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符都誌)
[내용소개]
부도지는 한민족 최고의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시원을 밝혀주는 위대한 서적이다. 부도지를 통해서 우리는 한민족의 고향을 찾을 수도 있고, 아득한 太古에 일어난 地球의 歷史와 人類의 發源地인 麻姑大城을 接하게 된다.
부도지를 통해서 우리가 소위 중국인들과 서구인들에게서 배운 지난 2000년 동안의 지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가 우리 손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내려온 것은 韓民族의 크나큰 祝福이다.
[부도지의 요점]
부도(符都)란 하늘의 부름을 받은 都市, 또는 하늘에 附合한 都市라는 뜻이다. 따라서 符都誌는
太初에서부터 符都란 都市가 誕生하기까지의 歷史와 그 傳統이 消滅되기까지의 歷史를 밝히는 책이다.
부도지는 한민족 최고의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시원을 밝혀주는 위대한 서적이다. 부도지를 통해서 우리는 韓民族의 故鄕을 찾을 수도 있고, 아득한 태고에 일어난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발원지인 마고대성을 접하게 된다.
부도지를 통해서 우리가 소위 중국인들과 서구인들에게서 배운 지난 2000년 동안의 지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가 우리 손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내려온 것은 한민족의 크나큰 축복이다.
1. 地球歷史는 一直線의 歷史가 아니라 創造와 消滅이 返復되는 瞬環의 歷史이다.
‘부도지’가 보여 주는 瞬環의 週期는 天文學 또는 점성학에서 말하는 2萬 5,920年의 세차주기와 관련이 있고,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나타난 12萬 9,600年 週期와도 關聯이 있다.
2. 지금으로부터 약 1만 5,000년 前 地球表面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生命活動이란 存在하지 않았다. 地球 全切 는 물 또는 얼음으로 덮여 있는 상태였다. 이것은 ‘聖書’의 創世記 1장에 나타난 太初의 記錄과 一致한다.
3. 그 太初를 관장하는 어머니神의 이름을 麻姑라고 하였다
.
4. 인류의 조상들은 마고의 대성에서 태어나서 지구의 조화를 담당했던 신적인 존재였다.
5. 마고대성(에덴동산)의 위치는 현재의 파미르 고원으로 추정할 수 있다.
6. 지금으로부터 약 1만 3,000년 전 원시지구와 또 하나의 천체가 충돌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7. 창조 이후 고대의 지구는 토성과 같은 고리를 지니고 있었다. ‘성서’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궁창이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이를 단순히 천공(天空)으로 본 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다).
8. 처음 창조 이후 수천 년 동안 지구는 주기적인 혜성과의 충돌이 있었다.
그 중의 상당수는 원시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것들이었다.
9.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달은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한, 불과 몇 1,000년밖에 되지 않는 천체이다.
10. 그 동안 지축이 세 번이나 바뀌는 대개벽이 있었고, 이러한 와중에 마고대성으로부터 인류의 大移散이
이루어졌다.
11. 인류 최초의 대홍수는 지금으로부터 약 9,500년 전에 일어났다. 홍수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약 7,500년 전‘성서’의 노아의 홍수에 해당되는 두 번째 홍수가 일어났다.
12. 지금으로부터 6,000여 년 전, 현재 중국의 섬서성 태백산 아래, 지금의 서안(옛 장안성) 부근에
한(환)웅씨의 고대 왕조가 일어나서 혼란과 암흑에 빠진 세계에 문명의 빛을 가져왔다.
한웅이란 하늘의 아들(天子)이란 뜻이다. 한웅씨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아누(Anu)’라고 불려진 신이었다.
13. 바빌로니아의 전설에 우안(Oannes)이라고 불리는 물고기 인간이 나타나서 짐승과 다름없는 그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데, 이들은 환부(鰥夫)라고 불리는 한웅씨의 수행원들이었다.
