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十佛普賢大人境

장백산-1 2014. 10. 11. 13:16

 

 

 

 

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큰사람의 경지네

 

 

텅~빈 모습 속에 나투는 智慧德相의 부처님 世界가 菩提心이며 大願力이니

 

10佛은 菩提心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大願力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말로 나타내자니 큰사람의 경지라 하고 있습니다.

 

 

 

 

마음 하나 꿰뚫어

 

 

 

지금까지 空性緣起인 一法界의 世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말이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말과 생각으로 부처님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 없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갖는 한계를

如實히 알지만 또한 그것이 우리 일상에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生覺이 비록 부처님의 세계인 진제(眞諦)를 나타내기에는 不足하지만 부처님세계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말과 생각이 훌륭한 方便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생각의 方便을 빌려서 나타낸 부처님의 세계는 어쩌면 중생의 수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릅니다. 말과 생각이

그 낱낱에 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업(共業)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內容의 微妙한 差異는

별업(別業)으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華嚴의 부처님세계는 一法界로 비로자나佛의 世界이면서 同時에 모든 衆生과 事物의 얼굴 그대로 낱낱 부처님이 重重無盡으로 무한히 겹쳐 있는 세계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無限히 겹쳐 있으면서 緣起實相인 비로자나 부처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重重無盡으로 무한히 겹쳐 있되 낱낱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無限한 부처님을

화엄에서는 完全數를 나타내는 10을 써서 10佛이라고 합니다. 10佛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부처님하면 歷史的인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신 이후에는 부처님의 法을 부처님의 몸으로 代身하니 五分法身(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등이 그것입니다. 나아가 華嚴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主佛로 모시는데 緣起實相의 법(法)을 부처님으로 모신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法身, 報身, 化身의 三身佛이 있게 됩니다. 모든 중생과 낱낱의 사물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華嚴의 法身思想뿐입니다. 緣起法이 法身佛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緣起法이란 靜的인 相關關係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나타내게도 하고 없게도 하는 등

끊임 없는 變化의 동성(動性)을 同時에 뜻합니다.

 

 

이 動性의 나툼이 모든 중생과 낱낱 사물의 모습인데 이들이 곧 부처님의 智慧 덕상(德相)입니다.

모든 모습이 제 모습이면서 同時에 모든 모습일 수 있는 相卽相入의 功能을 報身이라고 말합니다.

 

 

法身, 報身의 두 분 부처님께서 萬物의 얼굴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 있으니 이를 化身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萬物에서 보면 化身으로 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貫通하고 있는 것은 法身과 報身입니다.

 

 

이 관계를 앞서 일(一)과 다(多), 일념(一念)과 무량겁(無量劫)의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이 바로 三身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의 모습을 떠나서 三身이 있다고 하면

불교 以外의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三身佛이기 때문에 낱낱의 제 모습만으로 自己를 삼는다면

진정한 제 모습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三身佛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大願力의 慈悲行입니다. 이런 중생을

菩薩이라고 부르며 普賢菩薩이 그 代表입니다. 그러나 보현보살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을 떠나서 저 멀리 훌륭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慈悲를 實踐하고 있는 衆生의 活動이 普賢菩薩의 모습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智慧德相이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움으로 나투는 화신 부처님의 행동이 보살의 원력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세게에 들어가기 바로 直前의 모습으로 중생세간에 있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을 보살이라고 하여

부처님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만 眞正한 菩薩의 모습이 곧 부처님(佛)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世界를

나타내는 것이 涅槃의 世界인데 菩薩은 이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습, 곧 열반을 구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부처님의 바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능가경>에서 보살이 열반을

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完全한 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를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空 그대로 색[空卽是色]이라고 말했습니다. 眞理의 世界를 完全히 具現했으면서도 衆生들을 위하여 現象의

世界에서 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분 보살님들께서는 중생과 같은 生死의 世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色 그대로 空[色卽是空]의 모습으로 모든 煩惱를 떠나 있습니다. 菩薩이란 生死에도 머물지 않고[色卽是空]

涅槃에도 머물지 않는[空卽是色]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自由로운 가운데 三身佛의 모습을 그대로 나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열반조차도 취착(取着)하지 않는 수행자의 모습이 곧 삼천대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부처님의

智慧德相이니 이를 큰사람이라고 합니다. 큰사람이란 크다 작다로 서로 比較되는 가운데서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大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大乘의 뜻을 원효스님께서는 <대승기신론소> 첫머리에

'낱낱의 모습으로 나투면서도 고요하고, 宇宙에 기득 찼으면서도 텅~비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華嚴緣紀의 一法界가 바로 大乘의 世界이며 이 世界에서 사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송 앞까지 말한 華嚴의 가르침이 부처님과 보살과 큰사람의 경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생각을 이어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중생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慈悲를 行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華嚴의 相卽相入의 世界는 佛菩薩의 境界일 뿐 나와는 相關없다는 生覺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생각생각마다 텅~빈 모습으로 一切를 이루고 있는 것을 如實히 살펴, 나라는 것이 虛妄한 分別에 의해서만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텅~빈 모습 속에 나투는 智慧德相의 부처님 세계가 菩提心이며 大願力이니

10佛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대원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할 수 없이

말로  나타내서 큰사람의 경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菩提心과 大願力心은 三身 부처님의 根本이며 아울러 衆生의 生命을 이루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華嚴에서는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아무런 差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緣起法界의 智慧德相은 마음이 나툰 것이며 이 모습 있는 그대로 부처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찾을 수 없고 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 法을 찾는 瞬間

우리는 法의 本性을 놓치고 비로자나佛의 세계도 잃게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마음자리의 本性을 보는 것만이

모든 중생과 사물의 本性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禪門의 祖師이신 달마대사께서도, '마음 하나를 꿰뚫어

아는 것 그대로가 모든 중생과 사물을 다 아는 것이다[觀心一法 總攝諸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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