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常한 줄 알지만 닦고 莊嚴하는

‘水月道場’이 바른 불교계 ‘報身’

 

 

<檀經> 본문을 다시 보자.

“무엇을 圓滿 報身佛이라고 하는가. 한 등불이 能히 千年의 어둠을 없애고, 한 智慧가 能히 萬年의

어리석음(癡心)을 없애나니, 過去를 生覺하지 말고 恒常 未來를 生覺할지니, 恒常 未來의 生覺이

착한 것을 이름 하여 보신불(報身佛)이라 하느니라.”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를 생각하라’ 는 말은 <금강경>의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다. 모든 것이 緣生緣滅이기 때문이다. 찰라에 흐르는 강물에 발 씻은 물이 어디 있는가? 固定된 實體가 없는 緣起法이다. 그러 한 生覺,智慧, 등불이 밝아지면, 過去 生에 익힌 習도 없앨 수 있다. 千年의 어둠도 한 등불에서 밝아진다는 말이다.

 

<千手經>에도 같은 內容의 구절이 나온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자성이 없는데 習이라는 無明 業識에 依해 일어난 마음을 좇아 생겨난 것 뿐이다. 無明業識 마저도 錯覺에서 일어난 實體가 없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 그래서 마음이 멸하면 그 죄도 한 순간에 멸한다. 正見이 서서 本來 實體가 없는 空空寂寂한 空寂靈智의 本來 無心자리를 보게 되면, 마음이 滅하면서 그 罪도 같이 滅해버린다. 그래서 我도 滅하고 罪도 滅하는 ‘兩俱空’ 이 된다.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이다. 兩俱空이 되면 眞懺悔다. 그래서 罪라는 것은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다.

 

<단경>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한 生覺의 惡한 果報는 千年의 착함을 도리어 그르치게 하고, 한 生覺의 착한 果報는 천년의 惡을 물리쳐 없애나니,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未來의 生覺이 착함을 보신(保身)이라고 이름하느니라. 法身을 좇아 生覺함이 바로 化身이요, 生覺마다 착한 것이 바로 報身이며,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음이 바로 귀의(歸依)라 이름 하나니.”

 

 

  
 

本來 自性은 淸淨한 텅~빈 空한 자리이기 때문에 물드는(染) 자리도 아니고 얻는 자리도 아니다.

無明이 實體가 없는데 왜 닦아야 하는가? 선가(禪家)에서는 수월도량(水月道場)이라고 한다.

本來 空寂靈智한 자리가 水月道場이다. 水月은 ‘實體가 없고 모든 것이 宇宙法界의 因緣에 依해

還生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비록 因緣에 依해 환생(幻生)된 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일으켜야하고 닦고 莊嚴해야 하고 만들어야한다. 永劫의 눈으로 볼 때 절 하나도 몇 천년 가면 티끌이 되는데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無常에만 젖어 있고 寂寂에만 젖어있으면 世上이 어떻게 부처님의 法이라고 할 수 있는가. 寂寂함에도 불구하고 菩薩의 靈智가 있기에 水月인줄 알면서 補修해야 하고 莊嚴해야하는 것이다. 그게 因緣法을 바로 보는 눈이며 報身이다.

 

불자나 스님들 중에서도 因緣法을 잘못 보고 ‘世上이 다 無常한데 할 것이 뭐 있는가’, ‘뭘 중이 그런

것을 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뭘 그래 無常한데' 이렇게 反應하는 분들이 많다. 이렇게 잘못 공부하면 寂寂에 빠져 할 일 없는 사람이 된다. 머리로만 하는 불교가 돼서, 마른 자리만 피해 다니면서 菩薩行은 하지 않고 待接만 받으려는 얌체 없는 僧家 生活을 하게된다. 法이 어떻다느니 아는 것은 있다 보니

대접은 받고 싶은데 남들도 보는 눈이 있어서 제대로 대접을 안해주니 자기 대접 안 해준다고 스스로 학대하고 항상 남에게 怨望을 돌린다. 이런 사람은 法을 어설프게 알고 自己를 사랑하는 法을 모르기 때문이다.

 

中道 正見을 제대로 알면 世上의 어떤 境界가 몰려와도 그 境界를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自己 判斷下에 決定한다. 어떤 境界이든 그것이 나에게 들어와서 上求菩提가 되느냐 下化衆生이 되느냐, 나를 地獄으로 몰아넣느냐 학대하는 苦痛이 되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 이것이 바로 圓滿報身佛이다.

[불교신문3008호/2014년5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