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삶을 如實히 아는 淸淨한 마음
이루는 根本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因緣關係에서 모든 중생과 사물들이 부처로서 제 모습을 나투고 있는 것이지요.
主人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能力者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緣起世界를 成立시키는 根本이 바로
各各의 모든 것이며 그 自體가 能力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法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法이 일어나면 모든 法이 일어나고, 마음法이 있으면 모든 法이있고 마음法이 없으면
모든 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中心이 마음을 떠나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곧 마음이 能人이며 부처님(佛)이며 華嚴法界를 이루는 비로자나부처님의 實相입니다. 그래서 옛스님들께서는 마음 밖에서 부처를 求하는 것을 外道라 하셨습니다. 外道란 부처님 가르침 以外의 모든 가르침을 뜻합니다만 이 가르침조차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求한다면 삶의 眞實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삶의 歪曲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人類史가
온갖 不滿足스러운 일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그 原因이 마음 밖에서 實다운 法을 求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正確히 알지 못하고 그저 일어나는 마음대로 活動하면서 不滿足스러운 生活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그 證據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習慣的으로 일어나는 欲望을 持續하고자 하는 마음의 作用을 行이라하고
이 行을 지멸(止滅)하는 것이 修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 生覺이 일어나니 三界가 열리고 한 生覺이 그치니 法界가 열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마음이 흔들림 없이 便安했는지,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이 얼마나 얽매여 있었는지,
그래서 金剛經에서는 어느 곳에도 얽매임이 없이 마음을 내어 쓰라고 하였습니다.(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음에서
일어나는 欲望을 붙잡아 집착하려고 하는 마음이 머물러 얽매이는 마음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業이라고 합니다.
훤히 알고 있는 自身의 모습이 스스로의 業이며 이것에 依해 끊임없이 속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지요.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業의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주시해서 지켜보십시오. 마음이 主人입니다만은
마음 또한 제멋대로 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제 모습을 結定하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瞬間瞬間 그와 같이 있다가
사라져 갈 뿐, 習慣的으로 이어가는 것이 眞實한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지켜보기는 스스로에 限定되어 있는 마음 지켜보기가 아니라 限定된 마음의 結定을 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때 온 宇宙의 마음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어느 하나 빠짐 없이 모든 衆生과 事物들이 宇宙마음 가운데에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투게 됩니다.
이 世上 宇宙 어느 것도 그 自體만으로써 自身의 生命을 이룰 수 없으며 어느 것도 緣起關係의 그물網을 떠나
外的 存在에게서 生命을 賦與받는 것이 아님을 分明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生命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의 法界를 이루고 있고 나아가 하나의 모습으로 法界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生命의 場을 演出하고 있습니다.
三昧 中의 三昧입니다. 왜냐하면 自我意識이 完全히 脫殼된, 곧 業의 主體가 虛相임을 分明히 알고 모든 業이
完全 消滅된 無我의 智慧와 慈悲가 充滿된, 分別 以前의 맑고 청정한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海印三昧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生死가 苦를 낳는 것은 生死 自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生死를 虛相의 自我와 結附시켜 執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生死를 如實히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生死를 如實히 알게 될 때 生死에서 벗어나며
海印三昧에서 사는 것입니다.
宇宙生命의 場 全切를 스스로의 모습으로 하고 있는 때를 '海印三昧 가운데'라고 表現하고 있습니다.
하나된 世界로 있는 것을 나타내며 이것을 중(中)'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