데서 時空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時空 그 自體가 時空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無常, 無我의 緣起法은 時空도 넘어서면서 온 時空에 遍在해 있습니다.
 
중생의 삶이 涅槃에 두 발을 딛고 있으니 낱낱 중생이 바로 毘盧遮那 부처님입니다. 이는 중생의
自我意識을 넘어서 空性이 드러나는 三昧 體驗으로 現存하는 世界이기 때문에 깊고 微妙하다고
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意味를 나타내는 말이 법성(法性)이나 진성(眞性)인데, 다만 法性을 말한 앞의 네 구절은
不動의 정적(靜的)인 側面을 强調했다고 한다면, 眞性을 말한 이 대목은 空性이 그대로 萬法에 드러난 모습인 動的인 側面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煩惱가 다 사라진 정적(靜的)인 解脫의 한 모습에서 잠시도 쉴새 없이 自己를 演出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미묘하며 깊은 이치라고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는 진여자성인 연기의 空性이 모든 存在의 根源이면서 同時에 現狀이며,

不動이면서 動이며 時空을 떠난 데서 時空으로 差別되어 나타났으며,

時空의 差別 그대로가 時空을 떠나 있는, 矛盾의

同一性이기 때문입니다.

 

 

 

正和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