14.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 임검(단군)께서 나셔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한웅씨의 고도가 있던
태백산 기슭에 새로이 부도(하늘의 위임을 받은 도시)를 건설하고,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우리말의 임금님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15. 중국 왕조역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세 명의 성군들(요, 순, 우)은 부도의 영역에 침투해서
약탈과 억압을 일삼은 범죄인물들이었다. 소위 고대 중국의 역사는 임검(단군)의 역사에
깡패두목의 이름을 바꿔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6. 임검의 치세에 유호라는 현자가 있어서 단군을 도와서 교화에 힘쓰고 특히 요, 순, 우의 학정을 제거한 후
서아시아 쪽으로 가르침의 여행을 떠났다. 본서에서는 유호씨와 유대 민족 간의 연결가능성, 특히‘성서’에
나타난 멜기세덱이란 신비로운 인물, 이스라엘 12부족 중 유대 지파(히브리 어로는‘예후다’) 그리고
그 유대 지파에서 출생한 예수의 메시지 등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원저자/ 박제상]
신라의 중신. 신라 내물왕 28년(서기 383)에 간관(諫官)으로 임명되고 그 후 보문전(寶文殿)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뒤, 여러 요직을 거쳐, 414년에 삽량주( 良州)의 간(干)으로 임명되었다.
[편저자/ 윤치원]
1955년 경북 대구 출생. 1978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졸업,
동 대학원 재학 중 전가족 이민으로 미국행
로스앤젤레스에서 로얄한의대 및 삼라한의대 졸업(한의학 석사) 후
양교 교수직 및 삼라한의대 교무처장(Associate Dean) 역임.
저서: 부도지(편저), 역서: 신들의 문명
[목차]
제1부 : 서론
1. 부도지를 읽기에 앞서서
2. 한민족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인가?
3. 왜 정통 중국 역사에서는 부도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4. 부도지를 해석하기 위한 몇 가지 견해
1) 지구역사의 주기
ㄱ. 세차주기
ㄴ. 스리 유크테스와의 유가 이론
ㄷ. 마야의 장기력
ㄹ. 빙하기
ㅁ. 소강절의 우주력
2) 인체와 태양계의 연관성
제2부 : 부도지 본문
1. 부도지의 유래
2. 부도지 본문번역
제3부 : 부도지 해설
제1장: 혼돈에서 조화로
- 처녀궁 시대
제2장: 창조와 타락
- 사자궁 시대
제3장: 인류의 대이산과 대홍수
-거해궁 시대 및 쌍자궁 시대
제4장: 한웅씨와 문명시대의 시작
- 금우궁 시대
제5장: 임검씨와 부도의 건설
- 백양궁 시대의 문턱에서 I
제6장: 현자 유호씨와 요의 반란
- 백양궁 시대의 문턱에서 II
부록: 노아의 홍수와 달의 탄생
참고문헌
그림 도표 목록
색인
[보도자료]
符都誌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
부도지는 신라의 중신이었던 박제상(朴堤上363-419?)공에 의해서 집필되었다. 신라 내물왕 28년(서기 383)에 간관(諫官)으로 임명되고 그 후 보문전(寶文殿)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뒤, 여러 요직을 거쳐, 414년에 삽량주( 良州)의 간(干)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태학사로 있을 때에 열람했던 자료와 가전비서(家傳秘書)들을 정리하여 징심록(澄心錄) 15지를 저술하였으니 부도지가 바로 그중의 첫 번째 책이다.
그 이후 418년에 박제상은 고구려로 들어가 전왕(實聖王)때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訥祗王)의 아우 복호(卜好)를 구해오고, 곧 바로 왜국으로 건너가서 또 다른 아우 말사흔(末斯欣)을 탈출시켰으나 본인은 남아서 왜왕(倭王)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갖은 협박과 고문에도 공이 기개를 굽히지 않자, 마침내 목도(木島)에서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공의 부인 김씨는, 그 죽음을 듣고 세 딸을 거느리고 치술령( 述嶺)에 올라 치술령가를 짓고 동해를 바라보며 울다가 자진하여 죽었다. 장녀 아기(阿奇)와 삼녀 아경(阿慶)도 모친을 따르니 이들의 몸이 변하여 석상(石像)으로 화했다고 한다. 차녀 아영(阿榮)은 홀로 남아서 5세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가 후세에 유명한 가야금의 달인 백결선생(百結先生) 문량공(文良公)이었다.
… 조선에 들어서서 세종조에도 역시 집안이 중용을 받았다. [징심록 중에 한권이 음신지(音信誌)라고 하였으니 혹시 한글 복원(창제가 아님)에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던 영해 박씨의 후손들은 김시습 등과 함께 황망히 산중으로 숨어들어야 했고, 그 후 수백 년간 삼신궤 밑바닥에 감춰두고 그 후손인 박금(朴錦1895 - ?)씨 대에까지 전하여 졌다.
