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理와 事가 하나되어 分別이 없으니
보면 認識 對想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對相이 그대로 一切 萬相으로 나툰 .마음에서 對相을 對相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華嚴에서 말하기를 三界가 오직 마음[三界唯心]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없고 對相으로 獨立된 實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마음이 아닌 데서 마음이며, 對相도 對相이 아닌
데서 對相임을 如實히 아는 것이 自己 스스로를 아는 것입니다.
보면 認識 對相으로 限定된 듯하지만 이 對相이 그대로 一切萬象으로 나툰 마음이니 마음에서 對相을, 對相에서
마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關係를 冥然, 곧 差別을 꿰뚫고 混然一體로 하나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對相은 또한 그대로 眞如空性의 自己 나툼이니 空性인 듯하면서 마음으로 對相으로 나투고, 마음인 듯 對相인 듯하지만 그대로가 空性을 나투고 있으니 空性과 그 나툼의 關係를 하나되어 分別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득이 理와 事로 나눈 줄을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은 言語가 갖는 限界를 극복하기 위한 方便으로, 언어표현이되 언어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실천의 세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누기도 합니다만 實踐이 關係되지 않으면 知識이든 智慧든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智慧一致란 쉽지 않기 때문에 理致를 아는 것은 바로 되지만 그것을 그대로 行하는 데는
차근차근 익혀야 한다[理卽頓悟 事非頓徐]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緣起實相의 理法界에서 보면 理와 事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낱낱 現象의 나툼인 事 그대로가
緣起實相의 理이기 때문입니다. 곧 理가 있고 事가 있는 것도 아니며 事가 있고 理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理이기 때문입니다. 곧 理가 있고 事가 있는 것도 아니며 事가 있고 理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理와 事는
圓融한 한 모습이며 事를 貫通하고 있는 理인 空에 依해서 事事가 다시 圓融無碍한 한모습이 됩니다.
온갖 모습들이 그대로 비로자나佛의 나툼이기 때문에 事物과 事物, 衆生과 衆生의 圓融한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圓融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修行者가 菩提心을 낼 때 이 菩提心은 修行者의 衆生心에서 나오는 마음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智慧光明인 佛性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修行하는 마음 그대로가 佛性으로, 佛性이 修行에 依해서 나타나는 佛性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한 마음 한 衆生 한 事物 그대로가 佛性이지, 修行하는 마음 안쪽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佛性이 아닙니다.
때문에 처음 菩리提심을 낼 때 그 마음이 그대로 온전한 佛性인 줄을 確實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眞實을 如實히
아는 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이 信心 그대로가 온전한 佛性이며 이것은 온 중생들의 生命의 빛을 그대로
나툰 것이기 때문에 처음 菩提心을 낸 修行者는 一切 衆生을 다 濟度하겠다는 願力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菩提心과 大願力으로 나서는 修行의 첫 걸음이 부처님의 世界를 이루는 原因이자 結果가 되는 것도 이 까닭입니다.
大願力이란 모든 衆生이 스스로의 生命體이면서 宇宙法界가 한 生命,한 뿌리로 關係 맺고 있음을 如實히 아는 데서
出發합니다. 여기서 앎이란 實踐을 뜻하기 때문에 發心修行者란 菩提心에 對한 確實한 믿음과 大願力의 實踐이 恒常 함께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