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기적 - -디팩 쵸프라

장백산-1 2013. 9. 12. 13:23

 

 

 

 

 

 

마음의 기적...  디팩 초프라| 김정구 교육원장님의 수련기
침도 | 조회 461 |추천 0 | 2010.11.26. 14:55

 

 마음의 기적... 디팩 초프라 

 

1. 觀察者(watching exsistence)로부터 獨立的인 客觀的 世界는 存在하지 않는다.


우리가 實在라고 받아들이는 世界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性質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物件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物件 中의 어떤 性質도 우리 自身의 認識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意味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物體를 假定해 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中性微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亞原子) 粒子에게는 의자의 原子들이 서로 수 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外界의 어느 地点에서 그 의자를 본다면 의자는 地球上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時速 수천 마일의 速度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認識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描寫할 수 있는 다른 어떤 性質도 完全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색이라면 초록색 眼鏡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색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도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密度가 큰 行星의 重力場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物質世界에서는 絶對的인 屬性이 存在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獨立的인 世界가 存在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宇宙란 그것을 感知하는 感覺器管의 反일 뿐이다. 人間의 神經係는 宇宙 속에 振動하고 있는 總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 되는 至極히 微少한 部分의 에너지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動物들의 神經係는 우리의 世界와 共存하고 있는 또 다른 世界를 反影한다. 박쥐는 超音波의 世界를 感知하며, 뱀은 赤外線의 世界를 感知한다. 두 世界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世界다.



眞正으로 ‘저 밖에’ 存在하고 있는 것은 다만 認識者인 우리가 解釋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定形化되지 않은 原始

데이터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感覺을 사용하여, 物理學者들이 말하는 ‘지극히 不明確하고 멀건 量子 수프’를 굳혀서 3次元의 固形 宇宙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神經學者인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斷言으로써 感覺이라는 幻想 洞察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自然 宇宙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卽 織物, 紋樣, 아름다움, 香氣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存在하지 않는다는 事實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現實의 基盤으로 삼고 있는 어떤 客觀的 事實도 本質的으로는 無效하고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事實이 混亂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認識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宇宙 -

당신의 몸을 包含한 -를 당신이 變化시킬 수 있다는 事實을 깨닫게 하는, 믿기지 않는 解脫이 있다. 지금 이 瞬間에도

自身에 對한 우리의 認識이 몸속에서 엄청난 變化를 일으키고 있다는 事實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되는 定年退職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社會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人間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前날까지만 해도 한 職場人은 勞動과 價値로써 社會에 기여하지만 그날 以後로 그는 社會의 被扶養者가 된다. 醫學的으로 이러한 認識的 轉移의 結果는 비참하다. 退職 以後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癌의 發病率이 치솟고, 退職하기 前에 健康했던 사람들이 조기에 죽음을 맞는다. 소위 ‘조기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自身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存在라는 認識에 起因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認識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疾病을 일으키고 死亡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比較한 바에 의하면, 老年層이 社會의 어엿한 構成員으로서 받아들여지는 社會에서는 老人들이 지극히 元氣旺盛하다. 그들은 美國의 老人네들로서는 定常的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肝의 表被細胞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高倍率 顯微鏡으로 살펴보면, 그 光境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러 저리 얽혀 있고 脂肪質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循環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暗黃色 色素가 세포내부의 10 내지 30퍼센트까지 蓄積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肝細胞 機能의 異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物質的인 현미경이가 아니라 精神的인

현미경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細胞들이 마치 그 사람의 經驗이 記錄된 地圖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記錄 刻印 貯藏되어 있다. 意識에서는

오래 前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칩처럼 여전히 外部로 信號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反應들은 心身의 境界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一部가 된다. 오래된 細胞 속의 毒性 老廢物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形態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遺傳的인 差異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細胞는 독특한 形態를 띠게 될 텐데, 그 形態는 당신이 自身의 身體組織과 內臟器管에 代謝作用으로 變化시키고 處理시킨 獨特한 經驗을 거울처럼 反影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混沌스럽고 거칠게 振動하는 ‘量子수프’를 다루어서 意味있고 秩序있는 現實의 單片들로 만들 수 있게 되면 無限한 創造의 可能性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可能性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存在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意識의 거의 大部分이 당신이 意識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所謂 自律神經係는 당신의 意識을 빠져나간 機能들을 統制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腦 속의 自律神經 中樞는 여전히 危險한 瞬間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發動시킬 姿勢를 갖추고 外部世界에 對處하고 있다. 우리가 意識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行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貯藏된 에너지를 變換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血壓을 높이고 낮추며, 體溫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均衡感覺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筋肉으로 血液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感知하는 등의 일이 恒常性(homeostatis) 유지를 위해서 끊임없이 進行되고 있는 것이다.



이 自律的인 過程이 老化現狀에 아주 큰 몫을 擔當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機能들을 調節하는 能力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 平生 無意識的인 生活을 이어가면 수많은 老化作用이 일어나고, 한 평생 意識的으로 活動하면 老化를 豫防할 수 있다. 身體의 機能을 自動運傳 狀態로 내버려두는 代身에 意識的으로 注意를 기울이는 行爲, 그 自體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을 것이냐에 變數가 될 것이다. 心臟搏動과 呼吸으로부터 消化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自律神經 機能들을 意識的으로 統制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冥想의 時代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 中에서도, 예컨대 心身健康 硏究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意志로서 血壓을 내리거나, 위궤양 환자가 胃酸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能力을 老化現狀에 活用하지 못할 理由가 있겠는가? 舊態依然한 認識을 새롭게 바꾸지 못할 理由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利로운 方向으로 自律神經係에 影響을 미치는 技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肉體는 波動하는 에너지와 情報로 이루어져 있다.


過去의 패턴을 變形시키기 위해서는 그 패턴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分子와 原子로 쪼개어지는 固形의 物質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量子物理學은 모든 原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空間(眞空)이며, 實際로는 振動하는 에너지 덩어리인 亞原子 粒子(陽性子,中性子,陰電子)가 이 空間 속을 빛의 速度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振動은 無作爲的이고 意味없는 것이 아니라 情報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에너지 덩어리의 振動은 水素 原子의 情報를 지니고, 또 다른 에너지 덩어리의 振動은 酸素 原子의 情報를 지닌다.

事實 가각의 모든 元素들이 하나의 固有한 에너지 情報體이다.



情報는 抽象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窮極的으로는 宇宙와 그 속에 存在하는 모든 것이 抽象的인 것이다. 人體의 物理的 構造(肉體)를 窮極的 根源으로 추적해 가면 分子가 原子로, 原子가 亞原子 粒子로, 亞原子 粒子는 素粒子로,  素粒子는 텅~빈 空虛(眞空/零点場))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幽靈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神秘스럽게도 이 空虛속에는 어떤 情報가 表現되기도 前에 이미 우리의 記憶 속에 소리없이 存在하는 것처럼, 量子場(quantum field)은 表現되지 않은 形態로 온 宇宙와 宇宙에 관한 歷史와 情報를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것은 數十億의 銀河界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空間 속에 壓縮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瞬間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無限히 작은 그 点 以前에도 宇宙의 形態는 나타나지 않은 形態로 存在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包含한 宇宙의 根本 質料는 非質料(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凡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生覺하는 非質料이다. 모든 原子 內部의 空虛는 보이지 않는 知能으로 脈動하고 있다. 遺傳學者들은 이 知能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生覺을 便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情報化된 自身의 知能을 쌍둥이 격인 RNA에 傳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細胞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酵素들에게 그 知能의 조각들을 傳達해 주고, 그러면 酵素는 그 特定한 知能의 조각을 蛋白質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生命이 展開된다. 이러한 過程의 모든 瞬間에 에너지와 情報가 相互交換되어야 하며, 이 에너지情報의 相互交換이 없이는 生命 없는 物質로

부터 生命이 생겨나지 않는다.



