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雨寶益生滿虛空

장백산-1 2014. 10. 11. 13:10

 

 

雨寶益生滿虛空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텅~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램마저 없을 때 도솔천(兜率天)의 삶을 뛰어 넘어

비로자나Vairocana佛 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宇宙森羅萬象 낱낱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으로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곧 온 宇宙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智慧德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빈 마음의 보배로운 삶
 
法句經에 보면 "비가 金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을 渴症, 자꾸만 되살아나는 欲望"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한 "구도자여! 아무 것도 願하지 않을 때까지 어느 것에도 依持하지 마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欲望이란 나와 나의 것을 가지는 마음입니다. 나가 있는 限 그 나를 채우는 나의 것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世上에 나만 存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세우고 나면 滿足할 줄 모르는 나의 것을 가지려는 欲望의 끝은 슬픔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欲望을 가라앉히면 연꽃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듯 슬픔도 그렇게 떨어져 나가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가 있는 限 너가 있고 너의 것이 나의 것이 되기 前까지 계속되는 不足함은 설사 너의 것이 모두 나의 것이 된다

해도 그칠 줄 모르는 갈증, 끝내는 虛無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現在에도 社會的으로 그 地位나 經濟에서

어느 정도 成就를 이루었다고 여긴 사람들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되돌아보는 瞬間 虛無로 채워지는 絶望感

앞에 限없이 無力해지다 끝내 아이의 精神狀態로 퇴행해 버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欲望이란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欲望의 本質이 꿈이고 이슬이기 때문입니다. 燦爛한 무지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손을 내밀면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는 虛象을 쫒는 것이 欲望의 모습입니다. 이 虛象의 欲望에 대한

虛爲意識이 絶對的 支配를 願하면서 社會的 不滿足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 結果 社會的 虛無 앞에 누구라도 自由로울 수 없는 現實에서 絶望하고 있는 群象이 時代時代의 歷史的 現象일

것입니다. 欲望을 쫒고 있는 現實의 自己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아무런 바램 없이 황소가 물을 들여다 보듯

自己 삶을 透明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바람 없이 지켜보지 않으면 虛爲意識에 窒息돼 있는 自身을 堪當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의 나이로 退行해 버린 어른(치매)이 그 좋은 예입니다.

 

 

 

단지 지켜보십시오. 아무 것도 願하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십시오. 어느 것에도 依持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우리가

依持해 왔던 이 世上 모든 것들은 虛象을 쫒는 意識에 依해서 만들어진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입니다.

이것들을 虛爲意識이라고 말하지요. 意識 스스로가 意識으로 만든 虛象에 스스로 얽매여 있는 現實을 놓으십시오.

이 生覺에서 自由스러워질 때 연꽃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나가듯 고통과 슬픔의 現實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이때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던 燦爛한 무지개가 성큼 自己 앞에 共存하게 됩니다. 잡으려고 하는 만큼

 

멀어지던 것이 그저 지켜 보는 自己로 있을 때 함께 살아 있습니다. 現實은 가지려는 者에 의해서 歪曲되기도 하지만 現實 삶을 지켜보는 者에게는 現實 삶은 빛으로 存在합니다. 지켜봄이란 삶조차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삶을 놓을 때 삶이 삶답게 살아가려면 現實에 滿足하게 되고 執着은 사라집니다.

 

個人과 國家가 그 所有를 키우려고 하는 現實, 所有가 많은 만큼 잘 산다는 歪曲 앞에 "執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무슨 힘이 있을까? 많이 所有하는 것은 그만두더라도 하루하루의 삶에서 實存의 絶望을 堪當해야 할 가난은 또

어떻게 할까? 不滿足의 原因인 執着이 現實에 滿足했을 때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죽음이 삶이 돼도 충족할 수 없는

滿足, 여기에 이르면 삶을 所有하는 者는 누구나 堪當해야 할 絶望일 것입니다.

 
個人과 社會的 絶望을 解消하는 方法은 所有를 비우는 데서 出發합니다. 布施가 그것입니다.

나누고 나누어 가장 적은 것으로 살 때 兜率天의 삶이 됩니다. 작은 것으로 滿足할 줄 아는 삶이

個人과 社會的 實存을 지켜가는 오직 한 길입니다.

 

 

이 길이 바로 海印三昧의 터전을 닦는 것입니다. 적게 가진 만큼 온전한 전체의 삶을 살게 되지요. 이때 보는

삶은 비가 金이 되어 내려도 끝나지 않는 渴症이 아니라,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부처님의 모습이며 설법이

되어 따로 依持할 곳을 求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華嚴經은 모든 法들이 그대로 佛性이라고 했으며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아미타경>에서는 宇宙森羅萬象 모두가 阿彌陀佛을 염(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능가경>에서도 菩薩이 涅槃을 取하지 않는 것이랴말로 完全한 涅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涅槃을 求하려는

마음조차 쉬어 버린 텅~빈 마음이 되어 조그만 바람마저 없어졌을 때 도솔천의 삶을 뛰어넘어 비로자나佛

智慧德相으로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곧 宇宙가 비로자나부처님의 智慧德相으로 充滿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로자나佛의 智慧德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텅~빈 마음, 곧 조그만 바람마저 完全히 사라져

眞如空性의 삶이 되는 마음이 바로 宇宙에 가득찬 비로자나佛의 智慧德相이며 法비처럼 쏟아지는 보배입니다.

 

비로자나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투는 텅~빈 마음의 智慧功德은 限量 없는 時空間 無所不在하게 存在합니다.

하나도 不足함이 없어 一法界의 一切를 貫通하고 이 世上 모든 生命들을 살찌게 하면서 그 모든 生命들을

自身의 生命으로 하고 있는 법계일상(法界一相)이 바로 텅~빈 바탕 마음입니다.

 

 

 

法界一相 卽, 텅~빈 바탕 마음 여기에는 衆生과 衆生을 利益케 하는 보배가 따로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衆生이 있고 보배가 있다고 하면 어느 한 衆生도 滿足할 수 없습니다. 限定된 個人이면서 同時에 

限定을 넘어서기를 願하는 모순의 壁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衆生이 本來 텅~빈 모습으로 相卽相入의

一眞法界를 自身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限定을 넘어선 그곳에서 참으로 滿足돼 있는 自身으로 살게 됩니다.

 

 

滿足된 삶으로 언제 어디서나 살고 있는 보배비가 虛空에 가득하다고 比喩했습니다.
 
衆生의 삶이 그대로 法界를 가득 채운 보배라는 말로 이밖에 다른 보배가 없습니다.

온갖 欲望과 忿怒와 어리석음(貪瞋癡 三毒心)을 벗어나 참으로 텅~빈 마음의 삶, 海印三昧의 삶, 본래 마음자리인

如意보배의 삶이 豊盛하게 나툰 宇宙森羅萬象萬物 그 모습 그대로가, 어떤 比喩로도 나타낼 수 없고,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떤 生覺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不思議한 비로자나佛로 사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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