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緣善巧捉如意(무연선교착여의)
分別을 떠난 巧妙한 方便으로 뜻대로 如意보배를 잡아
分別 없는 그저 지켜보는 修行으로 一切가 마음자리의 나툼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無緣이라 말합니다.
또한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衆生의 世界가 그대로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이루게 하니 方便이라고 말합니다.
홀연히 한 마음 일어나니
마음은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홀연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에너지 입니다. 일어났을 때는 있는 것 같지만
사라지고 나면 없습니다. 때문에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듯 없으며 없는 듯 있는 것으로, 마음 그 自體는 어떤 모습으로도 自己自身을 머물지 않습니다. 있는 데도 머물지 않고 없는 데도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에너지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因緣따라 作用하고 있습니다. 作用만이 있을 뿐 作用 裏面에 體性으로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홀연히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如實히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려 修行이 익어갈 때,
意志作用인 固定된 對相을 指向하는 衆生心이 쉬게 되고 마음이 一切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있으며 宇宙法界는 生命의 場을 열어갑니다. 宇宙法界의 生命의 場은 마음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텅~빈 마음, 홀연히 일어나는 마음, 作用만으로 全切를 이루는 마음이 佛性이면서 法界의 온전한 生命의 열림입니다.
것이 아닙니다. 마음 그대로 作用인 곳에서 緣起가 現顯하고 있으며 緣起는 마음으로 自身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야말로 緣起法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은 그 自體가 原因이 되거나 그 自體 밖에 原因이 있어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因果關係에서 原因과 結果일 뿐, 어떤 것으로도 結定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무어라고 決定하여 말할 수 없는 데서 一切가 存在하게 되니 不可思議라고 말합니다. 이 分別을 떠나 絶對平等의 慈悲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生覺으로 헤아릴 수 없어 無緣, 곧 分別을 떠나 하나됐다고 말합니다.
갖고서 相對하지 않는 가운데서 一切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緣起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수스님께서는
緣起法을 空이며 中道라고 말했습니다.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接面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全切가 事實은 이 接面의 連續이라고 했습니다.
곧, 空이 一切의 眞實한 모습이며 空이기 때문에 生命活動이 可能하다고 했습니다.
空이 일어나서 한 모습을 나투는 現象을 臨時로 잠깐 存在하는 假法이라고 말하는 理由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습은 諸各各의 모습으로 存在하는 모습이 아니라 空인 接面의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른 表現이기 때문입니다.
이 空의 接面에 依해서만이 一切法이 各各의 모습을 나툴 수 있습니다. 그래서 中道인 空은 하나의 事件이나
事物들이 이루는 接面인 同時에 그 各各의 全切가 되고 잇습니다.
여기에서 空과 假法과 中道가 緣起實相인 인드라網의 法身인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나타내는 다른 이름인
事實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中道의 참모습은 모든 衆生의 各各의 모습입니다. 衆生을 떠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으로서 各各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衆生 그 모습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 없는 데서
마음을 나투어 衆生의 世界 그대로가 비로자나佛의 世界를이루게 하니 方便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宇宙法界는 텅~빈 마음을 表現하고 있습니다. 마음 없는 것이 淸淨 法身이고, 거기서 나타나는 宇宙法界가 千百億
化身이며, 마음 없는 데서 一切를 이루는 功能이 圓滿 報身입니다.
法身佛 報身佛 化身佛의 三身佛로 一切 宇宙法界를 이루는 瞬間입니다.
修行者의 보배는 法身佛, 報身佛, 化身佛입니다. 그런데 이 三身佛 모두가 宇宙法界身인 텅~빈 마음자리에서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 쓰는 대로 三身佛이며 宇宙法界의 創造입니다. 이것이 또한 如意보배입니다. 텅~마음자리에서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뜻대로(如意) 나타내는 보배, 三身佛이 如意보배입니다.
法身佛의 無限한 비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分別을 떠날 때, 微妙한 비로자나佛, 宇宙法身佛의 方便을 自己 스스로 쓰고 있으며, 如意보배를 뜻대로(如意)
다루어 自己 자리를 떠나지 않고 根本實在에 돌아와 있게 됩니다.