박금씨가 동아일보 재직 시에 징심록 전편을 번역하여 잡지에 기재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정책에 위배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해방 후 6.25 동란이 발생하자 박금씨는 문천에 있는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에 원본을 남겨두고 월남하였다. 울산의 피난소에 도착한 후 징심록의 대의를 정리하고 그 암기한 내용을 재생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953년까지 부도지 내용을 재생하고 김시습의 징심록추기, 박금씨 자신이 덧붙인 후기 등을 합하여 프린트본으로 출간하였다. 그 외에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진지를 출간중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고, 부도지마저 거의 멸실(滅失)의 단계에 있었으나, 다행히도 효성(曉星) 정시화(鄭時和)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있던 한문본의 번역을 김은수(金殷洙) 선생님께 위촉하여 1986년 가나출판사를 통해서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되었다.
필자는 80년대말 이곳 L.A.에 있는 한국서점에서 우연히 부도지를 입수하고 가슴이 울리는 감동을 받았으나, 학문이 천박하여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늘 가슴속에 새겨 두면서 때때로 꺼내서 거듭 정독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1997년 초, 친구와 함께 서양의 점성학과 동양의 역학을 접목시킨 책을 같이 써보기로 하고 각자 연구에 들어가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다. 그러다 보니 문명의 구심점을 찾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미 한단고기와 부도지를 통해서 파미르가 그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인씨와 한웅씨를 모르는 서양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부득이 인용만 하려 했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책을 인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도지 본문만이라도 영문으로 번역해보려고 시도하던 중 그전에는 대충 넘어가던 것을 강제로라도 깊이 생각하게 되고, 서양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료를 찾고 하다보니 부도지가 보여주는 세계가 엄청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사명감을 느끼고 해설서를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태백산의 위치와 한웅 한인 단군 임검
태백산이 어디인가? 한국의 강원도 태백산에는 사해제족의 총화를 이룰 곳이 없다. 그럼 백두산인가? 백두산은 한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근처에 부도와 같은 대도시의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고, 아시아 전역으로 보아서는 동북쪽의 후미진 곳에 있다.
예를 들어 한단고기에 보면 3세 단군 가륵 8년(BC 2175)에 강거(康居)가 티벳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티벳트인이 백두산 쪽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부도지가 말하는 곳은 높은 산맥이 있고, 거대한 강줄기가 뻗쳐 나가고, 수륙의 교통이 사방팔방으로 열려서, 해안지역의 민족들과 산악지역의 민족들이 모여서 총화를 이룰 수 있는, 즉 광대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라야 한다.
눈을 잠시 중국으로 돌려보자. 중국본토의 중심부, 티벳트와 곤륜의 산악지역이 끝나고 광대한 중원의 평야가 시작되는 곳, 즉 산악과 평원이 만나는 섬서성(陝西省)에 해발 약 3767m에 달하는 높디높은 태백산이 있다. 바로 뒷편(서쪽)에 광대한 티벳트 고원이 펼쳐져 있으니 강거가 이 지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면 정확하게 이치에 닿는다고 할 수 있다.
이곳 태백산을 기점으로 하여 광대한 평원지대가 마치 부챗살처럼 해안까지 동쪽으로 퍼져 나간다. 크고 작은 강줄기들이 역시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데, 이 중에는 거대한 황하와 양자강이 포함된다. 실제로 양자강의 큰 줄기인 한수(漢水)와 황하가 막 갈라진 위수(渭水)가 태백산을 끼고 흐르니, 이곳은 중국의 남방과 북방 및 해안 각 지역을 수운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배후에는 곤륜산맥과 티벳트고원이 있어 산악민족과 바로 연결되고 감숙성의 협로를 통과해서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바로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사천성(四川省)의 요지를 통과해서 미얀마와 갠지스강 유역, 즉 동남아시아 및 인도 북부의 제 민족과 연결된다. 임검(단군)께서 사해제족의 총화를 이루기 위해 부도를 선정할 장소를 택했다면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곳 태백산 동북쪽 가까이에 자리잡은 큰 도시가 전통적으로 비단길(Silk Road)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는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서안은 예로부터 세계최대규모의 국제도시들 중의 하나였다.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당(唐)나라를 비롯해서 자그마치 11개 왕조가 이 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수도 없이 많은 피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 곳을 차지한 자는 곧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여겼다. 왜 그랬을까?
