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發心할 때가 바른 깨달음이며
世上의 모든 法들은 서로가 서로를 全切로 살게 해주면서 그로써 自身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華嚴의 重重無盡緣起法界이며 그대로 毘盧疵那佛의 世界입니다.깨달음을 向한 '한마음'은
부처님의 모든 功德을 나투는 '全切'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깨달은 마음
앞서 말씀드렸던 中心이면서 周邊이며, 主人이면서 客인 우리 自身의 모습을 다시 한번 想起시켜 봅시다.
또 나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너라는 이름을 依持해서 可能하다는 緣起法도 아울러 生覺하십시오.
아니고 2에서 10까지의 數字가 뒷받침되어야만 1이란 숫자가 뜻을 갖게 되며 아울러 根本 數字인 1이 없으면 2에서 10까지의 숫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1이 모든 숫자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1이 모든 숫자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에서 보면 1이 모든 숫자가 됩니다.
한 世界를 이루고 그 生覺이 사라지는 瞬間 온 宇宙가 사라지는 法으로, 다른 世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生覺生覺마다 온 宇宙가 全切로 그 生覺을 이루고 새롭게 새롭게 創造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世界를 向해 마음을 내는 것 自體가 깨달음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根據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나투는 전체로서 깨달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떠나서 緣起實相의 부처님 德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님의 正覺입니다.
이는 緣起實相의 다른 이름이 正覺이며 如來法身 法身자리이기 때문입니다.
緣起하고 있는 一切의 圓融한 日常의 法들이 바로 如來法身의 온갖 德相의 나툼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봅시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의 그 낱낱의 事件들이 現實입니다. 이 現實의 삶, 곧 個人과 社會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事件들에 對해 그 本質을 잘 알지 못하면서 慾心내거나 성내는 삶이 우리에게 不滿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보면 그것은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는 分別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의 主人은 自我意識입니다. 不滿足[苦]의 主人은 人生이 아니라 人生을 잘못 아는 自我意識이
삶의 根據[集]가 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괴로움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선정수행만으로는 生死란 本來 自我意識이 主人을 이루는 衆生의 마음에
依해서 되풀이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게 된 마음에서 不滿足/苦가 일어남을 모를 뿐만 아니라, 不生不滅의 生死가 없는 법신 자리가 삶의 本來 모습이며 그 自體로 모든 法들을 創造하고 있는 나눌 수 없는 한 世界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것도 없다는 선정조차 超越하여 거칠은 煩惱는 다 消滅됐으나 [非想] 아직 微細妄想이 남아 있는[非非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完全히 이루고서도 苦를 完全히 消滅시킬 수 없었고, 苦의 發生의 原因인 執着 곧 自我意識에 依해서 發生하는 生死의 모습을 如實히 지켜보는 염처(念處)修行을 통하여 苦를 完全히 消滅시켰던 經驗에 의한 것입니다.
삶의 實相인 緣起法의 가르침을 펴시게 됐습니다.
아는 般若波羅蜜[智慧]을 함께 닦는 것이 선정만을 수행하는 수행자들과는 다른 불교 수행자의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염처수행[定慧雙修]의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이미 깨달음을 이루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수행으로 모든 중생이 因緣法의 實相인 깨달음을 成就한 모습으로 있음을 알 때만이 完全한 깨달음을 成就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衆生들의 삶인 因緣法이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衆生界를 떠나 깨달음의 世界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합니다.
위한 후득지(後得智)가 갖추어 졌을 때만 完全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심(菩提心)과 대원력(大願力)이 보살의 삶이어야만 하는 것도, 衆生界가 그대로 緣起實相인 깨달음의 世界를 나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처음 낼 때부터 完全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