人體는 主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形態로 細胞에 傳達되는 糖粉을 燃燒함으로써 에너지를 생산해낸다. 글루코스의

化學構造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複雜하고도 정교한

構造를 가진 살아있는 細胞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덩어리와 물과 二酸化炭素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物質代謝(新陳代謝)는 單純한 燃燒過程 以上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非活性 狀態로 들어 있는 糖粉이 그 에너지로써 生命을 지탱하는 것은 人體 細胞가 그 에너지에 새로운 情報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腎臟, 心臟, 혹은 腦의 細胞에 줄 수 있다. 이 細胞들은 모두가 自身만의 獨特한 形態의 知能을 지니고 있다. 心臟細胞의 律動的인 收縮運動은 腦細胞의 電氣的 放電作用이나 腎臟細胞의 나트륨 交換 作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知能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身體가 共有하고 있는 單一한 知能이 있다.

이 단일한 知能의 흐름이 肉體를 살아 있게 하며, 死亡 瞬間에 이 知能의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貯藏된

그 모든 知識/情報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知能의 흐름은 多樣한 方法으로 損傷된다.

免疫係와 神經係, 內分泌係의 特有한 知能이 모두 衰退하기 始作한다. 生理學者들은 이 세 가지 係統이 人體의

가장 重要한 制禦機能을 擔當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腦의 信號를

받아들이는 受容體(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擴張된 腦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老化란 單純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限定된 하나의 疾病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免疫係統이나 內分泌係統의 知能이 傷失되면

온몸의 老化가 進行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過程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次元에서 進行되기 때문에, 末期 段階까지 進行되어 身體的인

症狀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損傷은 눈에 띄지 않는다. 五感은 老化를 일으키는 數十億의 量子의 交換作用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侵透해 들어가지 못한다. 量子 交換作用의 變化의 速度는 너무나 빠른 同時에 너무나 느리다. 各各의 化學反應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秒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累積된 效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반응을 아는데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反應들에는

한 개의 原子보다 數百萬 倍 작은 규모의 情報와 에너지가 介入된다.



人體가 單純한 物質이라면 老化에 依한 衰弱은 不可避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物質은 엔트로피增加(entropy), , 秩序있는 體係로부터 점점 無秩序하게 되어 가는 傾向性의 犧牲物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증가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증가는 잘 돌아가던 機械를 찌그러진 古物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過程은 결코 反對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法則이 知能에까지 適用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세계는 歲月의 약탈에 影響을 받지 않는 것이다. 現代科學은 이 모든 것이 意味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靈的인 傳統 속에 이미 數 동안 傳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自身의 眞情한 本質이 에너지情報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賢者들을 배출해 왔다. 이 知能/에너지情報/氣의 흐름을 維持하고 해가 갈수록 豊富하게 함으로써 賢者들은 自然界의 深層的 次元에서 엔트로피를 克復해 肉體의 수명을 연장해냈다. 인도에서는 이 知能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意志로써 增加시키거나 이곳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肉身을 젊고 順調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接하고 使用할 수 있는 能力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意識의 集中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深層的 次元에서 프라나와 意志의 集中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生命은 意識이며 意識이 곧 生命이다.


 

3. 몸과 마음은 分離할 수 없는 '하나'이다.


知能은 自身을 가리고 있는 物質이라는 假面보다 훨씬 더 融通性이 있다. 知能은 自身을 思念/念想/生覺으로 表現할 수도 있고 分子로써 表現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같은 基本的인 感情은 하나의 抽象的인 느낌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分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痛症을 傳達하는 神經信號가 없으면 痛症도 없고, 痛症의 受容體에 꼭 들어맞아서 痛症의 信號를 遮斷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痛症으로부터 解放될 수도 없다. 心身相關 醫學(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革命은 이 單純한 發見 위에 根據한 의학이다. 生覺이 가는 곳에 化學物質이 同伴된다. 이러한 洞察이, 예컨대 男便을 최근에 死別한 女性들에게 乳房癌이 일어나는 確率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病을 얻는 確率이 왜 네 배나 더 높은지 등을 理解하는 데 强力한 道具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精神的인 壓迫狀態(스트레스) 疾病을 일으키는 生體化學物質로 變換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막히는 痛症을 유발하는 心臟係統의 代表的인 疾換인 狹心症 患者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痛症을 完全히 無視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程度의 痛症에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本能的으로 이 두 사람의 身體的인 差異를 調査해 볼 것이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心臟病 專門醫들은 세 개의 冠狀動脈 중에서 最少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狹心症의 痛症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血管이 막히는 것은 大部分이 죽은 細胞, 凝固된 血液, 脂肪質이 낀 血素板 등이 血管內壁에 끼어서 發病된 動脈硬化의 形態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狹心症 患者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血行을 防害하는 작은 병변(病變)을 가지고도 痛症으로 障碍人이 되는 反面, 다른 患者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막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狹心症은 반드시 어떤 物質이 낄 경우에만 發病되는 것은 아니다. 冠狀動脈에는 筋肉細胞層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血管이 닫혀 있을 때에도 搏動하여 痛症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個人에 따라 反應이 매우 다르다.)



心身相關 醫學의 觀點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痛症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解釋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狀況에 대해 自身만의 特有한 烙印을 찍는다. 그리고 痛症(혹은 기타의 症狀)은 心身體係 속에서 作用하고 있는 過去의 모든 影響들과 相互作用한 다음에야 意識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恒常 똑같은 反應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痛症의 信號는 多樣한 用度로 變換될 수 있는 原始 데이터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苦痛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解釋하게끔 만들지만, 똑같은 苦痛이 다른 狀況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 선수들은 自身을 限界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新兵訓練所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醫學은 이제 막 心身의 相關關係를 治療에 利用하기 始作하고 있다. 痛症 治療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placebo), 즉 가짜 藥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心身의 相關效果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全一的)이다. 똑같은 가짜 藥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胃酸分泌를 멈추게도 하며, 血壓을 낮추기도 하고, 抗癌劑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 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藥效가 없는 同一한 藥物로써 이처럼 전혀 다른 反應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暗示만 주면

人體는 ‘그 어떠한’ 生化學 反應이든지 만들어 낼수 있는 能力이 있다는 結論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藥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아닌 暗示의 힘이다.