그 해답은 한가지, 이곳이 단순히 중국문명이 아닌, 노아의 홍수이후 전 세계 고대문명의 기원, 즉 진짜 천자인 한웅(桓雄)씨가 문명을 일으킨 신(神)의 도시가 위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옛날 이 지역은 밝달(밝은 땅=明地, Balktar)이라고 불렸고, 한웅(桓雄=하늘의 아들=天子, Son of Heaven)씨가 이곳을 도읍(神市City of God)으로 하여 전 세계를 다스렸다.
한웅씨는 서기전 4000년 경 고대문명사회를 창출했으며 이 문명은 해양문명이었다. 수메르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모두가 중국의 태백산(서안)을 기점으로 한 한웅씨의 문명권이었다.
한웅씨는 인류를 육신의 고통과 영적인 어두움, 즉 그 짐승과 같이 된 상태에서 구하기 위해서 문명시대를 열었다. 홍수로 인해 곳곳에 범람하는 물과 지나친 습기로 인한 문제외에는 정복의 대상이 될 것이라곤 없었다. 우리 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냉기와 습기와 장내 기생충으로 고생하던 이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웅씨는 농사짓는 법과 불의 사용법, 또 집을 짓고 배와 탈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동시에 세계 곳곳을 돌면서 인류가 하늘의 자손으로서 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을 상기시켰다. 이 시기는 영적인 지혜와 물질적인 지식이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니 이를 일컬어 홍익인세(弘益人世)라고 하였다. 이가 곧태백산의 위치와 한인 한웅 단군임검 옛 부처이다. (절에 가면 본당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하지 않는가?)
이러한 한웅씨의 대통을 이어받은 것이 임검씨였다. 서기전 약 2400년경의 일이다. 한웅이란 이름이 하늘의 아들(Son of Heaven)을 뜻한다면 임검이란 이름은 제사장-왕(Priest-King)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인이 직접 다스리는 신정시대에서 제정일치의 시대로 이행한 것을 보여준다. 임검씨는 세계 방방곡곡을 순행하면서 하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부도를 건설하여 제 민족의 총화를 이룰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300년 전에 국제연합을 설립하고, 부도에서 세계민족대회를 연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도지의 내용은 성서의 창세기 이상이다. 연대기로만 따져도 6000년 전 아담의 탄생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가 하면 서로 배치되는 곳도 많다. 그 교훈과 철학적인 깊이는 원본창세기라고 할 만하다.
부도의 전통은 앞서 언급한 태백산 기슭에서 약 1200년 간 지속되었다. 부도가 유지되는 동안 중국과 그 주변지역은 비교적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요인들은 상존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지역에는 부도의 이상과 궤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요소(인물과 사상)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임검씨는 중국역사에서 소위 성군으로 일컫는 요(堯), 순(舜), 우(禹)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다.
부도지에 의하면 이들은 성군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사리사욕을 좇는 모리배였고, 민중을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챈 불한당들이었다. 부도가 강성한 동안은 이들이 활개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도가 그 지도력을 상실한 후, 중원지역은 천년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마침내 서기전 221년 진(진)나라가 철권으로 중원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가 곧 진시황이다.
부도가 비게 되자, 이를 후발국인 주(周)가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은(殷)나라와 한바탕 쟁탈전을 벌여 은이 멸망(BC 1122)한 이후의 일이다. 1986년에 사천성 광한시 지역에서 서기전 1200년경으로 추측되는, 즉 하남성 안양을 중심으로 한 같은 시기 은나라의 유적을 능가하는 엄청난 청동기문화의 유적지를 발견하는 고고학적인 성과가 있었으니 주나라의 세력근거지가 아니었나 한다.
중국은 부도의 이념을 상실한 후 정치적, 지리적 공백기를 맞이했다. 원래의 부도는 그 잔해만 남은 채 동북쪽 구석으로 이동하여, 동이(東夷)족의 중심지 역할은 했으나 중원지역에 대해서는 그 권위를 상실했다. 이러한 혼란기에서 새로운 사상적인 구심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결국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로 나타났다. 그 중에 가장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공자(孔子)라고 할 수 있겠다. [영어로 혼란을 confusion이라 하고, 공자를 Confucius라고 부르니 마치 그 이름이 혼란의 시기를 대표하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민중은 부도를 그리워하였다. 孔子도 동이(東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경제적으로 풍요해서가 아니다. 그곳에 옛 부도의 유습(遺習)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東夷란 결국 부도의 유중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孔子는 이곳을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 불렀다. 즉 착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中土의 피비린내나는 狀況에 대한 反證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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