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仍不雜亂隔別成

장백산-1 2014. 10. 11. 13:22

 

 

 

仍不雜亂隔別成 (잉불잡란격별성)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

 

因緣의 條件에 따라 모든 것이 存在한다고 하면 獨立된 個別者로서 實體가 없기 때문에

諸各各이 스스로 正體性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因緣關係에 따라 各者의 모습을 維持할 수 있도록 끊임 없이 變化하기 때문에

오히려 諸各各의 正體性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無常, 無我의 變化만이 삶일 수 있으며 여기에서 諸各各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하나하나의 時間이 그대로 十世의 全切 時間이 되면서도

하나하나는 各己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서까래가 집 全切를 이루는 總相이지만 서까래 모습으로서 總相인 것과

같습니다. 한 瞬間의 時間이 모든 時間을 包含고 있다고 해서 뒤죽박죽된 時間이 아니라 各各의 時間 그대로를

分明하게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 그루의 나무라도 그것이 存在하게 된 배경은 宇宙法界가 그 나무가 存在할 수 있는 因緣 條件을 造成했기

때문입니다. 宇宙法界가 한 그루의 나무 속에 宇宙法界의 因緣의 힘을 그대로 보냈기 때문에 한 그루 나무이면서도

宇宙法界 全切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의 모습을 버리고서 宇宙法界의 氣運을 나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華嚴世界의 부처님을 비로자나佛(毘盧遮那佛) 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비로자나佛의 얼굴은 衆生의 數만큼

多樣하다는 말입니다. 自己가 있는 時間 空間을 여의지 않고도 온 宇宙世界에 두루 나툰다고 이야기 하는 華嚴의

가르침도 여기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나뭇잎은 나뭇잎의 모습대로 비로자나佛이 되어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나투고, 나비는 나비대로 自己 모습을 하면서 비로자나佛로 나툼니다. 온 宇宙世界의 事物과 衆生들이 한 치도 제 모습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비로자나佛과 비로자나佛로서 을 나투고 있으며 이 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처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事實 이와 같은 世界는 부처님의 말씀 "와서 보라"에서 나타나듯 實踐을 通해 證得됐을 때 이미 우리에게 있는 世界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禪을 화엄(華嚴)의 實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華嚴의 理解가 理解로 그쳐서는 華嚴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華嚴의 理解가 그대로 삶의 全部가 됐을 때만 華嚴이 華嚴이며 實踐된 禪으로서의 華嚴입니다.
 

坐禪의 모습으로 이 이야기를 展開해 봅시다. 房 안에 한 坐禪 修行者가 앉아 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가 그 狀況을 華嚴의 生覺으로 파악해 봅시다.

 

앉아 있다고 하는 禪 수행자의 活動은 그 사람과 房과의 因緣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사람을 中心으로

해서 앉아 있다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앉아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앉아 있을 어떤 곳, 곧 여기서의 房이 必要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앉아 있다는 말과 房이 앉아 있다는 말은 한치의 誤差도 없이 같은 말입니다.

房과 앉아 있는 수행자가 없으면 앉아 있는 行爲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앉아 있다고 말함은 그 狀況을 正確히 가리키는 말이 아니며 房이 앉아 있다고 말함도 그 事實을

正確히 傳達한 말것이 아닙니다. 房과 修行者가 함께 앉아 있다고 말함도 물론 正確하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境遇는 앉아 있는 事實/狀況에 依해서 앉아 있는 房과 앉아있는 수행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앉아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앉아 있는 行爲가 이루어지기 前에는 앉아 있음이 없었으며,

앉아 있음이란 그 밖의 다른 行爲에 相對하여 이름붙였기 때문에 다른 行爲가 前提되지 않으면 그 뜻이 없기 때문이다. 즉 걸어 감, 서 있음 등에 依해서 앉아 있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앉아 있음을 또한 서 있음이라고 해도 아무런 差異가 없습니다. 앉아 있음은 무엇의 앉아 있음이 아니라 宇宙法界의 모든 活動의 因緣이 앉아 있음으로 나툰

것이면서도 앉아 있음을 허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르기 以前에 이미 앉아 있음으로 存在할 수밖에 없습니다.

言語 表現 以前에 그대로 앉아 있음일 뿐으로 이 또한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앉아 있음은

어떤 하나의 事實을 指稱하지만, 實在에 있어서는 그 自體가 宇宙의 모든 모습의 나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言語 表現 以前에 眞如空性이 自身의 모습을 固執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그것 自體로 眞如自性을

나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뒤섞여 混亂스럽지 않고 各者의 모습 그대로 全切이면서 同時에 自身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禪의 實踐은 이 대목에서 언어 이전에 그저 앉아 있음이지요. 이 자리 곧 앉아 있음이 서 있는 모습이며 이 行爲를 하고 있는 主體도 나이면서 너이며 너이면서 房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뜻을 가지고서 分明한 意思疎通을 하고 있다고 生覺하는 우리의 日常言語 生活로는 이 자리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일상의 언어로서 이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니 言語에 대한 바른 理解가 必要합니다. 그래야만 限定되지 않는 言語에 대한 眼目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限定되지 않는 眼目을 텅~빈 마음의 自己表現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一切가 眞如空性의 나툼으로 서로가 서로의 삶의 根據가 되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全切가 되고 있는 事事無碍

表現입니다.

 

 

 
좌선(坐禪)의 앉아 있는 行爲만이 아니고 행선(行禪)의 걷는 行爲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땅이 걷는 것이며 걷는다는 行爲 그대로 앉아 있음이요 말함입니다.

 

 

 
어떻게 이 行爲를 總體的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할(喝)이나 방(棒)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때입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理解가 또한 禪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差異가 있으니, 禪은 分別意識으로 이루어진

하늘과 땅만큼이나 差異가 있으니, 禪은 分別意識으로 이루어진 언어(言語)와 사유(思惟) 以前이라서

業이 모두 消滅됐음을 말합니다. 言語와 思惟의 世界가 그대로 衆生의 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禪의 現場性과 卽興性 등을 이야기할 때 그 內容은 我執 法執의 모든 煩惱가 다 사라진 곳에서 나온

完成된[波羅蜜] 삶입니다. 깨어 있는 때는 물론이거니와 꿈속에서나 깊은 잠 속에서도 한 톨의 煩惱 씨앗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成就하기 以前은 모두가 衆生으로 업(業)에 매여서 사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바로 前의 境地에 오른 수행자인 金剛兪定도 衆生이라고 大乘起信論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單純한 새로운 見解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一切의 煩惱가 다 끊긴 곳에서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觀察하며 그 가운데서 菩薩의 同體大悲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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