이 마음의 暗示가 人體가 自身을 治癒하려는 意志로 變換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藥으로 患者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治癒의 意志’로 接近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意志를 效果的으로

發動시킬 수만 있다면 人體는 그것을 自動으로 實行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可能性이 存在한다는 것을 證明해 주는 매우 興味로운 證據를 가지고 있다. 老人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神經障碍로서, 筋肉運動을 調節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身體動作이 極度로 느려지다가 結局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硬直되게 만드는 病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dopamin)이라는 腦의 매우 重要한 化學物質이 알 수 없는 理由로 고갈되는 것이 原因이라는 事實이 밝혀졌다. 한편 어떤 種類의 藥物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腦細胞가 破壞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증상이 甚化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어떤 환자를 假定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밟아 보세요.”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奇蹟과도 같이 그 금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全的으로 自律的인 機能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意志에 의해서 腦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秒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 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腦는 反應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老人들의 衰弱 글자색이나 活動力 減退는 大部分의 경우 단지 休止狀態일 뿐이다. 目的意識을 가지고 活動的으로 生活하고자 하는 意志만 再確認시켜 주면, 많은 老人들이 運動能力과 體力과 민첩성과 精神反應을 極的으로 改善시킬 수 있다.



意志는 意識集中의 適極的인 同業者이다. 意志는 우리가 自動的인 過程을 意識的인 過程으로 變換시키는 方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心身相關關係 訓練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만에 좀더 定常的인 反應으로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老化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精力과 活動力을 나날이 增進시키고 싶다’는 式의 意志를 思考過程에 注入함으로써, 活動에 表現되는 에너지의 量을 決定하는 大腦中樞에 統制力을 行使하기 始作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活動力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퇴되리라고 生覺하는 사람들이 ‘期待’한 結果이다. 그들은 自己도 모르게 自己敗北的인 意志를 强한 信念의 形態로 心身에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心身의 相關關係가 이러한 意志를 自動으로 實行하게 된다.



過去에 우리가 지녔던 意志들이 우리를 支配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舊時代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事實은, 意志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覺性시킬 수가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意志를 使用하여

意識的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前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損失을 防止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人體의 生化學 作用은 意識作用의 産物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重大한 限界 중의 하나는, 人體 內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意識은 아무런 役割도 하지 않는다는 前提이다. 그러나 疾病의 治療는 그 사람의 信念, 推測, 期待,

그리고 自身에 對한 自我相을 또한 理解하지 않고서는 理解할 수가 없다. 人體를 마음이 없는 機械로 보는 立場이

아직도 西洋醫學의 主流를 支配하고 있지만, 그와는 反對되는 疑心할 수 없는 證據들이 있다. 癌이나 심장질환으로 死亡하는 比率은 아무래도 心理的인 壓迫感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目的意識이 强하고 幸福한 사람들은 더 낮다.



最近 몇 해 동안 이루어진 醫學硏究 結果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精神醫學者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實驗이다. 그는 患者의 마음狀態가 癌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醫士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信念과 態度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利로운 점보다는 害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癌을 일으킨 原因은 나에게 있다’式의 生覺은

罪意識과 自己非判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乳房癌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對相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법 강의와

結合된 精神療法을 行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不可避하게 된 末期 症狀의 病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果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精神療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事實을 發見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精神療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硏究結果는 硏究者가 그 效果를 전혀 期待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 대학의 젠센(M. R. 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感情을 억누르고 絶望感에 빠지고 噴怒나 두려움, 기타 否定的인 感情을 發散하지 못하는 性格을 지닌 女性들에게는 乳房癌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事實이 發見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發見이 보고되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醫士들은 이러한 硏究結果에 대해서 先入見을 가지고 있다. 洞察力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Medicine and Meaning)>에서 래리 도시(Larry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醫學會報나 醫科大學 강단에서 끊임없이 說敎되고 있는 支配的 敎訓은 ‘傳來의 病理學’만이 그 무엇보다도 重要한 것이며, 느낌, 感情, 態度 등 마음 意識과 關聯된 것들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主張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感情이란 외딴 精神의 空間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事件이 아니라 意識의 表現이며 生命의 根本的인 質料라는 事實이다. 모든 宗敎나 傳統 속에서 生命의 숨결은 곧 靈魂이다. 靈魂을 高揚시킨다거나 低下시킨다는 것은 人體가 반드시 反影해야 할 根本的인 어떤 것을 意味한다.



意識은 老化現狀에 매우 큰 差異를 가져온다. 高等한 生命 形態를 지닌 모든 種이 老化하지만, 오직 人間만이 自身에게 일어나고 있는 現狀을 認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認識을 다시 老化 自體로 再飜譯 한다. 늙어가는 것에 絶望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빨리 늙어가는 것이다. 反對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肉體的 精神的인 많은 不幸을 막아낼 수 있다. 自身이 늙었다고 生覺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生覺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自然界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情報의 刺戟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自然界의 生覺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人間의 生覺은 한 가지 重要한 面에서 이와는 다르다. 自然界는 自身의 生覺의 形態가 일단 定해지면 거기에 固定되어 버린다. 行星이나 나무와 같은 事物은 生겨나고 成長하고 衰退하고 分解되는 自動的 段階의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人間은 生命의 週期 속에 갇히지 않는다. 認識能力이 있음으로 해서 人間意識은 우리 內部에서 일어나는 모든

反應에 參與한다. 우리가 自身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責任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問題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意識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있게 이야기한다. 自己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黃金으로 變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事物의 實質的인 材質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瞬間 단단한 黃金으로 變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方式으로 人間의 意識은 量子을 日常의 物質的 現實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量子的 現實 그 自體의 材質을 알 수가 없다. 五感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生覺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生覺 또한 量子의 場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生覺은 空虛의 無限한 可能性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事件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肉體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特定한 時空間的 事件이다. 우리는 순전히 抽象的인 潛在力을

固形의 物質로 바꾸어 놓는 마이더스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肉體의 物質性만을 經驗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意識을 意識하지’ 못하는 限, 量子場을 肉體로 바꾸어 놓는 自身의 意識行爲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認識이란 學習된 現象이다.


만일 모든 人間이 어떤 經驗에 對해서 똑같은 反應을 하게 되어 있다면, 意識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變化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認識을 共有하는 일은 없다. 당신 애인의 얼굴이 나의 가장 미운 적일 수도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는 구역질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各個人의 反應들은 반드시 學習된 것이다. 여기서 個人의 差異가 비롯된다. 學習 行爲는 마음을 매우 活發히 使用하는 것으로, 身體에 매우 活發한 變化를 일으킨다. 사랑, 증오, 기쁨, 혐오 등의 認識은 身體에 서로 極端的으로 다른 方向의 刺戟을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肉身은 우리가 태어난 以來로 배운 모든 解釋方式의 肉體的 産物인 것이다.



臟器移植 手術을 받은 일부 患者들은 腎臟이나 肝, 心臟 등을 기증 받은 後에 괴이한 經驗을 했다는 報告를 해 온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狀態에서, 그들은 기증자의 記憶 속에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體內에 다른 사람의 身體 組織이 移植되면 기증자인 사람의 對人關係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번은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어떤 女性이 잠을 자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맥주와 통닭을 먹고 싶은 生覺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前에는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生覺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미라는 젊은 남자가 나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 그녀는 交通事故로 病院에서 죽은 심장 기증자의 身狀을 조사해 보았다. 그녀가 그의 家族을 만나본 結果 交通事故로 죽은 사람이 티미라는 이름의 靑年이었다는 事實이 밝혀졌다. 그가 맥주를 매우 즐겼으며 맥도널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事實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超自然的인 설명을 찾기보다 우리의 身體는 經驗이 肉體的 表現으로 變形된 임을 確認시켜 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經驗이란 우리 意識 마음이 量子場을 ‘肉化’시키는 어떤 것이므로 우리 몸 細胞 속에는 우리의 記憶이 注入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細胞를 받는다는 것은 同時에 그 사람의 記憶도 받는 것이 된다.



