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繁出如意不思議

장백산-1 2014. 10. 11. 13:13

 

 

 

繁出如意不思議 (번출여의부사의)

뜻대로 不思議함을 나타내고

 

海印三昧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중생들과 사물들의 걸림 없는 世界, 이와 같은 온갖 生命들의 饗演이

텅~빈 마음자리인 如意에서 뜻대로 나툰 것입니다.

 

 

 

 

 

 

 

텅~빈 마음, 걸림 없는 세계로
 

 

 

 

 

 

 

 

 

 

生死에서 벗어나 生死 밖에 있는 解脫을 願하는 것이 아니라, 生死의 모습을 如實히 아는 如實知見에 의해서

 

생사가 苦의 世界가 아님을 알게 되며, 아울러 모든 不滿足이 그 自體로서 不滿足을 낳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執着에 依해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生老病死등 4苦 8苦는 그 自體로서는 苦가 아닙니다. 苦의 根源은 集, 곧 自我意識으로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는 自我의 虛相을 有나 無 등으로 執着하는 것입니다. 自我가 그 自體로서 結定된 것이 없고 因緣條件에 依한

나툼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때 緣起空性의 世界가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般若心經에서는 깊은 般若波羅蜜을 행할 때,바로  執着이 단지 業에 依한 虛相임을 알고

緣起世界로 各各을 나투는 緣起空性에 대한 體得을 이룰 때, 모든 苦厄이 다 사라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苦의 世界는 自我意識에 依해 時空이 制限된 世界입니다. 이 苦의 世界가 無常, 無我를 如實히 아는 修行에 依해

制限된 時空間을 벗어나게 되는 瞬間,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限量없는 智慧光明의 無量光佛인 毘盧遮那佛,

法身 자리가 나투는 것입니다. 毘盧遮那佛의 世界는 生覺/마음/意識에 依한 時空의 制限인 業이 止滅된 世界입니다.

 

 

 

이와는 달리 衆生世間이란 意識이 닫힌 마음에 依해 自身뿐만 아니라 世界 自體를 制限시키고 있기 때문에

매사에 걸리고 있습니다. 이 意의 걸림을 벗어난 것이 '如意' 입니다. 때문에 모든 보배 중에 보배는 如意가 됩니다.

이것을 金剛經에서는 '三千大千 世界를 七寶로써 布施하는 것보다 텅~빈 마음의 功德이 더 크다'고 하였으며,

六祖壇經에서는 텅~빈 마음이 根本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텅~빈 마음이 如意입니다. 앞서 끊임없이 變하는 無常이 그 極點에서 不動이며 이 不動이 오히려

온갖 動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텅~빈 마음이 온갖 功德을 내는 根源 바탕이 됩니다.

 

 
世上의 가장 값진 보배라 해도 그 價値는 制限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價値尺度를 재는 人間의 마음이 限定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텅~빈 마음은 아무런 制限 없는 마음이며 그 自體로 時空間을 넘어선 마음으로 이곳에서

온갖 生命의 創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텅~빈 마음, 生命의 場은 마음의 故鄕이며 마음의 故鄕은 드러난

生命들의 모습만큼 多樣한 터전을 다 마련하니 마음이란 限定된 領域이 없기 때문입니다. 텅~빈 마음의 限定 없는

生命創造의 모습은 衆生의 制限된 意識/마음/生覺 이전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쉽사리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텅~빈 마음의 限量없는 生命인 智慧光明의 世界를 알고자 할진대 生覺生覺에 그 알고자 하는 一念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一念마저 사라져 無念이 됐을 때 알고자 하는 마음자리가 곧 限量없는 生命의

智慧光明이 되어 그 텅~빈 마음자리에 부처님의 빛을 온몸으로 나투게 됩니다.  

 

 

 
저 먼 곳 어디엔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智慧光明의 世界가 스스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열리면서 宇宙法界의

生命들에게 智慧光明의 世界를 여는 것입니다. 텅~빈 마음의 生命創造의 世界는 그래서 生覺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無念의 텅~빈 마음이 됐을 때는 온갖 時節因緣을 따라 갖가지 生命들의 世上을 걸림 없이 펼치니, 華嚴世界를 뜻하는 海印三昧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중생과 사물들의 걸림 없는 世界가 華嚴世界입니다. 이와 같이 걸림 없이

펼쳐지는 온갖 生命들의 饗演이 텅~빈 마음자리인 如意에서 뜻대로[如意] 나툰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生覺할 수 없는, 뜻대로(如意) 生命들의 饗演을 豊盛하게 나투는 것이 海印三昧입니다. 

 

海印三昧를 三昧 가운데 三昧라고 하는 理由가 여기에 있습니다. 海印三昧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사람을 能人이라

하며 能人의 마음자리인 如意보배에서 뜻대로[如意] 낱낱 모습들이 諸 모습대로 나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如意보배인 마음자리가 衆生의 마음자리를 떠나 따로 있는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衆生의 마음자리가 그대로 能人의 마음자리입니다.  

 

 

 

衆生과 能人은 緣起空性의 마음자리에서 아무런 差異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중생과 부처의 마음자리가

 다르다고 한다면 중생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조동종의 開祖인 道元禪師는

 

衆生이 깨닫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華嚴에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아무런 差異가 없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착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십시오. 그때는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때

善惡의 分別이 사라지고 텅~빈 마음, 法界 부처님(비로자나佛)이 온갖 마음으로 나툰 것이니 마음마음이

부처님의 世界요 낱낱 중생과 사물들도 또한 부처님의 몸입니다.

 

 

 

 

여기서 重要한 것은 不動心으로 온갖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對相에 따라 움직이면 안됩니다. 그때는 이미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마음 밖에 또 다른 마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황벽선사께서 착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요 악한 마음 그대로 부처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마음이 아니니 텅~빈 마음에서 나온 一切의 마음은

그대로 宇宙法界 부처님의 如意보배인 텅~빈 마음자리에서 뜻대로(如意) 나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法性偈의 두 번째 게송에 모든 法(諸法)은 움직이지 않는 本來의 고요함이라 말하였습니다. 이 不動의 마음을 조주스님께서는 平常心이라 하셨습니다. 一切 現象이 마음에서 일어났으나 마음은 한 번도 고요한 모습을 잃지 않고 不動으로 있습니다. 움직임 그대로 움직이지 않음이며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온갖 움직임(動止無止 止動無動)이

그 平常心 不動心 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또한 衆生의 制限된 의(意)의 作用인 妄念 妄想으로는 알 수 없으니

부사의(不思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如意보배(如意珠)를 갖고 뜻대로 부처님의 海印三昧에서 生覺을 넘어선 生命들의 場을 豊饒롭게 演出할 수

있는 能力이 있으면서도 그 自身은 모르고 있는 것을 法華經의 '신해품'에서는 궁자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華嚴經의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위해 여러 善知識을 참방하고는 마지막에 첫 번째 자리로 돌아와 完全한 깨달음의

世界를 열고 있는 것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 자리를 여의지 않고 뜻대로(如意) 如意보배인 마음자리에서 豊盛한 生命의 場을 여는 것은 無我, 無常의 三昧體驗, 곧 制限된 衆生心의 時空을 벗어난 海印三昧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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