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念卽時無量劫 (일념즉시무량겁)
한 生覺, 한 찰나가 限量한 時間이며 衆生의 業이 修行에 依해 智慧로 轉換되어 眞如空性에서 나투는 時間의 無自性을 如實히 알아차릴 때, 마음에 일어나는 한 瞬間의 時間이 無量한 時間이 됩니다.
無自性, 緣起의 한 울림
모든 法은 다 괴로움이다라는 가르침은 三法印의 하나입니다. 모든 分別은 마음에 依해 이루어지며
分別은 自己의 삶에서 疎外된 모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외된 모습이란 한 쪽에 치우친 모습으로
常住論이나 斷滅論을 삶의 指標로 삼는 것이 代表的인 例입니다. 이는 無常과 無我를 잘 알지 못하고
無常 無我 가운데 하나를 삶의 本質로 삼는 경우입니다.
眞如空性의 흐름은 前刹那와 後刹那가 因緣條件에 따라 變하면서 各 個體가 그 自體의 正體性을 維持합니다. 예를 들면, 먼 곳을 볼 때와 가까운 곳을 볼 때 눈의 狀態는 變하지만 본다고 하는 正體性을 유지함과 같습니다. 變化와 正體性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兩面性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時間의 길이를 갖지 않고 瞬間瞬間 因緣條件의 變化를 말하는 無常은 오히려 時間을 넘어서 變하지 않는 가운데 變한다고 했습니다.
變化는 變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變化의 立場에서 보면 連續되지 않으나 變化하지 않는 데서 보면 오히려 連續되고 있습니다. 連續과 不連續이 無常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連續인 眞如空性만을 이야기하거나 不連續으로 變化(隨緣)만을 이야기하면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됩니다.
無我도 마찬가지입니다. 結定된 實體가 없는 眞如空性에서 오하려 모든 現象界가 因緣條件에 따라 各各의 正體性을 維持할 수 있습니다. 無我이기 때문에 現象界가 各各 제 모습을 띠고 그렇게 存在하며,
現象界의 모습 그대로 無我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現象界의 모습을 否定하기만 하거나 現象界의 모습을 그대로 肯定하기만 하는 것은 자기의 삶을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連續과 不連續, 肯定과 否定을 貫通하고 있는 緣起實相을 알지 못할 때 삶의 모든 것이 괴롭습니다. 삶의 苦痛은 삶의 本質이 괴로움이 아니라 本來 모습을 如實히 알지 못해서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바꿔 말하면 깊은 修行으로 眞實한 삶의 모습을 가로막는 三毒心이 사라졌을 때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니 이를 일러 涅槃寂靜이라 말합니다. 이 關係를 唯識에서는 依他起性, 遍計所執性, 圓成實性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緣起法의 依他起性에서 나투는 모든 衆生과 事物들을 諸各各 自性이 있다고 할 때, 遍計所執性인 苦의 世界가 있으며, 이들 모두가 無自性으로 緣起의 한어울림임을 如實히 알 때 圓成實性으로 涅槃의 世界가 열립니다. 이렇듯 衆生의 世界와 涅槃의 世界를 묶어 세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根幹은 依他起性, 즉 因緣條件의 變化에 依해서 모든 것이 存在한다는 事實입니다. 때문에 한 生覺이 일어나는 瞬間이 原因이 되어 限量 없는 時間이 結果로 있게 됩니다.
또한 生覺이 일어나는 한 瞬間은 그 自體로서 時間의 길이를 갖지 않은 空性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바꿔 말하면 時間의 自性이 없기 때문에 모든 時間의 原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原因은 結果인 모든 時間에 依해서 다시 結果가 되기 때문에 原因과 結果가 한 모습으로 있게 됩니다. 이것은 前後刹那의 흐름의 因緣 條件의 變化를 그대로 나타내면서도 그 가운데에 아무런 固定된 實體가 없는 空性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原因과 結果로 存在하고 한 瞬間 그대로 모든 時間의 屬性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든 다른 時間이 原因이 되어서 마음에 일어나는 時間인 한 瞬間을 이루고, 이 한 瞬間이 原因이 되어서 모든 다른 時間을 이루는 關係에서만 한 瞬間과 모든 時間이 連續과 不連續, 肯定과 否定으로 時間의 特性인 變化를 나투는 것입니다.
一定하게 固定되거나 停止된 狀態만을 認識하는 衆生의 業이 修行에 依해서 智慧로 轉換되어서 그 智慧로 眞如空性에서 나투는 時間의 無自性을 如實히 알아차릴 때 한 瞬間의 時間이 無量한 時間과 아무런 差異가 없음을 分明하게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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