당신의 몸 細胞는 끊임없이 經驗을 處理하고 그것을 당신의 個人的 觀點에 依據하여 代謝作用으로 變換시킨다.

당신은 單純히 原始 데이터를 눈과 귀를 通해 通過시키고 거기에 判斷의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그것을

內化하면서 實際로 自身이 그 解釋 自體로 ‘變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서 失意에 빠진 사람은 自身의 몸 구석구석으로 그 슬픔을 投射한다. 卽, 大腦에서 나오는 神經傳達物質이 고갈되고 호르몬의 양이 떨어지며, 수면 주기가 혼란해지고, 피부세포의 표피층에 있는 뉴로펩티드 수용체가 교란되고, 혈액 속의 혈소판이 끈적끈적해져서 덩어리가

되기가 더 쉬워지며, 눈물조차 기뻐할 때의 눈물과는 다른 化學成分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새로운 職場을 얻게 되면 이 모든 生化學的 양상이 極的으로 바뀌며, 만일 그 직장이 매우 만족스럽다면

그의 몸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수용체, 그리고 DNA 자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필수 생화학물질들은 갑작스럽게 狀況이 好轉되었음을 反影하기 始作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遺傳情報가 貯藏된 잠겨진 倉庫로 生覺하지만, 作用上 쌍둥이인 RNA는 每日每日의 狀況에 反應하고 있다. 醫科大學生들은 試驗期間이 되면 癌에 對抗하는 免疫反應에 必須的인 化學物質인 인터루킨(interlukin) 2의 수치가 줄어드는 現象을 보인다. 인터루킨2의 생산은 전령 RNA(messenger RNA)에 의해 制禦되는데, 이것은 시험결과에 대한 학생들의 걱정이 遺傳子에 곧바로 影響을 미친다는 事實을 의미한다.



이 점은 우리가 實際로 願하는 狀態의 身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意識을 使用해야 할 必要性이 크다는

것을 力說해 주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실업자의 걱정처럼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나

老化現狀만은 날마다 對面해야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解釋이 向後 40, 50년, 혹은 60년 동안에

일어날 일들에 重大한 影響을 미친다.



神經學的으로 말하자면, 腦의 信號는 한갓 물결치는 波動에너지의 結合이다. 당신이 혼수상태에 있다면

信號는 아무런 意味가 없다. 당신이 깨어서 精神을 차리고 있다면 그 信號는 無限히 創造的으로 解釋할

있도록 開放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劇 중에서 ‘우리는 꿈과 똑같은 材質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는

프로스페로의 대사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人體란 大腦信號가 3次元的으로 投射되어 우리가

‘現實的’이라고 말하는 狀態로 變形된 것, 卽 現實化된 꿈과도 같다.



老化란 일련의 오도된 변형, 즉 균형잡히고 안정적인 자기쇄신의 과정이 옆길로 샌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肉體上의 變化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實際로 일어난 일은 먼저 우리의 意識 - 우리 마음속의 意識이든

細胞 속의 意識이든 상관없다 - 이 옆길로 샌 것이다.



우리는 自己가 어떻게 이처럼 옆길로 새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체내의 생화학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意識을 벗어난 生化學 作用은 없다. 우리 몸의 모든 細胞들은 우리가 自身들을 어떻게 生覺하고 느끼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事實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自身을 무차별로 냉혹하게 몸을 허물어뜨리는 歲月의 祭物이라고 生覺하던 幻想은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6. 知能의 자극이 身體를 시시각각 끊임없이 새로운 形態로 만들어 낸다.


몸을 새로운 形態로 만들어 내는 것은 變化하는 生命의 要求를 맞추기 위해서 必要하다. 예컨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現實 속에는 親熟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世上에 對해서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의 몸은 능숙하고 조절되지 못한 行動을 보인다. 3개월 된 아이는 그림 속의 계단과 실제의 계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大腦는 어떤 것이 눈의 錯覺인지를 아직 把握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이 되면 아이의 現實이 變化된다. 그 정도 된 아이들은 눈의 錯覺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知識을 이용해서 그들의 몸은 3次元 空間을 좀 더 잘 分別할 수 있게 된다. (거울이 벽 속의 구멍처럼 보이지 않으며, 진짜 계단은 올라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림 속의 계단은 그렇지 않으며, 둥근 것과 판판한 것은 다르다는 등.) 이러한 認識의 變遷은 단지 精神的인 것만이 아니다. 눈과 손을 使用하는 전혀 새로운 方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며, 形像을 認識하고 運動器管을 調節하는 腦의 다양한 中樞의 肉體的인 水準에도 變化가 온다.



새로운 認識이 계속 腦로 들어오는 限 우리의 몸은 새로운 方式으로 反應할 수 있다.

이보다 더 强力한 젊음의 秘訣은 없다. 여든 살 먹은 나의 환자 한 분이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추면 늙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을 成長시키며 이 일이 계속 일어나는 限

시시각각 새로워지려고 하는  存在의 根源 本然의 傾向이 外部로 表現된다.



量子의 世界에서, 變化는 不可避하지만 老化는 그렇지 않다. 우리 肉身의 時間的 나이는 問題가 되지 않는다.

靑年 같은 50代가 지니고 있는 分子와 할아버지 같은 50대의 체내 分子는 나이가 같다. 어느 쪽이나 몸의 나이를

말하자면 50億 살(온갖 種類의 原子의 나이)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살(人體組織 속의 原子가 交換되는 데

걸리는 時間)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혹은 3秒(細胞가 飮食과 空氣와 물을 處理하는 酵素를 交替하는 데 걸리는 시간)라고 할 수도 있다.



事實, 우리는 우리를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情報의 나이 만큼밖에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運 좋은 일이다. 우리는 量子場에 담겨 있는 情報의 內容을 統制할 수 있다. 各 細胞를 이루고 있는 飮食과

물과 空氣 속의 原子에 담겨 있는 情報는 一定量의 固定된 것이지만, 그 情報를 變形시킬 수 있는 힘은 自由意志로

調節할 수 있다. 한 가지, 이 世界에서 당신이 自由롭고 確實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世界에 對한 당신의 解釋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들이 成長을 멈춘 의학적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사회심리적 소인증(小人症)’이라고 불리는 이 증후군은 심하게 학대받은 아이들 가운데서 발생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성장호르몬의 결핍으로 바꿔 놓는다. 이 증상은 성장호르몬은 모든 아이들의 DNA 속에 새겨진

기정(旣定) 시간표에 따라 분비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해석의 힘은 身體 情報의 場에

變化를 일으킴으로써 遺傳子에 새겨진 內用을 無效化시킨다.



解釋은 自身과의 相互作用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이것을 마음속의 對話로 經驗한다. 生覺, 判斷, 그리고 느낌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마음속을 소용돌이친다. “난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것은 겁나지만 저것은 잘 모르겠어.”

