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衆生隨器得利益

장백산-1 2014. 10. 11. 13:09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수기득이익)

 

衆生들은  마음그릇따라 利益을 얻네

 

 

닫힌 마음의 衆生業을 버리고 텅~빈 마음으로 살 때, 海印三昧 가운데서 同一時空無限時空에서 사는

모든 宇宙森羅萬象인 衆生과 事物들이 諸 모습대로 三界에 살면서 三界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海印三昧의 無限히 열린 時空間에서 限量없는 無量功德으로 相互 열린 世界의 빛을 나투고 있는 것,

이것이 華嚴에서 말하는 緣起的 關係의 利益입니다.

 

 
相互 열린 世界의 빛으로
 

마음(心)과 부처님(佛)과 중생(衆生)이 아무런 差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그것은 이 셋의 本바탕이

眞如空性인 데서 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衆生心은 스스로가 眞如空性인 줄을 알지 못한 狀態고

 비로자나佛인 法身佛은 眞如空性을 具現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衆生이 眞如空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을 疎外된 삶, 煩腦 妄想에 물든 삶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삶의 본바탕이 源來  하기 때문에 修行에 依해서 自身의 本來面目을 아는 것이 可能합니다.

本來面目이라는 말은 늘 말씀 드렸듯이 緣起關係에서 하나된 온生命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몸과 마음의 關係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을 떠나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을 떠나서 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마음과 몸을 人間의 意識과 肉體로 限定시킬 수는 없으니, 宇宙法界 全切가 마음이며 몸인 것에서 緣起의 總相으로 하나이며 이것이 人間 個體 生命의 場에서도 하나로 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수시로 變합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머뭄 없이 變化 속에서 諸 모습을 갖고 있으니 變化가 自己 正體性을 維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과 전체 법계의 관계도 또한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이 그대로 全切의 한 사람의 모습을 있게 하는 것도 몸과 마음의 關係와 아무런 差異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 個體의 生과 死는 個體의 生과 死로 보는 데서는 生死가 있는 것 같지만, 그 生死가 宇宙法界

變化를 그대로 담은 채로 한 人間의 모습을 존재하게 한다고 볼 때는 生死가 있지만 이미 生死를 떠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世上 모든 存在는 緣起關係의 그물網으로 하나되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獨立된 個體로서의 個體란 存在할 수 없습니다. 緣起關係

만이 生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緣起關係 그 自體는 나눌 수 없지만 個體란 緣起關係 안에서 더욱

찬연한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個體가 비로자나佛은 眞如空性을 具現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緣起實相인 生命의 場에서 各各은 連續的으로 不變의 存在者로 存在하거나

단지 一會的인 存在者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生命의 場과 緣起關係 없이 存在하지도 않습니다.

 

 

獨立된 個體로 實存을 限定시킬 때는 有論이나 無論 또는 常住論과 斷滅論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虛爲의 見解, 虛爲의 自我意識 속에 自身을 함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단지 虛妄한 生覺으로 만든 世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虛妄한 生覺의 世界에 사는 삶을 닫힌 業의 時空에 사는 삶이라 하여 衆生의 삶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反面 無我의 三昧 속에 사는 眞如空性의 世界란 활짝 열린 時空의 삶으로, 같은 時空間에 있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時空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華嚴의 重重無盡으로 겹친(重疊된) 時空에서 보면 時空間이란 하나의 單一한 時空間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無量한 많은 時空이 同一時空에 겹쳐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三界의 衆生이란 無限時空의 다른 모습으로도 生覺할 수 있지만, 同一時空에 無限히 겹쳐 있는 時空에서의 다른 모습, 곧 우리 눈과 귀로는 把握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닫힌 마음의 衆生業을 버릴 때, 海印三昧 가운데서 同一時空과 無限時空에서 사는 모든 중생과 사물이 諸 모습대로 三界에 살면서 三界를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海印三昧의 無限히 열린 時空에서 限量없는 無量功德으로 相互 열린 世界의 빛을 나투고 있으며,

如如한 모습을 가리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빛을 自身의 모습 그대로 받아서 生命의 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自身의 모습 그대로 生命의 燦爛한 불이면서

同時에 無限히 열린 깨달음의 世界에 生命의 불꽃을 나누고 잇습니다. 이것이 華嚴에서 말하는 利益입니다.

有爲로 造作된 生覺이 열리면서 나타난 온갖 衆生들의 참 生命의 緣起인 비로자나佛의 빛을 나누는 것이지요.    

 

 

 

스스로 비로자나佛이면서 同時에 이웃들인 宇宙森萬象萬物을 비로자나佛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중생 하나도 비로자나佛의 빛의 生命을 떠나있을 수 없으며 어떤 한 生命體에 依해서 나머지가 造作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비로자나佛과 비로자나佛으로 相互 無難히 浸透하면서 宇宙法界의 보배구슬을 단 그물網의 모습으로 함께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데에서만이 비로자나佛의 빛으로 있는 것이며, 個體의 別相은 비로자나佛의 빛의 모습에서의

別相일 뿐 이 緣起關係를 떠나서 다른 비로자나佛의 빛의 別相이 아닙니다. 

 

 
 

衆生의 얼굴얼굴만큼이나 많은 無量한 비로자나佛의 빛이지만 各各의 비로자나佛은 다른 모습의 비로자나佛

그 모습 그대로 存在하게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이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텅~빈

마음의 相互浸透입니다. 따라서 無限히 많은 비로자나佛들이 自己 모습을 텅~비운 데서 自身의 모습을 갖게되고

이웃의 無限히 많은 비로자나佛의 얼굴을 갖게도 하고 있습니다.

 

 

 

 

 
이 텅~빈 모습이되 自己 모습을 갖는 것이 華嚴에서 말하는 衆生의 그릇입니다. 단지 닫힌 모습인 業의 나툼만으로 衆生을 制限해서는 안됩니다. 華嚴三昧인 海印三昧란 바로 모든 衆生의 모습 그대로 열린 世界의 비로자나佛의 빛으로 있는 것을 알 때 나타난 無我의 三昧이기 때문입니다. 이 텅~빈 마음, 海印三昧에서 봤을 때 自身의 모습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도 그대로 비로자나佛이 됩니다.

 
이 말은 모든 衆生과 事物이 그대로 비로자나佛이 되는 것이니 모든 衆生과 事物이 本來 自我가 없으며

모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그와 같은 모습을 갖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獨立的 獨者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없는 海印三昧에서 모든 모습의 힘들이 내 모습을 갖게

하여 내가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佛의 모습이며 그 가운데 모든 衆生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一切衆生의 氣運이 모여서 내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衆生으로서의 自我를 갖지 않는 데서 法界衆生으로 비로자나佛이 되고, 法界衆生의 諸 모습으로

그릇[器]을 갖고 있으나 이것은 아울러 이웃 비로자나佛을 만드는 것이니, 無限히 펼쳐진 비로자나佛 世界

이룩하게 하는 것이 또한 衆生 自身의 利益이 되는 것입니다.

 

 

自身 스스로의 利益만을 求하려고 할 때는 한 톨의 밥도 眞正한 意味에서 消化시킬 수 없지만,

비로자나佛을 이루는 베품은 그대로 온 宇宙法界를 消化시킬 수 있으니, 베품만이 利益아라는

진실을 아는 것이 海印三昧에서 얻는 衆生의 利益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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