등등. 마음속의 대화는 제멋대로 일어나는 精神的 雜音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假定과 信念에 依해서

意識의 深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이 現實에 對해 세워 놓은 어떤 假定이 眞實이라고 生覺함으로써 信念의

核心이 形成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堅持하고 있는 限, 당신의 信念은 身體 情報의 場을 特定한 變數의 범위

안에 가둬 놓는다. 즉, 당신은 어떤 것을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에 맞는가 안 맞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혹은

싫은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혹은 즐거운 것으로 認識한다.



어떤 사람이 認識을 變化시키면 그의 現實 삶에도 또한 變化가 일어난다. 사회심리적 소인증을 앓는 아이들의 경우,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環境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效果를 나타낸다. (자신은 부모가 원치 않으며 가치없는 존재라는 신념이 너무 강하면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몸이 자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양부모를 만나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根本 信念이 바뀌면 그들은 자연의 성장호르몬을 마치 둑이 터지듯이 분비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키와 몸무게와

발육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됨으로써 생리적 차원에서 그들의 개별적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老化에 對한 두려움과 人間은 늙게 되어 있다는 뿌리깊은 信念이 어떻게 老化

그 自體로 變形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强力한 일화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信念이 늙어가는 自畵像을 만들고,

그것들이 自己充足的 豫言(self-fulfilling prophecy) - 마음 속으로 바랐던 것이 실제 결과로 나타나는 것 -

으로서 作用하는 것이다.



이 두려움과 信念의 監獄으로부터 脫出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떠받치고 있는 信念을 뒤엎어야만 한다.

당신의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信念 代身에 당신의 몸은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信念을 키워 가라.

당신의 몸이 마음 없는 機械라는 信念 代身에, 당신의 몸은 生命의 深遠한 知能으로 꽉차 있으며 그 知能의 唯一한

目的은 당신을 북돋우는 것뿐이라는 믿음을 키우라. 이 새로운 信念들은 그저 지니기에 기분좋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事實이다. 우리는 몸을 通해서 삶의 喜悅을 經驗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와 對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願하는 것을 願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7. 分離된 個體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든 것, 우주만물,우리는 모두가 宇宙를 支配하는 知能의 패턴과 連結되어 있다.


우리와 주위의 環境은 '하나'이다. 自身을 바라볼 때 우리는 自身의 몸이 어느 地点에서 끝나 있다고 認識한다.

우리의 몸은 房의 壁이나 집 밖의 나무와는 텅~ 빈 空間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量子의 觀點에서

보면 ‘固形物質’과 ‘텅~빈 空間’의 區別은 意味가 없다. 1입방 센티미터마다 量子空間은 거의 無限大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아무리 微細한 振動이라도 그것은 全切 銀河界 속을 振動하고 있는 廣大한 에너지場의 一部이다. 眞正한 意味에서, 우리의 環境은 곧 우리 몸의 延長이다. 呼吸을 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에 사는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空氣 原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酸素와 물과 햇빛은 우리 체내에 있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願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自身이 接觸하는 모든 事物과 合一되어 있는 狀態를 體驗할 수 있다.

보통의 깨어 있는 意識 狀態에서는 당신은 장미를 만져 보고 딱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事實하나의

波動하는 에너지와 情報의 덩어리인 당신의 손가락이 또 다른 파동하는 에너지와 情報의 덩어리인 장미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과 그 손가락이 만지는 對相은 둘 다 우리가 宇宙라고 부르는 無限한 에너지場의 한갓

微細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러한 眞理가 古代 印度의 聖賢들에게 靈感을 불어넣어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小宇宙가 그러한 것처럼 大宇宙 또한 그러하도다.

原子가 그러한 것처럼 宇宙 또한 그러하도다.

人間의 몸이 그러한 것처럼 宇宙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人間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宇宙의 마음 또한 그러하도다.


이것은 한낱 神秘的인 가르침이 아니라 分離의 狀態에서 意識을 解放시켜 萬物과의 一體性(unity)을 確認한 이들의 實際的인 體驗이다. 一體性 속에서는 ‘외부에’ 있는 意識, 사람들, 事物들, 그리고 事件들은 모두 우리 몸의 一部가 된다. 事實, 우리는 이 影響力들의 中心에 있는, 關係들의 거울일 뿐이다. 유명한 自然主義者인 존 뮤어(John Muir)는 “무엇인가를 따로 집어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宇宙 속의 모든 것들과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결코 稀貴한 經驗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事物들의 주춧돌이다.



一體性의 經驗을 할 수 있는가는 老化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延長된 몸

사이에 調和로운 相互作用이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건강하고 젊은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恐怖는 分離에서

나온다.”고 인도의 성현들은 말한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老化하는가를 깊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자신을 分離된 存在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外部의’ 事物들 사이에 混沌과 無秩序를 만들어 낸다. 最終 狀態의

分離인 죽음은 恐怖스러운 未地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生命의 一部인 變化의 可能性 그 自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恐怖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分離는 곧 喪失을 暗示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不可避하게 暴力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事物들, 事件들이 우리와는 分離되어 있다고

錯覺함으로 因해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願하는 대로 되게 만들고자 欲望한다. 調和 속에는 暴力은 存在하지

않는다. 一體性 속에 있는 사람은 支配가 不可能한 것을 支配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代身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實際로 그의 內面과 그의 延長된 몸속에는 平和와 秩序가 있기 때문이다. 現代의 聖賢인 크리슈나무르티(Jidu Krishnamurti)는 경이롭게 覺性된 意識과 智慧와 줄어들 줄 모르는 活力으로

90여 성상을 살았다. 나는 그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강단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한 여인이 하는 말에 나는 매우 감명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이 한 가지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暴力性이 전혀 없습니다.”



量子的 宇宙觀은 그 방정식과 가정에 관한 限 영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닐스 보어는 物質의 波動的인 屬性을 宇宙心

比較했다. 그리고 어빈 슈뢰딩거는 宇宙는 그 自體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생을 마쳤다.

(이 말은 重力과 다른 모든 힘들이 神의 마음속에 있는 生覺이라고 한 뉴턴의 말을 再確認시킨다.)

眞理인 것은, 人間 自身의 靈魂을 探究하는 일이 언제나 人間을 더 큰 意味의 靈魂의 옆자리로 데려다 놓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만남을 客觀的인 觀点에서 서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때 마음과 몸과

靈魂을 갈라놓았던 境界를 實際로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分離로부터 一體로, 紛爭으로부터 平和로의 變化가 모든 靈的 傳統의 目標이다.



“우리는 똑같은 객관적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대는 世界 속에 있는 自身을 보고, 나는 내 속에 있는 世界를 본다.

이 하찮은 認識의 轉換이 束縛과 解放의 그 모든 差異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自身을 分離되고 외떨어진 存在로 봄으로써 만들어낸 無秩序 속에 拘束되어 있다.

그 완벽한 예가 感情이 격하고 欲求不滿적인 行動을 보이며 끊임없이 마감시한에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A타입의 성격(Type A Personality) - 성급하고 경쟁심이 많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유형.

美國의 心臟醫學者 메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과 로이 로젠먼(Roy H. Rosenman)이 만든 말이다. - 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包容性이나 흐름 속에도 自身을 풀어놓지 못함으로써 自身의 過去 傷處를 噴怒로 키워 간다. 이같이 억눌린 혼란은 적개심과 성급함, 타인에 대한 책망, 까닭 없는 공포로 주변 環境에 投射된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支配하려고 하며 사소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反應하여 자신과 남에 대해 가혹한 非判을 가한다. 특히 사업계에서 A-타입의 사람은 끊임없이 混沌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自身은 성공적으로 경쟁해 나가고 있다고 生覺하는 自己欺慢에 빠진다. 實際에 있어서는 일의 성과는 매우 낮으며 욕구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자신의

延長된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피드백은 육체적 몸속에 더 많은 폐허상태를 만들어 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수치가

상승하고 심장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성 발작을 잘 일으켜 치명적인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危驗이 甚刻하게 높아진다.



A-타입의 性格은 自身의 延長된 몸과 調和롭게 交流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害로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環境 속에서 認識하는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들을 덮쳐 오는 大部分의 老化現狀과 直接的인

關聯이 있다. 우리를 老化하게 만드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認識하는 것이다. ‘저 밖에’ 있는

世界를 危脅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 反應이 가져오는 損傷에서 解放되어 環境과 共存할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늙지 않는 世界를 經驗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重要한 일은

世界가 바로 당신 自身을 確認시켜 주는 知識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8.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萬物의 배후에 숨어 있는 實在는 永遠하다.

   이른바 時間이라는 것은 사실은 計量化된 永遠이다.


우리의 몸과 온 物質宇宙가 끊임없는 變化의 展開이기는 하나, 그것은 過程이라기보다는 實在이다.

宇宙는 생겨났으며 進化하고 있다. 宇宙가 생겨남으로써 時間과 空間이 存在하게 되었다. 大爆發의 瞬間 以前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時間과 空間은 存在하지 않았다. 그러나 論理的인 마음으로는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또는 ‘空間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는 疑問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不可能하다. 아인슈타인조차도

量子理論을 처음 構想하던 젊은 시절에는 뉴턴의 思想에 빠져 宇宙가 變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낡은 觀念을

고수하여, 시간과 공간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永遠한 常數라고 生覺했다.



이 정상(定常)상태(steady-state)의 실재관은 우리의 五感이 아직도 우리에게 報告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時間이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空間이

 擴張되거나 收縮되는 것을 感知할 수가 없으나, 이 또한 리드미컬한 宇宙의 一部分이다. 더 나아가, 時間과

空間이 생겨났던 無次元의 領域을 想像한다는 것은 認識의 急激한 轉移를 요구한다. 宇宙는 모종의 永遠한 根源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自身에게 있어서도 이 永遠한 根源眞理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認識의 轉移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變化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自身이 時間 속에 存在하는 것으로 認識한다.

變化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時間의 흐름, 혹은 連續(순차적 연쇄)이 있어야 한다. 이 連續 속에는

과 後가 있다. 이번의 呼吸 前에는 먼젓번의 呼吸이 있었고, 이번의 심장박동 後에는 다음번의 심장박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理論的으로, 시간과 도구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심장박동에 대한

심전도(心電圖)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출력된 그것을 손에 듦으로써 우리는 過去와 現在와 未來가 한자리에

담긴 지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 훑어볼 수도 있고 위로 거슬러 훑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의 박동과 맨 처음의 박동이 나란히 오도록 접어 볼 수도 있다.



自然界 속의 가장 基本的인 時空間的 事件들에 關해서 量子物理學이 밝혀 놓고 있는 사실이 바로 무시간성이다.

時空間的 事件들이 에너지 狀態를 交換할 때 두 개의 粒子는 쉽게 時間을 거슬러갈 수도 있고 앞질러갈 수도 있다.

過去에 일어난 일이 未來의 에너지 事件에 의해 變更될 수도 있다.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날아가는

고전적인 時間의 槪念은 量子 空間의 복잡한 기하학 속에서 永遠히 깨져 버렸다. 量子空間 속에서는 多次元의

줄과 고리가 時間을 모든 方向으로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것을 停止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唯一한 絶對는 無時間性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온 宇宙가 그보다 큰 實在에서

터져 나오는 一個 事件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과 달과 時, 分, 秒라고 認識하는

그 時間은 더 큰 實在에서 떼어 낸 조각들이다. 無時間性을 마음 내키는 대로 떼어 내는 것은 認識者인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의 意識이 우리가 經驗하는 時間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귀한 생필품으로써

 時間을 經驗하는 사람은, 世上의 모든 時間을 다 가지고 있다고 生覺하는 사람과는 完全히 다른 個人的 現實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늘 時間에 쫓기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빠르고 不規則的인 심장박동과

소화리듬의 교란, 불면증, 고혈압으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숨막히고 공포스러운 ‘時間病’ 症勢에 시달리는가?

이러한 個人間의 差異는 우리가 變化를 어떻게 認識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變化의 認識은 時間의 經驗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過去나 未來에 意識을 두고 있으면, 우리는 時間의 場 속에 갇혀서 老化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한 인도의 스승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過去나 未來 속에서

平生을 보낸다. 그러나 나의 삶은 지금 現在 속에 高度로 集中되어 있다.” 人生이 現在 속에 集中되어 있으면

그것이 가장 現實的이다. 왜냐하면 過去나 未來가 지금 위에 侵透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瞬間에 過去나

未來가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오직 現在의 지금 瞬間만이 存在한다. 過去와 未來는 精神的인 투사

(投射/投影)이다. 당신이 이 投射에서 自身을 解放시킬 수 있다면, 過去를 건져 내려고도, 未來를 어떻게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새로운 體驗空間이 열린다. 그것은 늙지 않는 몸과 時間을 超越한 마음의

體驗이다.



時間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現實과 一體가 될 수 있는 能力은 지극히 重要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時間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老衰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당신은 간단한 心身 訓練으로써 時間을 超越한 狀態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압박감 없이 이완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계를

풀어라. 시계를 들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운 장소에 시계를 놓아두라. 이제 눈을

감고 呼吸을 意識하라. 意識으로 하여금 들고 나는 숨의 흐름을 便安히 따르도록 놓아두라. 호흡의 흐름과 함께

온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고 想像하라. 1, 2분 후에는 따뜻하고 이완되는 느낌이 근육 전체에 퍼지는 것을

 意識하게 될 것이다.



內面的으로 安定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살짝 떠서 시계의 초침을 엿보라. 秒針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이완되느냐에 따라 초침은 다른 行態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秒針이 완전히 멎어 있을

것이고 이런 효과는 1초 내지 3초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0.5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정상적인 째깍거림으로 건너뛸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느려져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時間이 認識의 産物임에 대해서는 결코 疑心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存在하는 唯一한 時間은 당신이 認識하고 있는 時間뿐이다.



당신은 自身의 意志대로 意識을 時間을 超越한 靈域으로 데려가는 方法을 배울 수 있다. 冥想은 이러한 經驗

익히기 위한 古傳的인 技法이다. 冥想中에는 活動하는 마음/意識이 그 根源으로 撤收된다. 이 變化하는 宇宙가

 變化를 超越한 根源을 갖어야만 하듯이, 쉬지 않고 活動하는 당신의 마음 또한 生覺과 느낌과 感情과 欲望과

記憶을 넘어선 意識 狀態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개인적 체험이다. 時間이 없는, 혹은 超越的인

意識의 境地에서 당신은 充滿감을 가지게 된다. 變化와 喪失과 衰退 代身 安定感과 充滿感이 있다. 당신의 意識은 

無限히 宇宙空間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經驗이 現實이 되면 變化와 結附된 恐怖는 사라지고

時, 分, 秒와 날과 달로 쪼개어진 파편들은 副次的인 것이 되고, 每瞬間의 完全性이 本質的인 것이 된다.



이제 冥想은 西洋文化의 主流 속으로 進入했다. 硏究者들은 沈默과 充滿과 永遠이라는 主觀的 經驗을 測定해 내기

위해 科學的 技法들을 動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冥想者의 生理機能이 훨씬 더 效率的으로 발휘되는 狀態로

轉移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수많은 개인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呼吸이 길어지고 酸素 소비량이 줄어들며

新陳代謝率이 떨어진다는 점이 밝혀졌다. 老化와 關係되는 가장 重要한 結論은, 스트레스 - 老化現象을

促進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 와 關聯된 호르몬의 不均衡이 回復된다는 事實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老化와

연관되는 다양한 생리상태의 변화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老化過程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逆轉시키기까지

한다. 超越冥想(TM, Transcendental Meditation) - 인도의 스승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미국에 전파한,

만트라를 통해 意識을 일종의 초월상태로 이끄는 명상기법 - 을 修行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랫동안 冥想을 한 사람은 生理的인 연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2년 정도 젊은 것이 확인되었다.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老化의 生理的 過程 그 自體를 造作할 必要는 없으며 단지

意識을 通해서만도 바라는 結果가 成就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冥想은 사람으로 하여금 時間을

經驗하게 하는 基準이 되는 틀 그 自體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量子 次元에서는, 時間이 그다지 큰 支配力을

지니지 못하는 現實 속으로 마음을 옮겨다 놓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이나 호르몬 수치와 같은 時空間 속의

物理的 事件에 影響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時間이 多樣한 次元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意識

그 모든 次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9. 우리는 모든 變化를 超越한 變하지 않는 現實 속에 살고 있다.

   이 現實을 經驗하면 變化는 우리의 支配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唯一한 生理學은 時間에 根據한 것이다. 그러나 時間이 意識에 從屬된 것이라는

事實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 - 不死의 生理學 - 을 保有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不變性의

經驗을 의미할 것이다. 不變性은 變化의 結果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不變性은 時間에 束縛된 意識으로부터

時間을 超越한 意識으로의 轉換을 요구한다. 이러한 轉換에는 여러 가지 段階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時間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源泉으로 이용하여 成功하고, 어떤 사람은 압박감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創造的으로 反應하는 사람은 時間의 壓迫에 휘말리지 않는 法을 알고 있다. 時間의 압박으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最少한 部分的으로나마 그것을 超越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時間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狀態를 反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細胞는 끊임없이, 온갖 微妙한 方法으로, 時間에 對한 우리의 認識에 自身을 맞추어 나간다. 生理學者라면, 우리가 數百萬의 얽히고 설킨 心身相關的 事件들로 이루어진 一聯의 過程의 連鎖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時間에 얽매인 過程들을 재정돈할 수 있는 어떤 狀態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事實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身體를 腦와 모든 細胞 사이를 往復하는 信號들의

出力物로 生覺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定하는 神經係는 身體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入力物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構成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프로그램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心身相關 體係 속에서는 每秒마다

數千個의 決定이 내려지고 生命의 要求에 附應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選擇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事件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筋肉의 反應일 것이다. 그 反應은 나의 神經係가 보낸 化學的 信號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腦下垂體에서 보내진 特別한 化學物質(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反應하여

副腎皮質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促發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反應과 관련된 分子 次元의 作用을

生化學者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反應하기로 決定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決定者發見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瞬間的 反應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反應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事實은 ‘그 어떤’ 可能한 反應 - 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등 - 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 (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 할 수 있는

無限한 方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瞬間, 나의 모든 基礎 生理機能들 - 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작용 - 은 코브라에게 한 反應이 내가 가지고 있는 ‘意味’에 影響을 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

의 다음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經驗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한 당신의 反應이다.”



당신은 이 意味란 것을 어디에서 發見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大腦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身體 器管은 다른 모든 器管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變化의 흐름 속에 있다. 瞬間마다 腦 속의 數十億의 原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大腦는 一平生 단 한번도 同一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電氣波動로 소용돌이친다. 腦의 基本的인 化學作用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變異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經驗記憶은 變化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記憶은, 그 記憶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經驗을 參考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選擇을 할 수 있는 可能性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選擇하는 意識일 뿐이다. 그 意識은 變化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意味한다. 그러므로 時間에 얽매이는, 日常的 因果의 世界에서 생기는 限界에 制約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過去 언젠가 그 두려움을 學習했다. 나의 모든 反應은 時間에 얽매인 自我와 그것이 지닌

性向의 발로이다. 1,000분의 1秒도 안 되는 時間 속에서 입력되어있던  恐怖가 一連의 身體的 信號의 聯鎖作用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反應을 만들어 낸 것이다. 大部分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過去에 依해 限定되지 않은 意識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決定者(decision maker)에 依해 自身의

正體性을 發見하는 方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歲月동안 形成되어 온 온갖 自己限定 自己規定들이 自動的으로 자리를 잡기 前

純粹意識이 드러나는 瞬間이 있다. 그 瞬間에 우리는 그저 우리 自身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經驗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數秒 내로 나는 自身을 想記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自我의 正體性은 變化의 結果이다. 變化를 超越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變함없는 ‘나’는 經驗에 있어서 나의 眞情한 基準点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基準点은 變化와 衰退와 喪失을 避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相對的 世界

부과하는 모든 時間에 얽매인 條件, 예컨대 苦痛 아니면 기쁨, 貧困 아니면 豊饒, 幸福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同一視되어 있다. 一體意識 속에서는 이 世界는 靈魂(Spirit) 곧 意識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個體意識體인

우리의 至上目的은 靈魂으로서의 眞我와 緊密한 關係를 確立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진아와 緊密한 關係를

만들어 내는 程度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時間을 超越한 마음의 經驗이 實現될 것이다.


 

10. 우리는 老化와 疾病과 死亡의 祭物이 아니다.

     이들은 風境의 一部일 뿐 어떤 形態의 變化에도 물들지 않는 스스로 지켜보는 者는 아니다.


根源的으로 生命은 創造이다. 당신이 自身의 內面의 知能과 하게 되면 당신은 生命의 創造的인 核心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生命의 支配力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分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生命의 支配力이 意識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 -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 - 은 大部分의 基礎 身體機能들이

우리의 意識/마음/精神/狀態에 反應한다는 事實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細胞 속에서 일어나는 數十億 가지의 變化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生命의 光境일 뿐이다. 이 현상 뒤에는

스스로 지켜보는 者가 있다. 그 者는 곧 흐르는 意識의 根源이다. 내가 經驗할 수 있는 모든 것은 意識과 함께

始作되고 의식과 함께 끝난다. 내가 스스로 定하는 모든 目標와 期待値는 意識 속에서 形成된 것이다.

古代의 聖賢들이 眞我라고 이름을 붙인 永遠히 흐르는 意識의 根源은 現代 心理學 用語로 意識의 連續體라고

定義할 수 있다. 그리고 一體意識이라고 알려진 이 意識狀態는 意識의 完全한 狀態이다. 卽, 假面과 幻想

벌어진 틈바구니와 破片이 없는 眞正한 自身의 連續體 全切를 看把하는 狀態이다.



우리는 意識의 連續性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種類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物質的

存在의 領들이 우리 意識의 支配를 벗어나 疾病과 老化와 死亡으로 몸을 이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직 意識

破片化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印度의 저명한 靈性家인 스와미 라마는 意志로써 自身의 心臟搏動數를 70회에서 定常値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能力을 시범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생명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心臟異常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意識의 直接的인 命令下에서

行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事實은 심장박동수가 定常이다가 갑작스러운 異常으로 불과 수분만에 죽는 사람들

[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이 實際로는 意識의 損傷을 입었다는 것을 暗示한다. 우리는 우리의 物質主義的 世界觀에 비추어 이러한 意識損傷의 原因을 心臟筋肉의 탓으로 돌린다. 卽,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主管하는 電氣化學 信號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數十億個의 細胞들이 全切의 柔軟하고 統一된 運動으로 調和를 이루지 못하고 諸各各으로 混亂스럽게 收縮하여 心臟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心臟專門醫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光境은 2次的인 現狀일 뿐이다. 心臟細胞 가운데서의

意識 損傷이 1次的인 原因이다. 이 意識의 損傷은 局部的인 손상이 아니라 全般的인 손상이다. 患者 自身의 意識이

自身의 모든 몸 細胞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深層次元의 宇宙知能과의 通信網를 잃어버린 것이다. 實相, 모든 細胞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多樣한 層의 패턴으로 組織된 宇宙知能 外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

같은 道人은 우리의 意識이 결코 그처럼 조각조각 破片화되고 縮小되어야 할 存在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만일 人間이 自身의 眞情한 모습(存在의 本質)을 알게 되면, 그는 自身이 이 知能의 흐름의 根源이며 經路이며

目標임을 깨달을 것이다. 世界 宗敎 傳統이 (Spirit)이라고 부르는 그 宇宙知能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全切(wholeness),  意識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바라보고 있는 宇宙意識의 連續體이다.



우리는 우리 自身에 對한 知識이 없었기 때문에 疾病과 老化와 死亡의 祭物이 되어왔다. 意識을 잃는 것은 知能

잃는 것이고, 知能을 잃는 것은 知能의 最終産物인 人體에 對한 支配力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敎訓은 이것이다. 卽, 몸을 變化시키고 싶다면 먼저 意識

變化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現象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 生覺의 結果이다.

 

第1次 世界大戰의 海戰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戰艦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 狀況에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군인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前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經驗이 있는 베테랑 군인들은 危險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經驗이 없는 젊은 군인들은

自身이 絶望的인 狀況에 처해있다고 生覺했기 때문에 먼저 죽어갔던 사실을 알아내기 前까지는 이 現象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事例에서 단서를 잡아, 動物實驗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狀況에 處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老化시키거나 病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도 그러한 狀況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 狀況을 絶望的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抛棄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 속에서

段階的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 狀況을 견뎌 내어, 細胞가 스트레스에 依해 破壞되는 症勢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歲月 동안 人間의 老化는 大部分 絶望 때문이라고 規定할 수 있는 現象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想像이 老人들의 높은 發病率과 老人性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自己充足的인 期待를 가져다 주었다. 老年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虛弱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 社會 全切는 老化에 對한

새로운 自覺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老人들이 40, 50대의 元氣旺盛한 健康狀態를 當然한 事實로

期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假定 - 人間은 늙어‘야만’ 한다는 名題 - 은 그리 크게 變하지 않았다.

나이 먹으면 늙어야만 한다는 生覺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遺産으로서, 意識의 轉換이 새로운

事實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宇宙觀 속에 하나의 事實로서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宇宙觀이란 宇宙의 無限한 可能性의 에너지를 어떤 論理的인 틀 속에 整敦하는 하나의 方式論일 뿐이다.

老化라는 현상은 모든 것이 變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自然界의 틀 속에서는 合理性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老化現象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宇宙知能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世界 속에서는 그

合理性을 喪失해 버린다. 어느 쪽의 觀點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選擇에 달려 있다. 당신은 老化現象을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現象으로 보기도 할 수 있고 또는  끝없는 生命의 물결 흐름으로 볼 수도  있다.

다음 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物質은 時間과 空間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瞬間이다. 우리 自身과 宇宙를 有物的인 視角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宇宙의 유폐된 側面이 過度한 重要性을 지니게 만든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러분들의 宇宙觀이 바뀔 때 存在란 것이 얼마나 柔軟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固形的인 物理的 外樣에도 불구하고 흡사 江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神性한 江 말이다. 이 책 속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自身의 平和를 찾는 場面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江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內面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 온다. ‘이 江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生命의 過程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江과도 같이, 나의 몸은 瞬間의 바뀜과 함께 變化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人生에 어떤 空白도, 새삼스러운 苦痛을 일으킬 過去의 어떤 아픈 記憶도, 두려움을 가져올 未來의 傷處에 對한 豫想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生命 이다. 그러면서도 그 몸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認識조차 要求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있는 어떤 知能이 몸 속에 우리 意識과 함께

깃들여 있음을 發見할 것이다. 그 知能은 學門的인 知能이 아니라 하나의 細胞 속에 짜여 들어 있는 數百萬 年 동안 

蓄積된 智慧에 버금가는 그런 知能이다. 學問的인 知識은 그 知能처럼 雄大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江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願했다. 이 点이 至極히 重要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願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하나됨'은 당신의 낡은 觀點이 看過해 왔던 偉大한 知能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에게는, 이 江과 그 秘密을 理解하는 者는 누구나 以前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秘密들을, 아니 모든 秘密을 理解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現象은 모두 당신의 몸 속에

細胞 속에 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重要한 사실은, 새로운 可能性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老化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現象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事實은 老化는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身體는 細胞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入力시킨 情報를 修行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大部分이 당신 自身

意識하지 못하는 信念과 假定에 支配받는 無意識的인 情報여서, 당신이 알고 있는 情報와 같은 物質世界를 가져다

준 思念體係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매우 重要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必要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肉體的 自我에 對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瞬間의 느낌에 대해서 便安해지면, 秩序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恐怖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世界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世界이다. 그러나 또다른 方式이 있고 다른 世界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江에서 배운 가장 큰 敎訓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江의 秘密을 깨달았는가? 時間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은 同時에 모든 곳에 存在하지. 그 根源에도, 下流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江에게는 過去의 그림자도, 未來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現在만이 存在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人生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江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實在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幻影)에 依해 分離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數世紀에 걸쳐 物質主義가 造張해 온 妄想은 우리가 江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統制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唯一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各者에게 眞理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큰 經驗의 場으로 擴張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存在 속에 集約되는 에너지, 情報, 그리고 知能에는

限界가 없다. 이러한 無限의 可能性과 創造性은 그 肉的인 形態로서 당신의 細胞 속에 肉化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形態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可能한 모든 意味, 可能한 모든 眞理, 可能한 모든 創造로 充滿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沈默 속에 表現되어 있다. 모든 原子의 核心 속에 存在하는 은 宇宙의 子宮이다.

두 개의 뉴런이 想互作用할 때 明滅하는 思念 사이에 새로운 世界 誕生의 機會가 存在한다. 이 책은

時間의 呼吸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마음의 沈默의 探思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